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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에 담긴 불편한 진실

by 이정호

‘이력서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현장에서는 전통적인 관행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이력서 양식은 대개 학력, 자격, 경력, 기타 사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정해진 칸에 따라 정보를 기계적으로 채우는 방식을 고수한다. 물론 이런 틀은 기업 입장에서 지원자를 한눈에 파악하고 비교하기에는 편리하다. 하지만 이 정형화된 서류가 지원자의 진정한 역량과 소양을 담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크다.


반면 미국에서는 ‘resume’라는 보다 유연한 형태의 문서를 사용한다. 직무와 직접 연관된 핵심 역량을 강조하고, 그 외의 구체적인 형식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서술식으로 쓰든, 표를 활용하든, 지원자가 자기 강점을 어떻게 어필하느냐가 중요하다. 유럽의 ‘CV’ 역시 크게 다르지 않지만, 조금 더 길게 작성되어 개인의 경험, 성과, 비전 등이 풍부하게 드러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나는 어떤 일을 해왔고, 앞으로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어필이 서류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한국의 이력서 문화가 이처럼 획일적인 틀을 갖추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도 있다. 일본의 식민 통치 시절, 개인의 학력·자격·경력을 중시하는 문서 기반 평가가 자리 잡았고, 이후 한국이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대규모 인력을 빠르게 선발하기 위한 효율성 논리에 힘입어 지금의 형태가 더욱 공고해졌다. 객관화된 이력서 양식이 서류 심사에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지원자의 창의성이나 능동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놓치기 십상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보여주는 채용 방식은 그 사례를 확연히 보여준다. 전통적 이력서 외에도 실무 테스트, 상황별 문제 해결 능력 테스트, 팀 프로젝트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형태로 지원자의 역량과 태도를 다각적으로 검증한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자격증이 몇 개인지 보다는 ‘실제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역량 면접, 포트폴리오 중심 평가 등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나 전문 자문·평가 분야에서는 여전히 기존 양식에 익숙해,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결과적으로는 지원자와 기업이 서로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전에, 칸 채우기로 인재를 걸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이력서는 ‘개인의 능력과 비전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지, ‘서류심사를 위한 포맷’으로만 쓰여서는 안 된다. 정형화된 칸에 얽매이기보다는, 지원자가 자신의 성취와 역량, 미래 계획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낼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트폴리오나 프로젝트 사례, 면접에서의 문제 해결 프로세스 등 다양한 평가 도구를 병행해 입체적인 선발 과정을 구축한다면, 조직은 훨씬 창의적인 인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칸에 갇힌 이력서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담기 어려운 그릇이다. 일본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온 획일적인 문화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고, 또 과감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양성과 잠재력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과 조직 모두가 성장하고, 한국 사회가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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