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소중한 경험과 방향성을 찾는 시간
제노아로 향했다. 밀라노를 지나 제노아로 가는 기차 안, 맞은편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상냥한 미소를 보냈다. 사연 가득한 느낌의 수심에 잠긴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도착 후 그녀와 가벼운 손짓으로 안녕을 던지고 헤어졌다.
바질페스토의 탄생지인 제노아는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같은 도시다. 산과 맞닿은 항구도시 특유의 조밀한 밀도와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억척스러운 도시의 느낌. 그것들이 모여 특이점을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묘한 조화로움이 특히 그랬다. 중심도로를 기준으로 산 쪽은 부촌이고 바다 쪽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무서운 사람들이 곳곳에 보여 위험해 보인다. 이 점은 부산과는 조금 다르다.
제노아의 첫날, 푹 자고 난 뒤 피렌체 숙소지기의 추천으로 존재 자체도 몰랐고 계획에도 없던 친퀘테레(Cinque Terre)로 간다.
다섯 개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친퀘테레는 제노아에서 동쪽 해안선을 따라 기차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만과 반도가 반복하는 해안절벽에 자리한 다섯 개의 마을과 언덕, 해변 전부를 통틀어서 친퀘테레 국립공원으로 묶여있고 199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많은 전 세계 트래커들이 이 땅을 걷기 위해 모여드는 트래킹의 성지와 같은 곳이지만 현실적으로 전부 다 둘러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루 온전히 한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네 번째 마을인 마나롤라로 향했다. 제노아에서 직행은 없고 세스트리 레반테(Sestri levante) 역에서 친퀘테레행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지도에서 환승역을 유심히 살펴보니 좁고 기다란 반도에 마을이 종방향으로 길게 자리하고 양 옆으로 해변이 발달한 지형이 흥미로웠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마을 중심부를 가로질러 반도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건물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앞에 놓인 풍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우와' 탄성을 내질렀다. 작은 만 주변을 해안절벽과 거대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렀고 그 사이사이에 고급주택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티 없이 맑은 바닷물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해변가에는 수많은 가족들이 볕을 쬐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잠시 이곳 분위기와 어울려 꽤 괜찮은 점심을 가졌다. 랍스터 살을 곁들인 스파게티와 지중해식 생선찜요리를 화이트 와인 한 병과 함께 즐겼다. 디저트는 야생 딸기 셔벗과 시트러스 머스터드를 얹은 비스킷 밀푀유를 주문했다. 마무리는 에스프레소.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면 이토록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지수에게 말했다.
"경험하지 않으면 평생 몰라"
여행은 양자역학 같다. 관찰하기 전까진 결과를 알 수 없다. 무수한 갈림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선택하기 전까지는 평생 알 수 없다. 어쩌면 삶 자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마나롤라에 도착한 우리는 절벽 사이사이에 자리한 형형색색의 집들이 모인 마을의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어업과 절벽 경사지 계단식 농업을 주 생업으로 이어온 삶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자연지형, 집, 사람 사는 모습들 모든 것이 다 조화롭다. 떠나기 전 바닷가에 앉아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와 번지는 노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했다.
제노아의 숙소는 다른 곳들과는 조금 달랐다. 호스텔과 호텔을 함께 운영해서 두 공간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객실은 생각보다 넓고 편안했고 부대시설로 공용주방, 공용공간, 휴게 오락시설을 갖췄다. 그중에서 특히 공용주방이 인상적이었는데 직접 재배하는 바질, 로즈메리 등 다양한 향신료 텃밭이 잘 관리되어 있고 레몬나무에서 직접 레몬을 따다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 외 기본적인 야채, 여러 종류의 파스타와 쌀을 제공한다. 매일 다양한 테마의 파티가 열려 근처 대학의 친구들이 밤마다 이곳에 모였다. 제노아의 파티문화를 여기에서 주도하는 것만 같다.
국적과 성별을 넘어 모든 세대와 가족 등 다양한 유형의 여행객들이 자연스럽게 이 공간을 존중하고 적정선을 유지한다. 모든 이들이 함께 이 문화를 가꿔가는 점이 흥미로웠다.
로비로 내려와 맥주를 주문할 때 뜻밖에 인연을 만났다. 기차에서 만났던 중년 여성도 같은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우연찮은 만남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말주변이 썩 좋지 않아 긴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어색한 머뭇거림으로 반가움을 대신하고 헤어졌다.
공용주방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세 번째 만남이 반가웠는지 우리에게 쪽지로 짧은 인사말과 이메일 연락처를 남겼다. 우리도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에 소중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녀를 찾아가 맥주 한잔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짧은 영어로 많은 대화를 이어갔다. 스위스에서 온 그녀는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아 여행하는 중이다.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여기까지 왔다. 여성인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왔던 그녀는 이혼 후 남편의 성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되찾았다. 그래서일까, 결혼을 했는데도 서로 다른 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이름을 듣자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그녀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면서 고래를 보는 것이 꿈이었다.
“고래를 볼 수 있는 바다는 많을 텐데, 그중에서 제노아에 온 이유는 뭐예요?”
그녀의 고향 스위스 취리히에 작은 마을 애드리스빌(Adliswil)에는 아직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제노아는 기차로 4시간이면 언제든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공감했다. 꼭 원하는 집을 찾아 정착하고 고래를 봤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고래 그림과 함께 우리의 연락처를 전달하고 헤어졌다. 그녀와 나눈 이야기 때문일까, 잔잔한 슬픔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 걸까. 이 여행의 끝엔 무엇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남긴 진한 여운은 다시 한번 이 여행에 물음을 던졌다.
온전한 마지막 하루, 이 시간을 명소들을 둘러볼 수도 있지만 느리고 여유 있는 아침을 시작했다. 밀려있는 빨래를 세탁할 겸 오랜만에 빨래방 가는 길을 여행한다.
가파른 산경사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좁고 굽이치는 길과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밀집한 집들 사이 모퉁이를 돌아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선이 옮겨졌고 그 시선을 따라 도시의 입체적 풍경이 연속해서 들어왔다. 골목 사이사이 틈새에 주민들만 알 수 있는 지름길이 숨어있다. 하루 이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조금 더 깊숙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주어진 시간에 아쉬움이 크지만 앞으로 여정이 많이 남았다. 아쉬움은 먼 미래에 즐거움으로 남겨두자.
잘 마른빨래를 걷어 가방에 담아 다시 길을 나섰다.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찾아 언덕을 내려가며 마지막 제노아의 시간을 담았다.
여행의 중반, 남쪽나라 기차여행이 끝났다. 베를린을 시작으로 프라하를 거쳐 이곳에 오기까지 움츠러들었던 감정, 평화로웠던 시간들,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 어떤 여행을 하고 있고 어디로 향해 가는 걸까. 그저 아름다운 여행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삶의 방향을 찾고 싶었던 걸까.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걸까. 매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대답하기는 너무 어렵다. 분명한 건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며 여기까지 왔고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아있다. 제노아의 짧은 인연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
'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반드시 즉답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앞에 주어진 길이다. 한 호흡 가다듬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새로이 다가올 여행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