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감정을 터트리고 다시 시작하는 여행
베네치아를 떠나 피렌체로 간다. 피렌체는 내가 좋아하는 와인 끼안띠를 생산하는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했다.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는 도시기도 하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작은 다툼이 있었다. 나는 피렌체에서 멀리 떨어진 와이너리 팜스테이를 가고 싶었고 지수는 와인농장은 체험으로 축소하고 피렌체 여행에 안배를 두자고 했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퉁명스러운 대답들만 오고 갔다. 결국 서로의 감정만 어그러져 다툼으로 이어졌다.
긴 다툼 끝에 피렌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올리브 농장 팜스테이에 머무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아 잔여감을 적당히 봉합했다.
도착하자마자 난관에 휩싸였다. 지역 버스회사가 몇 개월 전 파업했다. 새로운 버스회사의 배차정보는 구글의 교통정보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체 버스를 찾을 방법이 없다. 심지어 상주직원도 없고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남 일처럼 모른 채 한다.
버스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다녔지만 좁은 도로와 협소한 거리는 너무나 혼잡해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 힘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화만 쌓여갔다. 일단 택시를 타고 가자. 대중교통은 숙소를 중심으로 천천히 알아가기로 했다.
올리브나무 숲이 있는 한적한 농장 안 작은집으로 안내받았다. 오랜만에 풀 키친을 갖춘 숙소다. 한정된 재료로 최대한의 집밥 맛을 끌어내는 토마토 된장국과 밥으로 식사를 했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끝까지 힘이 돼준 마법의 요리...
피렌체로 이동하는 다양한 루트를 시도했다. 숙소 아래 작은 마을로 내려와 버스정류장을 찾아다니며 부족한 정보를 채워갔다. 이곳의 교통과 친해지려 노력했지만 피렌체로 나가는 버스를 탔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전에 탔던 버스와 같은 노선의 하행선을 탔음에도 버스 안에는 티켓 펀칭기가 없고 기사는 불친절하게 응대한다. 영문도 모른 채 버스에 실려가고 있을 때 단속원들이 우르르 타더니 우릴 둘러쌌다. 버스 티켓이 유효하지 않아 벌금을 부과하겠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부정승차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너희 도시가 관광객들에게 정보제공이 너무 부족하다고 항변했지만 그들은 앱을 받아 쓰란 말만 한다. 벌금 부과가 본인들 일이라며 무한 도돌이표 대화가 반복됐다.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이런 곳에서 길게 에너지를 쓰기 싫었다. 어쩔 수 없이 거금 130유로를 지불하고 버스를 타야만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도시가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동안 쌓여왔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무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 말없이 한참을 걷기만 했다.
어딘지 모를 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 힘들었던 일들을 털어놨다. 돌이켜보니 이 모든 상황들이 나 혼자만의 여행처럼 만든 내 책임이 컸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여행인데 잦은 이동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숙소까지 말없이 돌아왔다. 혼자 밖으로 나와 올리브나무 숲을 걸으며 지금까지의 여정을 생각했다. 느린 여행을 하는 중이라는 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지수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 즐거움밖에 몰랐다. 다시 돌아가 사과를 해야겠다. 지수의 눈은 글썽였고 나는 말을 골랐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미안해’ 고개를 숙이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을 꺼내드는 사이, 지수의 손이 먼저 눈앞에 보였다. 화해에 꾸밈말은 필요 없었다. 두 손을 잡고 포옹을 나누며 함께하는 여행을 이어가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을 끼안띠와 함께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싸고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을까.
느리게 하루를 시작한 날, 바나나와 사과 그리고 물을 챙겨 나와 시골길을 걸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올리브 농장 숲길을 빠져나오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사이프러스가 토스카나의 프레임을 완성한다. 피렌체의 상처를 보살피면서 천천히 길을 걸었다.
언제쯤이었을까 차창 밖 오르내리는 언덕 위 넓은 초원과 숲 사이에 외딴집이 있는 풍경을 보곤 당장이라도 내려 그곳으로 가고 싶던 적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기대하던 풍경 속을 걷고 있다. 분홍빛 벚꽃이 봄의 첫 소식을 알렸다. 차례로 나무와 들풀들이 움을 틔우고 그 사이로 길게 뻗은 오솔길을 따라나섰다. 산 가장자리를 벗어나니 넓은 들판이 반겨준다. 더없을 선물 같은 풍경이 연속해서 펼쳐졌다. 여유로운 시간, 어제의 악몽이 깨끗이 잊힌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올리브 숲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반짝이는 잎 아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람은 여전히 조금 차고 햇살은 따갑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씻어내고 느긋한 오후를 즐겼다.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 농장에서 운영하는 투스칸 전통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저 멀리 피렌체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역시나 시작은 끼안띠 한 병과 호박요리. 부드럽고 진한 호박 수프로 뱃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풍부한 과일향과 경쾌한 산미의 와인으로 입맛을 돋운다. 깊고 진한 향을 간직한 트러플을 아끼지 않은 파스타에 이어 메인 디너로 투스칸 스타일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를 주문했다. 특이한 점은 별다른 소스 없이 직접 생산한 올리브 오일 한 병을 함께 서빙해 줬는데 지금껏 먹어본 적 없는 상식밖에 올리브 오일을 경험했다.
깊고 진한 올리브 향과 약간의 매운맛 그리고 쫀득한 식감이 스테이크의 풍미를 더욱 증폭시켜 입안에 넘치고 풍족한 경험을 선사했다.
피렌체의 망가졌던 모든 일들을 모조리 보상받고도 남을 정도로 잊지 못할 하루를 보냈다. 토스카나를 떠나기 전 좋은 추억을 남겨 다행이다. 언젠가 오늘을 다시 떠올린다면 증오는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남을 것이고 애정은 더욱 커다랗게 기억할 거라 확신한다. 애증의 토스카나는 증오도 결국에는 애정을 밑거름으로 자라난 감정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