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촉촉이 내린 가을 아침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오랜 세월 너를 지켜보았고 주기만 하던 너는 이제 소재와 주제를 잃었는지 겸연쩍게 모습을 감추려 하는구나.
사진작가가 너 오기만을 서성이며 기다렸고, 그림 작가가 너 머물기를 기다렸으며, 글 작가가 많은 재료를 너에게서 찾았다.
비가 촉촉이 내린 아침 밴치에 떨어진 낙엽만 보아도, 산책하며 만난 공기만 접하여도, 굳이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연상하지 않아도 좋았었다.
조용히 흐르는 냇가에 위치한 한적한 카페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음미할 때도 그냥 좋았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저녁 오솔길을 걸으면 더욱 좋았다.
너의 가치는 굳이 물을 필요도, 따질 필요도 없었으며, 가을이라는 이름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의 증폭을 보았다.
지금쯤 카메라를 메고, 하얀 백지를 품고 너를 그리려 기다리던 나는 온 듯, 오지 않은 듯 쭈삣거리는 너와 마주한다.
가을인 너는 그렇게 많은 울림과 공감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고, 네가 가진 예술성은 감히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풍부한 포용성을 지녔다.
너를 생각하면 가기 전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시간을 아꼈고, 오래 머물기를 주저할 너를 보내기 아쉬워 촉각을 세웠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너를 만날 시간임에 분명하다. 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살폈고, 동공까지 확장시켰으나 어디쯤 왔는지, 어디에 머무는지, 아니면 스쳐 지나갔는지 알 길이 없다.
휴대전화가 없는 너에게 전화를 할 수도, 소리 높여 불러보아도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
누가 올해 가을인 너를 달아나게 했으며, 누가 등 떠밀어 가라고 했는가?
어쩌면 네가 오래 머물기를 바란 내가, 어쩌면 옛날 추억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내가 바보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시 지나갈 편리함과 즐거움과 극히 인간적인 과학적 논리가 탄소 발자국을 남겼고, 그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네가 이 길을 피해 딴 길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지. 그래서 너를 모든 작가들이 사랑하고 기다렸지.
올해 스쳐 지나간 너를 내년, 후내년에 만날 수 있다는 기약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미 우리가 저질러놓은 과오와 실수 앞에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구나.
친구 가을아.
나도 외롭지만 너는 얼마나 외롭겠냐? 4개의 계단을 착착 올라가다 마치 점프하듯 너를 스쳐간 외로움과 소외감은 분명 나의 갑절은 되겠지.
가을아. 오늘 아침엔 네가 더욱 보고 싶구나.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정녕 사과할 테니 다시 예전처럼 지내지나 않으렴?
그냥 그 모습대로 낙엽 밟는 시간과 공간을 주고 적당한 사색의 조건과 생각의 틈바구니를 열어주면 안 되겠니?
불타는 천연색을 원하진 않는다. 그저 네가 오래 머물러 나의 깊은 인간적 고찰과 명상의 잔디를 깔아주면 안 되겠니?
이미 가버린 너에게 부탁의 말을 건넬 수도, 단문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기에 못난 표현으로 이렇게 주소지가 없는 편지를 보낸다.
네가 읽든, 읽지 않든 나는 너에게 편지만이라도 남겨야겠다. 그게 내가 편해지고 네가 주던 많은 것을 회상케 하기에 말이다.
친구 가을아. 우리가 잘못했다. 아니 나부터 잘못했다. 마냥 주기만 하였던 너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았었고, 영원히 나와 친구 될 줄로만 알았다.
스쳐 지나간 후에나 안 내가 아둔했으며, 잠시 편하자고 주려고만 했던 너에게 큰 상처를 입혔구나.
친구 가을아. 기술과 과학이 몸은 편하게 하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더욱 아스라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은 왜일까?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무장한 회색 벽들이 울긋불긋 화장을 한 채 빤히 나를 직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가을이 너의 품성을 지금에야 안 나는 내 자식과 후배들에게 너의 존재감과 크기를 알리기나 해야 할 것 같다.
가을아 대문을 열어놓고 문설주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을 알게 해 준 것도, 없음이 있음의 가치를 배가시켜 줌도 너에게서 큰 배움을 얻었다.
그래 또 너를 내년이면 만날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살게.
다시 철이 바뀌면 우리 만나 박장대소하며 너의 선물 보따리를 받을 준비나 할게.
친구 가을아. 잘 다녀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