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대초원에서 받은 위로

지침과 감사, 소중한 여행의 감정들

by nomadhaus

날씨는 맑고 쌀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다. 가볍게 성 주변을 돌아 미술관 전시를 보고 돌아왔다. 18세기 ~ 19세기 프라하를 기반으로 활동한 작가들과 피카소, 폴 세잔, 클림트, 에곤 쉴레 등 시대를 대표하는 대가들을 비교하며 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작품들을 관람했다.

대가의 작품을 10cm 이내 거리에서 본다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감도 안 온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붓의 흐름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숙소로 돌아오니 온 집안에 냉기가 돈다. 보일러가 고장 난 것 같다. 이런 작은 변수에도 마음이 급속도로 힘들어진다. 편안한 집과 정든 사람들을 떠나 직업도 내려놓고 온전히 우리에게 집중하기 위해 여행을 왔는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쉽게 무너지는 자신을 목격하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질 못했다. 여행에서 오는 불편한 상황들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이 유연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지수는 침착하게 유튜브 검색을 통해 해결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관리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했고 나는 언제 올지 모를 관리인을 기다리며 추운 밤을 보낼 수 없었다. 결국 독단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다가 다투고 말았다.

결과적으론 문제는 해결됐지만 몇 차례 감정싸움이 오고 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깨는 마지막 라운드, "나 보일러병이었잖아!" 이렇게 까지 말해야 하나 싶어 아껴왔던 출신을 어필했다. 빵 터졌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허무하게 풀린다. 지수는 나를 나름 전문가로 인정하며 극적으로 화해했다.


하루는 알람도 끈 채 길게 잤다. 평소 여행지에서도 새벽 6시에 일어나던 스스로에 대한 긴장감을 조금 풀었다. 느긋한 아침을 보내고 오후에는 트램을 타고 북쪽 종착지로 향했다.

밀집된 도시를 빠져나와 한적한 교외지역으로 오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종점에는 작은 놀이동산이 시즌 준비에 한창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보기 드문 시설을 여기에서 보니 엄청 반갑다. 청룡열차, 바이킹 등 필요한 건 다 갖췄다.

놀이동산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절벽이 서로 마주한 협곡이 나타났다. 예상할 수 없던 풍경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 아래에는 길게 뻗은 길이 평원과 숲을 지나 절벽으로 이어 올라 넓은 초원에 닿는다. 사람들은 넉넉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영역을 자리했다.

우리도 절벽 위 초원에 올라 가장자리 완만한 구릉지 풀밭에 앉았다. 맞은편에 보이는 이와 손짓으로 교감을 나눈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

낭떠러지를 향해 발을 뻗고 너머에 도시를 바라봤다. 저 멀리 프라하가 엄지손톱만큼 작게 보인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피로감이 쌓였나 보다. 한가로이 앉아 시선을 덜어내니 긴장이 스륵 풀리고 평온함이 다가왔다. 바람에 귀가 먹먹하고 풀이 나부낀다. 엉덩이 아래 차가웠던 잔디에 온기가 채워졌다. 쫓기듯 떠나오며 미처 다독이지 못한 감정들을 돌아봤다. 목적지를 여행할 때 기쁨보다 기차표, 숙소예약에도 실랑이를 벌이고 저녁 식사로 고기를 먹냐 마냐로 부대끼던 사소한 일상들이 떠오른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원래 여행은 즐겁지만은 않아, 지쳤을 땐 그냥 쉬어. 뒤돌아보면 모두 다 소중하게 다가올 거야'라고 위로하는 것 만 같다.


프라하의 마지막 날, 빈으로 떠나는 당일까지 예약한 숙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불확실함을 안고 떠나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감정이 요동친다. 악 소리도 지르고 싶고 욕도 하고 화도 내고 싶었지만 화를 낼 대상이 없다. 사실 불편함은 감수하면 그만이고 숙소도 새로 잡으면 그만인데 지금 일어나는 감정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앞두고 북쪽 대초원을 다시 떠올렸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한 마음과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설렘을 동시에 안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다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