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얼룩덜룩
책을 읽을 때면 아직 사지 않은 책을 읽듯이 조심스럽게 읽는다.
제값을 지불하고 내 소유가 되었지만 내 것이 아닌 양 한 장 한 장을 조심히 읽어나갔다.
힘주어 펼치면 구겨질세라 가볍게 책을 펼치고 흰 종이 위에 글씨 말고 다른 것이 남는 것을 가만히 볼 수 없었다.
어쩌다 작은 점하나 새겨지거나 모서리가 접혀 자국이 남을 때면 하루 종일 온신경이 쏠렸다.
오래된 나만의 버릇이었고 남들에게 이유를 말할 때면 단지 새 책의 느낌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오랜만에 여자친구와 시내에 나왔다.
집 밖을 나서기 전 요즘 즐겨 읽는 책 한 권을 들고 함께 카페로 향했다.
한편에 서점이 있고 여름에는 덩굴이 온 건물을 휘감아 여름 한가운데 놓인 것 같은 카페였다.
음료를 시키고 햇살이 잘 들어 따뜻한 창문가에 앉았다.
여자친구는 요즘 빠진 카페라테를 나는 예전부터 즐겨 마셨던 홍차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하던 중간 여자친구는 실수로 홍차를 엎었고 흘려진 홍차는 책 귀퉁이를 붉게 물들였다.
홍차에 젖은 책을 급히 말렸고 시간이 지나자 책 겉면에는 작고 은은한 분홍빛 얼룩이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 붉게 물든 책을 꺼내 읽을 때면 그날의 기억이 함께 붙어왔다.
예전이었으면 신경 쓰이는 얼룩일 뿐이었겠지만 얼룩은 분홍빛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단지 얼룩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얼룩에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의 끝에서 나에게 남겨진 얼룩을 찾아보았다.
무릎에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 넘어져 남은 흉이 있다.
그때는 쓰라린 상처에 펑펑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보니 큰 걱정 없이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추억이 앞섰다.
어렸을 때는 못다 한 숙제 같은 그런 것이 인생 최대 난제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온 세상 걱정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하는 그리움 같은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움을 뒤로하고 방구석에 놓인 회사에 들어가 처음 샀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사회인이 되었으니 큰맘 먹고 산 그 당시 나에게는 꽤 비쌌던 가방이었다.
몇 년을 주구장창 사용하다 보니 검은 때가 타고 가방 끈은 헐거워져 떨어질 것 같았다.
점점 해져가는 가방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떤 일에도 새로웠던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언제나 새책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태도였던 것 같다.
모든 것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는 처음과 같았으면 했다.
얼룩 한점 남지 않고 새하얀 배경에 검은 글씨만이 남겨진 책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켜켜이 뭍은 손때와 실수로 엎어버린 홍차 자국, 밑줄을 쫙 그은 나의 생각, 세월이 지나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가 알록달록 얼룩덜룩 자리를 만들어간 나의 책이 돌이켜보면 더 많은 나의 삶을 담고 있을 것이다.
알록달록한 얼룩만이 남으면 좋겠지만 삶은 마냥 알록달록하지만은 않기에 얼룩덜룩한 모습 또한 안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