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쌓았다, 이제 생각할 차례다

by 이정호

얼마 전, 한 에너지 기업의 임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는 디지털 전환에 수년간 공을 들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업무 속도는 빨라졌지만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뀐 느낌은 없다"라고. 그 말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디지털화(Digitalization)는 분명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DX는 '효율'이었다, AX는 '지능'이다


디지털 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은 아날로그 기반의 업무 수행 방식을 디지털 기술로 대체하고, 데이터를 쌓고 연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종이 문서를 전산화하고, 현장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고객 접점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 우리가 그동안 DX라 불렀던 일들이다.


그러나 AI 전환(AX, AI Transformation)은 차원이 다르다. AX는 단순히 '디지털 도구를 쓰는 것'이 아니라,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스스로 분석하고 패턴을 발견하며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것, 즉 '지능화'의 단계다. DX가 기업의 몸을 만들었다면, AX는 그 몸에 두뇌를 불어넣는 과정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그 영향은 훨씬 광범위하다.


한국 기업의 딜레마, 디지털은 했는데, 혁신은 없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투자는 절대 적지 않았다. ERP 도입, 클라우드 전환, 스마트팩토리 구축... 이런 시도들은 분명 성과를 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많은 경우 'DX'는 기존 프로세스를 디지털로 옮겨놓은 것에 그쳤다. 데이터는 쌓였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시스템은 도입했지만, 의사결정 방식은 여전히 경험과 직관에 의존했다.


디지털화는 했는데, 혁신은 없다. 많은 기업 현장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이 현실화하고 있는 지금, 더 이상 사람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는 성장을 지속할 수 없다. AI가 단순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는 것을 넘어, 복잡한 분석과 예측, 창의적 문제 해결까지 수행할 수 있다면, 이는 사람이 줄어드는 시대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지금 AX로의 전환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전KDN, AX 시대의 사명과 역할


그렇다면 ICT 기반으로 전력기술을 이끌어온 한전KDN은 이 흐름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력 시스템은 현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인프라다. 여기에 AI가 결합할 때 그 파급력은 단순한 기업 경쟁력 향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AI 기반의 전력망 이상 탐지 시스템은 사고를 예방하고 정전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을 AI로 정밀 예측하면 에너지 수급 안정성이 높아지고, 탄소중립 목표 달성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수백만 개의 스마트 미터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AI가 분석하면, 고객별 맞춤형 에너지 절감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도 현실이 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X는 기술 도입을 넘어, 조직 문화와 사람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AI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AI와 함께 일하는 방식을 익히고 AI가 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역량 즉 창의성, 공감 능력, 윤리적 판단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전KDN은 내부 인력을 AI 활용 전문가로 성장시키는 데 아낌없는 투자를 해야 하며, 데이터를 통합하고 활용하는 체계를 탄탄히 구축해야 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늦는다


솔직히 말하면,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움직이고 있다. 경쟁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한 번 벌어진 기술 격차는 좀처럼 좁히기 어렵다. 'DX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는데 AX라니'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AX는 DX가 완성된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를 쌓으면서 동시에 AI로 활용하는 것, 디지털화와 지능화를 병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AX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전KDN이 ICT 기반 전력기술의 선도 기관으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다하려면, 지금, 이 순간 과감하게 AX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AI 혁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오늘 내가 맡은 업무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작은 고민이 쌓여, 결국 한전KDN의 이름을 빛내고 대한민국 전력 산업의 새 장을 열 것이라 믿는다.


※ 위 글은 한전KDN 사보, KDN Life 2026년 03/04월호에 게재되었음(Vol.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