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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Jan 07. 2021

소통의 조건

그들이 가진 진정한 초능력은 '소통'

최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tvN에서 최근 종영한 ‘구미호뎐’에서는구미호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동욱이 곧 개연성’이라는 말을 남기며 이동욱의 이국적인 외모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KBS에서는 좀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탐정’이 방영되기도 했다.


사실 드라마에서 사람이 아닌 존재가 등장해 한류를 이끈 지는 꽤 되었다. 2014년을 휩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이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2016년에는 도깨비가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해 많은 나라에까지 한국 문화를 전했다. 같은 해에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전지현이 인어로 나오며 독특한 색깔을 입은 인어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이렇게 드라마에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등장할 때 그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안고 있다. 외모가 아름답고,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으며, 인간과 언어가 통한다.


첫번째, 두번째 항목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 가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다. 당연히 말이 통해야 드라마가 진행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생각보다 소통의 조건은 까다롭다.

최근 서점가를 뜨겁게 달군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다 보면 ‘소통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은 (보기 드물게 한국 작가가 쓴) SF 단편 모음집이다.


그중 한 단편인 ‘스펙트럼’에서는 주인공이 외계 행성에 불시착하고,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촉망받는 연구원이자 학자인 주인공은 외계 생명체 무리 곁에 머무르며 그들을 관찰한다. 아래 글은 그 관찰 내용 중에 하나이다.


“무리인들과의 고차원적인 소통은 실패했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무리인들은 분명히 고도로 발달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희진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음성 언어는 인간의 가청주파수 범위를 벗어나는 듯했다.”


즉, 상대의 소리가 내가 듣는 소리의 가청주파수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것을 생각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대다수의 동물들(돌고래를 제외하고)은 인간의 가청주파수 내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또한, 상호간에 동의된 같은 기호 체계를 지니고 있어야한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나무’라는 임의적 발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를 가리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내가 ‘갹갹’이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상호간에 동의된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단편 ‘스펙트럼’에서는 주인공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기록 체계’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희진은 오랫동안 외계인들의 문자를 찾으려 하지만 쉽사리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의 기록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희진은 그림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들. 잎종이를 가득 채우는 색과 비정형의 얼룩들. 그동안은 단지 그들의 미술이 독특하게 발달했다고만 생각했었다. (중략) 만약 이 그림들이 무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면. 그들이 형태가 아닌 색상의 차이를 의미 단위로 받아들인다면. 루이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면.”


여기까지 읽은 많은 애견인들과 애묘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 애도 가끔 나한테 말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언어학 개론서를 펼쳐보면, 제일 첫 장에 등장하는 주제도 이것이다. 꿀벌은 춤으로 동료 꿀벌에게 꽃밭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한다. 새소리도 가만히 들어보면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와 적을 경계할 때 내는 소리가 다르다. 그렇다면, 동물이 내는 소리와 인간의 언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장 큰 차이는 어휘의 개수이겠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차이는 이 다양한 어휘를 조합해서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낼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강아지가 배가 고플 때와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독립적인 소리와 의미를 가진 기호들을 조합하고 배열해서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생산해낼 수는 없다. 이 점 때문에 자연어처리(NLP)가 까다로워질 수 밖에 없다.


낑낑 두 번 길게 내는 소리가 배고프다는 뜻이라면 어떠한 상황이 와도 낑낑 두 번 길게 소리가 나면 배고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건 0.1초 만에 코딩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많은 단어들로 조합되어 있고 이 조합에 따라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니, 조금 더 복잡한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투리도 심하면 못 알아듣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외계인이나 도깨비가, 하필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만 쓰이는 한국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진정한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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