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훌쩍 지난 얘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전파 분야의 엔지니어로 한창 이동통신이며 인터넷 기반의 통신 인프라가 불붙던 시절, 이 분야 최고의 측정기 제조회사인 독일의 ‘로데슈바르즈’에서 장비 도입을 위한 사전 검수 및 운용법 교육을 받기 위해 이 회사의 본사와 공장이 가까운 뮌헨으로 날아갔다.
당시 한국에서 뮌헨으로 가는 직항 편은 없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입국 심사를 마치고 독일 국내선인 루프트한자를 타고 숙소인 호텔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녹초가 되었고, 시차와 생소한 나라의 도시에서 겪는 모든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가 되었었다.
겨우 짐 가방 두 개를 차에서 내려 끌고 호텔 프런트로 가 방을 배정받았다. 비교적 상냥한 직원의 안내와 미리 예약을 마친 덕에 별 무리 없이 방 키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방 번호가 적혀있는 숫자를 아무리 봐도 해독이 되질 않는다. 내가 거꾸로 보고 있나 싶어 뒤집어 보아도 전혀 모르겠다. 윗면을 보니 분명 Room number라고 영어로 정확히 표기가 되어있다.
그럼 거꾸로 보는 것은 아닌데,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숫자가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아랍어 같기도 하고, 상형문자 같이 보이기도 한다. 10여 분을 키 번호 조합에 머리를 굴리다 보니 긴 여행의 피로가 더해져 이젠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하는 수 없이 프런트로 다시 가 룸 넘버를 물었다. 그랬더니 직원이 "세븐, 원, 포"라고 또박또박 얘기를 하여준다. 아니 이게 714호 라구요? 하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동양에서 온 촌놈 소리 듣기 싫어 그냥 알았다고 하고 방으로 향했다. 서양의 숫자 표기 방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게 서로의 문화 차이가 아닌가? 또 영어로 또박또박 얘기해 주는 숫자의 조합을 듣고 보니 이제야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통상 한국 호텔에서 체크인을 할 때는 사람이 룸 넘버를 적기보다는 숫자가 새겨진 키를 주는데 유럽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키를 담는 봉투에 숫자를 적어준다.
올해도 부인과 동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문화적 차이는 참으로 많이 있음을 느낀다. 특히 ICT 인프라 면에서는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이동통신망도 형편없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고, 그네들의 이해할 수 없는 화장실 문화와 빠르지 못한 행정 서비스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향후 크게 바뀌지도 않을 것 같다.
당시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없어 사진을 찍지는 못하였지만 생생하게 머리에 각인된 룸 넘버를 재현하여 써보았다. 문화의 차이는 이래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다름이 있어 여행이 즐겁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 불가하여 여행이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다름 속에서 배우고 웃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일 것이다. 호텔 프런트에서 낯선 숫자 표기를 보고 당황했던 그날처럼,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 파란 눈의 매니저가 또박또박 영어로 불러주던 "Seven, One, Four"라는 숫자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아마 그런 차이와 당황스러움이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