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해는 머물 수 있는가(詩)

by 이정호

저무는 해는 머물 수 있는가


이정호


저무는 해에게

잠시만 더 머물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저녁이 있다.


그러나 해는

붙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늘 해답을 남긴다.


해는 해로,

달은 달로

자기 몫의 시간을 다 살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운다.


나는 이미 지나간 해를

다시 불러 세우고,

아직 건너지 않은 달의 밤을

미리 걱정하며 바라본다.


지나침과 앞섬 사이에서

욕심은 늘 내 쪽으로 기울고,

자연은 한 번도

자기 것을 더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하루에

내년의 바람을 끼워 넣으며

나는 시간을 앞질러 살고 있다.


그러나 해는 묻지 않는다.

머물지 못해 미안하다고도,

떠나서 아프다고도.


그저

저물 줄 알기에

다시 떠오를 수 있음을

몸으로 증명할 뿐이다.


저무는 해는 머물 수 없는 대신

남아 있는 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친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 하나의 해를 보내며

비로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앞당기느라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는가.


<글쓴이의 말>

해가 저무는 풍경은 매년 같아 보이지만, 그 앞에 서 있는 마음은 늘 다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면 우리는 자주 시간을 붙잡으려 하고, 오지 않은 날들을 앞당겨 걱정한다.


이 시는 그런 조급함을 자연 앞에 조용히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은 언제나 자기 속도로 흐른다. 해는 머물지 않지만 반드시 다시 떠오르고, 달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어김없이 제 자리를 찾아온다. 그 질서 앞에서 인간의 욕심과 불안은 얼마나 작은 가를,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인간다운가를 돌아보고 싶었다.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잃는 일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시가 읽는 이에게 도 각자의 저녁 하늘을 잠시 올려다볼 여백이 되기를 바란다.


저무는 해를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래서 오늘이라는 순간을 조금 더 온전히 살아도 된다는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D-317.jpg (Photo by J.H.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