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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젤리 Apr 01. 2024

여행지에서 일기를 쓰는 이유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


 언제나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대되는 일이 없다고 슬퍼하기엔 99.9%의 일상이 너무도 소중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도, 매일 먹는 끼니와 매일 보는 얼굴도. 그제야 여자는 내 삶이 다 어디로 갔냐 묻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실은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달러구트 꿈백화점 2, 이미예


삶은 향유하는 것보다 인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다는 말이 위로가 되기 보다는 잔인하게 들리고, 언제까지 견뎌내야 할까 막막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안 견디면 된다고, 삶을 인내하는 걸로 생각 안 하면 된다고, 문제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라고.


혼자 떠난 여행에선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나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예쁜 풍경을 보여주며 나를 한껏 아끼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여백이 생기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다음에는 같이 와야지, 여기 가보라고 알려줘야지, 이거 좋아할 텐데 사다 줘야지'

그리고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여행 뒤에 돌아올 일상을 잘 누릴 수 있는 힘이 충전된다.


나는 여행도 일상처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럼 일상을 여행처럼 누릴 수 있는 시각을 배울 수 있어서다.


특히 혼자 간 여행에서 일기장은 든든한 말동무가 되어준다. "와 방금 이거 진짜 맛있다. 오늘 너무 피곤한데 재밌었다. 아까 안 산 그 컵이 눈에 아른거린다" 등등.. 일기장에 마구 수다를 떤다.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알게 되면서 종이에다가 조잘대는 내가 웃기고 귀엽기도 하다.


나중에 여행지에서 쓴 일기를 보면 그때가 더 생생히 기억난다. 그럼 난 지금 그곳에 없어도 그곳에 갈 수 있다. 그러곤 오늘은 어떤 여행 같은 순간을 보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 일상도 좀 더 재밌어진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브런치에 공유하는 건 좀 더 자주 들쳐보며 회상하기 위함이다.

독자에게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한 목적성 있는 글이 아니라 두서없고 알맹이도 없을 수 있다.

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나 생각에 공감하면 좋겠고, 공감 아닌 다른 생각이어도 좋겠고, 어디든 여행 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도 좋겠다. 그저 난 내가 끄적인 글들이 일기장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처음 떠난 혼자 여행은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여행은 내게 도피가 아닌 충전이다. 내 삶의 99.9%를 구성하는 일상을 향유하기 위한 충전 말이다.



아래 글은 2022년 1월에 브런치에 저장해 놨던 글인데,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때 이미 해둔 게 신기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전히 일상을 아끼는구나 싶다.





2022.01.02

새해가 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이 일이 작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다. 아무튼, 작년은 나에게 많은 일들을 겪느라 힘든 한 해였다. 속한 집단에서 꽤 책임 무거운 역할을 맡아 보고, 원하던 곳에서 인턴으로 일해 보기도 하고, 16년 간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것. 그리고 외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것. 힘들고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던 만큼 기쁜 일도 꽤 있었던 덕분에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마치 숨을 헐떡이며 경주를 끝낸 뒤 성취감을 느끼고, 그 성취감으로 다음 경주를 준비할 힘을 얻듯이 말이다. 근데 올해는 그 경주가 한두 번이 아니라 네다섯 번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경주 하나를 마치면 다음 경주를 준비할 틈도 없이 바로 투입된 것처럼 끊임없이 달린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달리다 보니 10월쯤에는 번아웃이 세게 찾아왔다. 번아웃은 매년 겪었다 보니 (특히 매 학기 종강할 때쯤) 이젠 이걸 어떻게 넘겨야 할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었다. 혼자 여행도 가보고, 정처없이 2-3시간을 그저 걷고, 친구들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며 이 번아웃에서 벗어나고자 격렬하게 노력했다. 그래도 고갈된 마음과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엔 10월부터 12월 초까지 내가 가장 에너지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로 방에 콕 박혀 넷플릭스를 주구장창 봤다. 눈 뜨면 하는 일이라곤 넷플릭스 시청이었다. 나중에는 뭘 보든 감흥이 없었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는 위기의식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뭔가에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날엔 넷플릭스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머리 한쪽에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끼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렇게 나를 못 괴롭혀 안달일까.'



그러다 시간이 흐르니 기분이 나아졌다. 별일 없는 현재나 막연한 미래가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일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스스로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응원하고 싶어졌다. 정말 뻔한 말이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뭘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땐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믿고 그저 그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내가 바로 앞에 두었던 목표를 모두 달성해서 그다음의 목표가 보이지 않아 헤맬 땐, 그저 일상을 즐기면 되는 거다. 돌이켜보면 가장 인상 깊은 하루는 가장 일상적인 하루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2년은 기대되는 한 해다. 올해는 0.1%의 낯선 순간만 기대하지 않고, 99.9%의 일상에도 관심을 주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힘들 땐 내가 다시 일어날 힘을 충전할 수 있도록 그저 기다려주면 된다는 걸 이젠 안다. 머리 깨질 정도로 넷플릭스 보면서 기다려도 괜찮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주자. 앞으로 인생의 99.9%나 이루는 일상에서도 더 많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p.s. 오늘은 눈이 펑펑 온 날! 이 글 쓰며 들었던 노래는 Sam Ock - Snowy(2020) 미니앨범 https://www.youtube.com/watch?v=2gJ-RhJ6RfY

Snowy (2020) (Full Mini-Album), Sam 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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