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텅스텐 불빛이 가득 찬 붉은 지붕의 도시
긴 낮잠을 잤다. 트램이 오고 가는 진동소리가 울려 퍼지고 커튼 틈 사이로 적당한 빛이 새 나온다. 깨어보니 오후 5시.
정신을 차리고 근처 와인펍으로 향했다. 1층 펍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게 안 지하로 내려갔다. 서로 다른 펍들이 개미굴 같이 좁은 통로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문으로 시작해 여러 공간들이 모여있는 재밌는 곳이다. 데낄라 몇 잔을 털어 넣고 적당히 오른 술기운을 압생트로 마무리했다. 오렌지색 텅스텐 불빛이 가득 찬 취한 밤거리로 나섰다. 기분 좋은 밤이다.
어느 해질 무렵 오후, 땅거미가 지기 전 처음으로 혼자 밖에 나왔다. 높게 성벽을 쌓아 올려 요새와 같은 교회, 비세라드(Vyserahd)에 올랐다.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프라하의 도시 풍경을 볼 수 있다.
하늘로부터 도시를 떠 받치는 붉은 지붕을 좋아한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프라하의 정체성은 붉은 지붕에서부터 나온 거라 확신한다.
도시가 잘 보이는 조용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해 저무는 프라하의 인상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느리고 조용한 시간, 이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시간이 가만히 느껴졌다. 어둑한 하늘 아래 가로등 불빛이 도시를 밝히고 지붕에는 밤이 드리웠다. 도시의 명암이 서서히 드러나자 아름다운 프라하의 밤이 그려진다.
빛과 색채만이 가득한 단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때가 있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네 편 내 편, 승과 패, 선과 악 이분법적 구도가 가득한 만화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표면적 아름다움 뒤에 있는 어두운 이면을 부정적 요소로 학습해 왔고 의식적으로 피했다.
어린 시절 모든 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적이 없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적 있다. 성실한 친구, 불량한 친구 가릴 것 없이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면만 보여줬다. 탈 없는 다자간의 관계를 추구하다 보니 집단이 나를 잠식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싫은 걸 싫다고, 힘든걸 힘들다고 말 못 하고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어 한 동안 자기혐오에 빠졌다.
미움받을 용기가 부족했다. 그만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받을 자격도 없었다. 적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상대가 내 맘과 같을 수 없고 각자의 이해관계 안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앞에는 거울을 메고 뒤에는 허물을 짊어지고 산다 했다. 상대를 통해 나를 보고 돌아서면 그 사람은 나의 허물을 본다. 중요한 건 상대에게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고 내 감정에 솔직하고 바른 태도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맹목적 미움을 받아 힘들었던 시절이 있다. P는 나를 통제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거짓된 사람으로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 P와는 여러 집단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업무적으로 강제적 관계였다. P는 자신의 일에는 방관하면서 오로지 나의 흠결만을 날조해 다른 이들에게 모함을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그런 말 할 친구 아닙니다", "그 일은 그렇게 판단한 게 맞습니다"라고 되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믿어줬다. 그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더 이상 적이 생기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생태하천을 공부하면서 생태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경쟁과 간섭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순환의 균형으로 이해했다. P의 지배욕구와 경쟁심리도 생태적 관점에선 지극히 원초적인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1년이 넘도록 지속된 괴롭힘 속에서도 더욱 견고히 버티고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공부의 힘이 컸다. 특히 두 가지 용어, 타감작용(Allelopathy)과 보상성장(Compensatory growth)은 많은 위로가 됐다.
식물 혹은 미생물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성질(나무위키 참조)을 뜻하는 타감작용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식물은 뿌리에서 다른 작물이 자라지 못하는 물질을 내뿜는데 이 식물이 자라면 한 해 농사가 망한다며 개망초라 부른다. 재밌는 건 같은 식물이 자기 중독에 걸려 자신마저 잘 못 자라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타인의 성장을 밟고 발아래 자양분 삼아 생존하는 경쟁사회의 원초적 원리를 타감작용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P는 찌든 담배와 절은 믹스커피 냄새를 타감물질로 내뿜으며 타인의 흠결을 날조하고 만취 폭언을 일삼다 자기 중독에 빠진 존재였다. 그제야 막혔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영양실조나 스트레스 등과 같은 외부요인에 의해 생물의 성장이 방해됐다가 그런 방해요인이 없어지고 나서 폭발적으로 다시 성장하는 보상성장(나무위키 참조)이란 희망적 개념이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에 적용되는데 이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P로 인한 고통을 밑거름 삼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권위자의 저서 서론에 얕은 정보만을 빌려 일시적 우위를 점하던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늘 1라운드를 얻어맞고 난 후 본론과 결론을 공부한 다음 논리로 제압했던 2라운드였다. 나의 반론에 허를 찔려 당황해 말을 더듬고 고압적 태도로 내 입을 막기 위해 애쓰던 P의 초라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봄비 내리는 숲 아래 야생화 군락은 커다란 나무가 울창해지기 전 부지런히 수수한 꽃들을 한가득 피운다. 하늘에 그늘이 드리우기 전 한껏 햇빛을 받아 꽃을 피우고 씨앗을 틔워 다음 세대를 퍼트리기 위한 그들만에 아름다운 생존전략이다. 소나무 아래 쌓인 솔잎을 뚫고 올라온 진달래는 가녀린 가지 끝에 흔들리는 분홍꽃을 피운다. 숲은 계절을 따라 차례로 잎이 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남긴다. 가지 사이로 찬바람이 일면 단풍을 물들여 낙엽을 쌓고 겨울을 난다. 그 이면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성장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생태계에는 입체적이고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들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입체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는 좀처럼 안 좋기가 더 어렵다. 약간에 신세를 지면서 서로를 간섭하며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상대의 단점이 보이고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상대와 나 사이에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상대의 말과 감정을 더 살피게 되고 내가 원하는 바를 더 잘 알게 된다. 마냥 좋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좋고 나쁨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비가 오고 바람 부는 추운 날씨가 여행하기 나쁜 날씨만은 아니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가로등 불빛으로 도시에 명암이 생긴다. 그 길을 사람이 지나칠 때 우리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빨간 지붕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도시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늦은 밤 으슥한 길을 걷는 커플은 그들만에 영화를 찍는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찬연히 뒤섞이며 이룬 조화의 순간에 연속이다.
돌아오는 길 중간에서 지수와 만났다. 프라하의 밤을 걸으며 오늘 보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여행을 선택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건 행운이고 복 받은 거라 생각한다고. 짓궂은 날씨로 지친 몸과 감정들 덕분에 보다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지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