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작, 그라쎄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 그라쎄의 짙은 잔향

by nomadhaus

반돌을 떠나기 전 근처에 작은 마을 꺄시스에 들렀다. 꺄시스의 작은 해변 플라쥬 드 아이아흐네(Plage de I'Arene)는 높고 가파른 산과 숲 속에 둘러싸인 보석 같은 해변이다. 옷을 벗고 부유목을 등받이 삼아 바다를 향해 누웠다. 평화롭다. 어떠한 표현이나 감상도 필요 없었다. 지금 주어진 조용한 시간에 머물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짐을 챙기고 일어나 돌아섰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부부가 위풍당당한 자태로 햇볕을 쬐고 있다. '뭐야, 어떻게 해야 해. 괜찮은 거 맞아?' 순간 머릿속이 쌔-하얘졌다. 이미 눈이 마주친 이상 피할 순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 늘 있는 일인 것 마냥 표정을 정돈했다. 천천히 걸음을 따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고 그들의 매너는 끝까지 꼿꼿했다.

그들과 멀어지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졌다... 멋있다...'


근대 향수의 시작점, 그라쎄를 마지막 남부 프랑스 여행지로 정했다. 프로방스를 떠나 꼬뜨 다 쥐르 지방에 오니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다. 그라쎄는 채도가 낮은 흙집들이 산 능성이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제법 큰 규모의 아름다운 도시다. 2007년 영화 '향수'를 보면 도시의 느낌을 잘 알 수 있다.

그라쎄에는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이어온 전통 있는 두 향수 가게, 프라그나드와 몰리나드가 있다. 그중에 프라그나드는 가방, 의류, 굿즈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해 이곳 꼬뜨 다 쥐르 지방 전체에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두 가게를 번갈아 방문해 다양한 향수를 시향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 브랜드를 포함한 그라쎄 향수들은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해 원재료의 향을 최대한 살리는 브랜딩으로 보다 더 직관적인 향을 품고 있다.

또 하나의 이 도시에 자랑, 7대가 가업을 이어온 모울린 오피오라는 올리브밀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린, 레드 올리브 등 다양한 품종의 올리브와 향신료들을 조합한 고품질의 식료품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올리브 밀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숙소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들의 첫 게스트였다. 고풍스러운 계단식 3단 별장에는 앞 뒤로 넓은 정원이 잘 가꿔져 있다. 2층에는 아담하고 예쁜 수영장이 있고 오래된 가구들은 집과 잘 어울렸다. 테이블 위에는 프라그나드 기념품과 모울린 오피오의 올리브로 우릴 환영했다. 배키와 미, 사랑스러운 두 고양이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볕을 쬐면 시간이 훌쩍 간다. 파스타를 만들어 정원에 나와 먹기도 했다. 마치 이곳에 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젊은 호스트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아침에는 아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을 한다. 남편은 집에서 일을 보고 오후 2시쯤 운동을 하러 나온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면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나간다. 매일같이 흐트러짐 없다.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어" 지수에게 말했다.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예쁜 집과 화목한 가족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넉넉한 마음 씀씀이까지. 그들의 여유와 행복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짙은 잔향으로 남았다. 이들을 보면서 취향이 묻어나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났다. 소모임을 할 수 있는 살롱과 손님방 하나, 그리고 작은 텃밭정원이 있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10년 안에 이룰 수 있을 거다. 긴 여행의 꿈을 이루고 우리만에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