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아이

밥이 문제다

by 오이향

골목이 살아있었다. 이젠 마치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희귀한 말이 되었지만. 그땐 골목이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살리기도 했다.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전해 들은 바로는 그렇다. 말이 늦되는 아이라 했다. 당시 골목은 동네 커가는 아이들의 육아 정보를 공유했다. 어머니의 종용으로 나는 큰맘 먹고 골목 가게에 뭔가를 사러 갔었는데, 내가 말을 했다고, 다시 말해 '입을 뗐다'라고 동네가 시끄러웠다 한다. 골목이 함께 나를 키웠다.


말 없는 아이가 덩치는 컸다. 4살 터울의 언니는 나를 안고 내 돌사진을 찍으려다 압사직전인 채로 사진에 남았다. 한 번은 집 앞 개울가로 동생을 업고 나가 흐르는 물을 보여 주려다 개울에 빠뜨리기도 했다. 언니로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덩치였다는 말이다. 역시 동네 어느 아저씨가 뛰어들어 아이를 건졌고 별 탈 없이 성장했다. 골목이 나를 살렸다.


말 없는 아이는 감흥도 별로 없었다. 두 발에 힘이 오르면서 자력으로 동네 어귀에 나갔었나 보다. 누군가 나를 안아 올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사연이 있겠거니 했던 것 같다. 그 나이면 으레 소리 내어 울기 마련인데 겁이 없는 건지 반응이 느린 건지 어쨌든 나를 안아 올린 이유가 뭔지 궁금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그 처음 보는 아저씨는 나를 안고 동네 육아정보를 꿰뚫고 있는 가게에 들어 선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가게 아줌마는 나를 보자마자, "○○야, 너 지금 누구 따라가는 거냐?"라며 이 아이랑 어떻게 되냐고 낯선 이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나를 내려두고 곧장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다. 골목이 나의 실종을 막았다.


만약 그날 그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궁금하다. 그 시절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제 자리를 찾은 나는 여전히 필요치 않은 말은 하지 않는 과묵한 아이로 성장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첫 쉬는 시간 운동장으로 밀려 나와 철봉 밑에 서 있던 아이를 기억한다. 멀리 뛰고 구르고 몰려다니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가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내 눈에는 필요하지 않은 말과 리액션들로 넘쳐났다.

'어쩌지? 나도 저렇게 놀아야 되나? 저 아이들이랑?' 뭐 이런 막막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거치면서 나는 사회화되어야만 했다. 이리 과묵한 성격으로는 살기 팍팍한 세상이었다.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기회가 좋았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전략적으로 말을 좀 하기 시작했다. 크게 웃고 떠들고 어울리기로 작정했다. 친구들과 섞여 있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이 적고 혼자가 편한 아이였다.


성장과정에서 나도 살기 위해 스스로 어렵게 노력한 끝에 적당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사교성을 장착했다. 표정은 다소 없고 리액션이 그리 크진 않지만 나름 표정 없이 하는 엉뚱한 발언에 꽂혀 내 유머를 좋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매우 조직 적합형으로 성공적인 재탄생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의 어린 MZ동료들은 직장선배(단순 선배는 아니다. 직위가 있으니)와 일상의 평범한 점심도 함께 먹기 부담스럽다 한다. 설문조사 결과다. 어떻게 만든 조직 적합형 인간인데, 나도 혼자가 편한 인간이었다. 일은 같이 해도 나머지는 뭐든 자유롭고 싶다니 어쩐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최근 우리 조직의 이슈간부 모시기다. 간부 모시기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일정 경비를 부담하면서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갖는 간부와의 모임을 말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런 관행이 아직 남아있는지 물은 설문에서 생각지 못한 반응들이 나왔다. 갹출로 먹는 점심식사도 간부와 먹으면 개인 시간의 희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까지도 누군가에게 무상으로 투입하기 싫다는 뜻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부의 의견일 수도 있다. 다만 끊임없이 제기되는 잡음들이라면 어쩌면 시대의 흐름이 아닐까?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사실 억울하다. 그렇게 고위 간부도 아니고 세월이 지나 자연스레 얻은 중간 간부 정도 자리인데 밥 먹을때는 도매금으로 넘어가다니...

그리하여 3월부터 '직원들 가는 식당에 가서 그냥 옆자리에 앉아 먹겠다'는 나를 강력히 뜯어말린 팀장들과 따로 점심을 먹는다. 쓰고 보니 좀 서럽다. 나도 어려서는 골목이 키운 귀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인생의 새로운 골목으로 접어든 것 같다.


그래도 다들 입맛 떨어지는 봄날이라지만 여전히 나는 입맛이라도 좋은 것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