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는 고요해지고 모든 감정은 노을 너머로 사라졌다.
여행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 문화, 예술, 음식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잘 짜여진 여행코스를 핸드폰만 열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정제된 정보에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더 날 것의 여행을 원했다. 지도를 열어 이리저리 손가락을 굴리다 보니 진흙 점토가 뭉개진 듯 구불거리는 산맥이 재밌어 보인다.
'여긴 뭐하는 곳 일까', 어떤 것이 나타날지 예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 따르기로 하자.
생까냣에서 반돌로 가는 길, 셍뜨뽐므자연공원에 들어왔다. 길은 오직 하나, 우리의 주변엔 오로지 산 밖에 없다. 점심은 멕시칸 음식점에서 해결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식당. 다들 어디에 있었던 걸까, 하나둘씩 사람들이 들어왔다. 걸쭉한 목소리의 주인아주머니가 호탕한 웃음과 농담으로 가게를 지배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랐다. 맞은편에서 차가 내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돌릴 곳도 피할 곳도 없다. 어느새 숲을 벗어나 나무들이 내 키만큼 낮아졌다. 잠시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먼 길을 떠나 여기까지 왔구나, 새삼 실감이 난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거대한 산맥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산 아래 드넓은 들판에는 거센 바람에 살아남은 키 작은 숲이 산을 떠받친다. "믿기지 않는 풍경이야"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잠시 마을을 걸었다. 낡은 교회 하나, 문 닫은 식당 하나, 주택 몇 개가 고작 전부인 마을, 혹자는 여기에 뭐 볼 게 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원하는 목적이 뚜렷한 여행이라면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계획과 성취에 길들여져 있으니까. 이 익숙함을 벗겨내는 중이다. 중요한 건 순수한 호기심과 과정이다.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여행은 보다 더 풍요로워진다.
산아래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 히부(Rivoux)에서 바람을 피해 잠시 머무르며 우리가 여행하는 방식에 대해 확신을 갖고 내려왔다.
자연공원을 넘고 몇 개의 마을을 지나 크고 작은 별장들이 숲 사이사이에 모여있는 조용한 도시, 남부 프랑스의 휴양지인 반돌에 왔다. 숙소는 도시 외곽 작고 예쁜 노천탕이 있는 마을, 이곳에 며칠간 머무르며 다음 여행지를 찾는 시간을 가졌다.
모진 바닷바람이 시종일관 거칠게 불어닥쳤다. 높은 파도가 해변을 향해 쉴 새 없이 몰려와 바다를 따라 걷기 쉽지 않았다.
근처 지중해 음식점으로 대피했다. 예약 외 손님이 나타나 당황한 듯하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자리를 안내해준다. 운이 좋았다. 종업원은 수준 높은 매너를 갖추고 메뉴 안내와 함께 오늘의 식재료가 진열된 쇼케이스를 보여줬다. 지중해 앞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대구, 도미, 황열기 익숙한 생선들이 보인다. 그중 광어와 아귀가 섞인 듯 험상궂은 생선을 추천받았다. 이름은 존도리.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다. 마셰코에서 나온 달고기 요리가 문득 떠올랐다. 찾아보니 존도리의 국명이 달고기다. 정말 궁금했던 식재료였는데 뜻밖에 장소에서 먹게 될 줄이야. 설렜다. 두 가지 조리법을 설명받았다. 그릴구이와 버터에 졸인 지중해식 조리.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전식은 지중해식 홍합요리와 붉은 오징어 튀김. 오랜만에 먹는 개운한 국물과 익숙한 맛이다. 화이트 와인은 기본적으로 늘 함께했다. 곧 메인 요리가 나왔고 종업원은 존도리의 뼈를 능숙히 발라낸다. 가장자리 뼈마디에 붙은 작은 살까지 세심히 골라내 줘서 고마웠다. 탱글한 질감에 흰 살 생선의 담백함과 버터와 올리브의 풍미가 입 안에 가득했다. 마무리는 레몬 소르벳. 새콤한 얼음 알갱이들로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다.
계산을 하니 뒤에 진열된 술 중에 아무거나 한 잔 고르라고 한다. 서비스라고. 술을 서비스로 받기는 처음이다. 두 번 설렜다. 고민할 틈도 없이 라가불린 16yrs을 선택. 우리 때문에 직원 두 명이 카운터에 묶여있는 것 같아서 잽싸게 털어 넣었다. '아니 이걸? 이렇게 빨리?'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쿨하게 웃으면서 퇴장했다. 술쟁이로 생각하진 않겠지.
기분 좋게 술에 취해 마을 안 작은 해변가에서 바람을 등지고 앉았다. 바닷가에는 예쁜 돌멩이들이 많다. 밤이 되자 바람이 멎었다. 마을 밖을 벗어나 길게 뻗은 해변을 따라 중심가를 향해 걸어갔다.
거센 바람에 흩날린 구름들이 고스란히 하늘을 그렸고 드셌던 파도는 고요해졌다.
비바람에 시달리던 여행에 대한 보상인 걸까. 모든 것이 풍요롭다.
지는 해를 뒤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좋았던 기억들과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뒤돌아보니 모두 다 희극이다.
"앞으로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거야, 여행은 원래 그런 거 같아", "분명 뒤돌아 보면 다 좋아 보일 걸?"
노을 너머로 모든 감정들이 함께 사라지고 평온함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