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 몇 가지와 우울한 감정을 남겨두고 계속되는 여행
잠이 들기 전 지수에게 투정 부렸다. 한 곳에 가만히 머물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는 느린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짓궂은 날씨 탓에 도시숲 사이를 쫓기듯 다녀서 여행의 재미를 온전히 느끼지 못해 스트레스받는다고. 그리고 앞으로 떠날 다른 도시도 똑같을까 봐 걱정이 앞선다고.
내가 강하게 주장해서 떠나온 여행인데 먼저 힘든 마음을 토로해 창피했다. 사실 모든 원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나 자신,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더 창피하다.
정말 원하고 보고 느끼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의 좋은 환경, 좋은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만 같았다.
하루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TF팀으로 전 직장에 다시 복직하는 꿈을 꿨다. 도망치듯 나온 곳을 다시 들어가는 꿈을 꾸는 것을 보니 지금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다. 결국 나는 지금 일을 하는 것도 여행하는 것도 아닌 기분이 들었다.
베를린의 온전한 마지막 하루가 왔다. 추위 탓으로 돌리고 싶은 쓸쓸한 감정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내심 아쉽기도 하다. 여행을 와서 무조건적인 벅찬 감정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가라앉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마지막 하루는 다행히도 따뜻한 해가 떴다. 우리는 공원 한편 조용한 자리에 앉아 추운 공기, 차가운 소시지, 딱딱한 빵, 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모아 천천히 여행의 맛을 음미했다.
베를린을 떠나는 날 우리는 좋은 기억 몇 가지와 우울한 감정을 남겨두고 떠난다. 지수는 웃으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흔들렸지만 돌아가는 비행기는 앞으로도 두 달도 넘게 남았다. 좋든 싫든 계속해서 앞으로 가야만 하는 건 다행일지 불행일지 모르겠다.
이 여행은 어떤 의미로 남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정세도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도 그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으며 약간에 불확실성을 안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마라톤 같은 여행을 계속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