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그랏츠 중간 기착지, 여행의 형태가 드러났다.
우리는 남쪽으로 간다. 프라하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여러 경로를 상의했다. 마음이 통했다. 하루라도 빨리 혹독한 동유럽의 추위를 벗어나자. 곧장 알프스를 넘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탈리아는 따뜻하겠지.
첫 번째 중간 기착지 빈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니 개미가 들끓는다.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이것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자. 관리인에게 연락해 조치를 받고 해프닝으로 넘겼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전시 관람에 집중해 몸과 마음에 쉼을 주기로 했다. 클림트를 포함한 요세프 호프만, 에곤 쉴레 등 1900년대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겐트스틸 예술집단의 전시를 찾았다. 당대 예술인들의 예술사조, 흐름을 따라 그들의 시선과 빛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나니 감정이 잔잔히 물결친다.
이전에 느꼈던 여행의 감정과는 또 다른 새로운 자극이다. 여행 온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몸도 마음도 지쳐 여행을 왜 왔을까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는데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 온 것 같다.
여행은 편하고 익숙한 감각에서 벗어나 조금 불편하고 낯선 환경에서 느껴지는 설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에 자신을 던지자 가라앉았던 감정이 차분히 일어나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을 느긋하게 걷는 기분이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반갑다.
빈에 머물며 앞으로 우리 여행에서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방향, 여행의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눈앞에 놓인 남쪽 나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기 위해 (1) 기차로만 내려갈 수 있는 필라흐 경유행과 (2) 버스, 기차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그랏츠 경유행, 두 경로를 두고 무엇을 선택할 것 인지 상의했다. 나는 버스의 분실 위험을 피하고 이동시간 변수를 줄일 수 있는 필라흐 경유를 주장했고 지수는 그랏츠를 보고 싶어 했다. 거리, 차편, 숙소, 여행지 정보, 일정 등 다양한 조건들을 모아 합리적 결정을 하기로 했고 모든 정보들은 그랏츠를 가리켰다.
다음은 프랑스 여행의 큰 흐름을 잡았다. 처음 계획은 남쪽 니스에서 시작해서 북쪽 파리로 거슬러 올라 프랑스를 종단한 다음 아일랜드로 넘어가는 여행. 두 번째 대안은 온전히 프랑스 남부에 집중해서 니스로 원점회귀 후 아일랜드로 넘어가는 여행. 이 두 경로를 놓고 의견을 나눈 결과,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4년을 머물렀던 곳, 우리가 정말 가보고 싶었던 아를에 오랫동안 머물기 위해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기로 했다. 물론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도 있겠지만 조금 적게 보더라도 천천히 오래오래 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이미 그동안의 여행에서 절실히 느꼈다.
여행의 커다란 방향을 결정하고 나니 렌터카, 더블린행 항공권 같은 굵직한 교통편들을 확정 짓는 건 순식간이다. 이렇게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에서 우리 여행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기차역 플랫폼에 올라 그랏츠행 기차를 기다렸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계속 말을 건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열차가 그랏츠행 기차라고 알려드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차에 올라타니 내 예약석에 할머니가 앉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양보하고 앞 좌석에 앉아 서로 마주 보며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표원이 왔고 그들의 대화에서 할머니가 우크라이나 피난민이란 걸 알게 됐다. 할머니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수는 휴지를 건네며 유감을 표현했다. 다른 가족들은 어디 있을까. 그랏츠에는 의지할 곳이 있을까. 식사는 하셨을까. 마음이 쓰였지만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달랠 방법을 몰라 말을 아꼈다. 언어의 장벽으로 닿을 수 없던 위로의 마음을 가슴에 손을 얹고 씁쓸한 미소를 담아 고개 숙여 전했다.
그랏츠는 빈 다음으로 큰 도시지만 생각보다 아담했다. 한편으론 프라하를 축소한듯한 친숙함을 지녔다. 시계탑, 성과 언덕 주변을 돌며 그랏츠의 인상을 스케치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모여있는 로컬 펍을 직감적으로 찍었다. 메뉴판 따윈 없다. 오직 맥주만 판다. 배가 고파 식사가 될만한 음식이 간절했던 우리에게 주인장은 친절히도 굴라쉬를 만들어줬다. 펍을 중심으로 가꿔진 동네는 이런 점이 매력이다.
감칠맛이 좋은 걸쭉한 국물과 감자, 돼지고기가 푸짐한 굴라쉬를 사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알프스를 넘어 동유럽을 벗어나니 더 이상 어디에서도 굴라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레토르트 굴라쉬 많이 사 놀걸...
그랏츠의 짧은 밤을 보낸 뒤 이른 아침에 일찍 서둘러 나와 베네치아행 환승역인 클라겐푸르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막상 타보면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버스여행을 피했을까. 창 밖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이 새삼 여행 온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우크라이나 할머니는 무사히 거처를 찾아갔을까? 문득 기차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안부가 생각났다. 더 잘해드릴걸. 길 안내라도 해 드릴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당연히도 떠난 인연을 되돌릴 순 없다. 이미 지나간 아쉬움을 뒤로하고 눈앞에 놓인 여정에 충실하자. 우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베네치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