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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날(詩)

by 이정호

피는 날


이정호


물끄러미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세월의 고요를 뚫고

너는 붉게, 눈부시게 피었다.


어느 옛날,

이름조차 잊힌 여인의 웃음 같던 너여-

바람 끝 설렘이

오늘 내 심연에 가라앉았다.


렌즈 너머로 바라보며

나는 알았다.

넌 잠시 머물다 가는 꽃이 아니라

시간을 멈추게 하는 존재란 걸.


말없이 서로를 닮은 우리

나는 추억을 채우고

너는 지금을 불태운다.


그리움, 미련-

네 붉은 숨결 앞에서

나는 기쁨을 다시 배운다.


<글쓴이의 말>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산책길 울타리 너머에 매달린 능소화를 매일같이 바라보았습니다.

한겨울의 마른 덩굴에서 돋아난 연두색 싹, 장마 속에서 묵묵히 살을 키우던 봉오리, 그리고 마침내 터뜨린 한순간의 붉음까지...

그 모든 과정을 눈으로, 마음으로 기록하며 기다렸습니다.

삶의 대부분이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는 평범한 진실이, 이 작은 꽃 앞에서 새삼 또렷해졌습니다.

렌즈를 들이대는 순간 저는 ‘기록’이 아니라 ‘멈춤’을 경험했습니다. 셔터 한 번으로 시간이 붙잡힌다 해도, 정작 멈춘 것은 피사체가 아니라 제 마음이었습니다.

추억과 현재가 한 프레임 안에서 포개질 때, 저는 시를 쓰듯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피는 날'입니다.

꽃의 짧은 전성기는 우리 각자의 삶과 닮았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지고 다시 피면서도, 매번 처음인 듯 벅찬 순간을 맞이하니까요.

이 시를 통해 독자께서는 ‘멈춘 시간’ 속에서 작지만 선명한 기쁨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바쁜 일상 틈마다 자신만의 ‘피는 날’을 찾아, 잠시라도 마음을 붙들어둘 수 있다면 그것이 저에게 가장 큰 보람일 것입니다.

오늘도 무심히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 잎맥보다 가느다란 설렘 한 조각을 건져 올리시길...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의 언어로 또 다른 꽃을 피워 내시길 소망합니다.


20250625_071517.jpg (Photo by J.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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