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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마우스의 외침

기술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by 이정호

클릭 한 번의 혁명


“번역하기.” 웹페이지를 우클릭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 메뉴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러나 20년 전만 해도 외국어로 된 자료 하나를 해석하려면, 사전을 뒤적이고 문장을 분석하며 수없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이제 클릭 한 번이면 웹페이지 전체가 우리말로 바뀐다.


AI 기반 번역 도구의 보급은 단순한 편의의 차원을 넘어, 정보 접근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trategy Analytics)에 따르면, 전 세계 온라인 사용자 중 74%가 '번역 기능을 정기적으로 사용한다'라고 응답했으며, 이는 비영어권 국가일수록 더욱 높은 수치를 보였다.


기술은 말없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러나 그 침묵의 속삭임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번역은 누군가의 고통이었다


2000년대 이전, 번역은 노동이었다. 특히 학술 논문이나 외국 보도자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십만 원을 들여 전문 번역가에게 맡기거나, 긴 문장을 하나하나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수작업이 필수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들고 다니던 책 중 하나는 바로 영어-한글 사전이었다.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수십 페이지를 넘기고, 문법적 해석을 위해 별도의 문법책을 곁에 두는 일이 일상이었다.


정보 접근의 격차는 심각했다. 영어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글로벌 정보에 대한 이해가 제한되었고, 이는 개인의 학습 격차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2004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어 해독력 부족으로 인한 정보 격차’가 청년층의 해외 진출과 연구 활동에 직접적인 제약으로 작용한 바 있다.


구글 번역기, 파파고, 그리고 AI의 진화


2006년, 구글 번역기(Google Translate)가 등장했다. 초기에는 통계 기반 번역 통계 기법(SMT)을 활용해 단어 대 단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문장 구조가 부자연스럽고 오역도 많았다.


그러나 2016년, 구글은 인공신경망 기반 기계번역(NMT, Neural Machine Translation)을 도입하면서 번역 품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네이버 역시 같은 해 '파파고(Papago)'를 출시하며 한국어에 특화된 번역 서비스를 선보였고, 현재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13개 언어를 지원한다.


2022년 글로벌 언어 번역 평가 플랫폼 'WMT(Worskshop on Machine Translation)'의 보고에 따르면, NMT 기반 번역기는 사람 번역에 근접한 BLEU 점수(문장 정확도 평가 지표)를 기록하며, 일부 언어쌍에서는 ‘비전문가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향상되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한국어-영어, 일본어-영어 번역의 경우,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 모두 BLEU 점수 35~40점을 기록해 상용 번역의 기준치를 상회하고 있다.


기술의 혜택과 그림자


이제 우리는 전 세계의 정보를 언어의 장벽 없이 읽는다. 유튜브 자동 번역 자막 기능, 논문 사이트의 자동 번역 옵션, 글로벌 회의에서의 실시간 통역 AI 등은 모두 정보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2023년 발표된 유네스코의 ‘언어 기술과 미래 노동’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통번역 업계의 단순 번역 업무는 10년 내 40% 이상 자동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미국 노동통계국(BLS)은 2019년부터 2029년까지 번역가 및 통역가의 고용 성장률을 20%로 예상했지만, 2022년 보고서에서는 기계 번역 기술의 영향으로 해당 수치를 하향 조정하였다.


그러나 우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고 있다. AI 번역의 품질을 평가하고 훈련 데이터를 다듬는 'AI 언어 평가자', 콘텐츠의 맥락에 맞게 AI 번역을 다듬는 '포스트에디터(post-editor)', 다국어 기획 전문가 등의 직업군은 AI와 인간의 협업을 바탕으로 확장되고 있다.


번역은 이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해석, 그리고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종합 능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기술과 인간 사이의 균형을 묻다


우리는 매일 우측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 행위는 단순히 번역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할을 기술과 나누는 선택이다.


기계는 문장을 번역하지만, 그 문장의 뉘앙스, 의도, 문화적 배경을 읽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우리가 기술과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유연성뿐 아니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판단력과 통찰력이다.


번역기 너머에는 여전히 인간의 해석이 필요하다. 기계는 정보를 가져다주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다. 그러니 오늘, 우측 마우스가 속삭이는 그 외침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보자.


"나는 너의 조력자일 뿐, 너를 대신할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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