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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영 May 10. 2021

봄에는 고사리 장마가 내린다.

 봄이면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들에 절로 자라는 나물들이 있다. 잡초만큼이나 생존력이 강해, 겨우내 얼어붙은 땅이 채 온기를 찾기도 전에 피어나는 이들. 이들은 겨울을 치르느라 지친 인간의 마음을 녹이는 재주가 있다. 굳센 뿌리를 곧게 내려 대지의 향을 가득 머금은 냉이가, 척박한 땅에서도 무리 지어 서로 의지하며 생존하는 쑥이, 수풀 사이로 천연덕스럽게 고개 든 고사리 등이 그렇다.

 사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들의 존재 가치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봄에 잠깐 장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냉이가 아니고서야, 이들이 봄철에 그리 귀한 줄도 몰랐다. 한 철이니 맛이나 볼까 싶어 해마다 한 번씩 냉이를 사다가 얼큰한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게 전부였다. 쑥은 다른 요리보다 떡에 넣어 맛을 낸 게 좋은데, 그거야 말로 계절과는 무관하게 언제고 먹을 수 있으니 가끔 생각날 때마다 사 먹으면 그만이었다. 장터에서 우연히 맛 본 고사리 장아찌는 판매하시는 농민 분의 기분에 따라 매대에 올라오는 터라 운이 좋아야 살 수 있었다. 




 내가 채취를 위해 땅을 살피기 시작한 건 봄이 온지도 몰랐던 어느 날, 냉이가 끝물이 되어갈 즈음부터였다. 음식 솜씨 좋은 구 동거인이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냉이 파스타를 보고 영상에서 식감과 향이 그대로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다. 그날부터 마트에 갈 때마다 냉이를 찾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단 한 곳에서도! 정말 이대로 끝인가.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밭으로 향했다. 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구 동거인과 함께. 우리는 땅에 고개를 박고 풀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그놈이 그놈 같았다. 그러다 왠지 냉이로 추측되는 풀을 캐 뿌리를 확인해보았다. 분명 대못처럼 두껍고 뾰족한 뿌리가 냉이인 것 같긴 한데 어째 냉이 향이 나질 않았다. 냉이는 향으로 먹는 건데 이 녀석에게서는 흙냄새 밖에 나질 않는다. 막상 먹으려고 캐자니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반신반의하며 그 풀을 볶아 김밥을 말아 먹었다. 구 동거인의 어머니께서 봄에 난 풀은 잡초가 아니라 약초라 하신 말씀을 어록처럼 새기며(주의: 어떤 약초라도 확인되지 않은 풀은 함부로 뜯어먹지 말 것. 영화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 참고).

 지난달에는 한동안 머릿속이 온통 고사리로 가득했다. 한 차례 비가 내리고 난 직후부터였다. 4월 초를 전후로 며칠간 내리는 비를 제주 사람들은 '고사리 장마'라 부른다는 걸 그즈음 알았다. 고사리 장마가 내리면 제주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새벽같이 숲이나 오름으로 가 고사리를 딴다. 일명 '고사리 스팟'이 어디인지는 길가에 줄지어 선 차량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고사리 헌터계의 신생아로, 시조새 같은 분들께서 몇 포대의 고사리를 캘 때 앙증맞게 한 줌씩, 많아야 에코백이 찰 정도로 캐는 수준이다. 그들의 활동 영역 내에서는 결코 비비지 못 할 풋내기라, 내가 사는 동네에 나만의 스팟을 찾아내 은은하게 활동했다. 그 스팟을 찾기 까지도 꽤나 노력이 필요했다. 마을 뒷길을 따라 길가에 핀 잡초 더미를 눈이 빠져라 관찰하고, 몇 번이나 산책하면서도 있는지 몰랐던 샛길을 따라 인적 드문 숲 속에서 비로소 고사리 떼를 만날 수 있었다.

 고사리를 캐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생긴 것도 수상한 게, 얼마나 요망한 지. 나는 고사리를 캘 때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게 흡사 이런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톡 톡 따는 재미에 한두 시간을 훌쩍 보내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리려 하면 어김없이 먼발치에서 빼꼼 목을 빼고 주변을 내려다보는 녀석을 발견하게 된다. 내 발걸음은 다시 홀린 듯 그 녀석을 향하게 되고, 그렇게 내 시간과 영혼을 바치게 되는 거다. 허 참. 

 손은 또 얼마나 많이 가는지. 고사리는 바로 먹을 수도 없다. 독성이 있어 적어도 10분 이상 삶고 12시간을 더 물에 담가둬야 한다. 이 성가신 일을 몇 번이나 하고도 한동안 땅만 보고 다녔으니, 고사리는 얼마나 치명적인가. 고사리 파스타가 내 소울푸드로 등극한 데에는 이런 서사가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쑥이 연할 때 직접 캐서 떡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좋아하는 건 쑥설기인데 찜기가 없어 아쉬운 대로 쑥 한 줌을 캐 빻고 찹쌀가루와 섞어 반죽했다. 호떡처럼 노릇하게 구워 설탕을 솔솔 뿌려 먹으니 별미가 따로 없었다. 내친김에 장에서 찜기를 사 와 쑥버무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늘 사 먹기만 하던 쑥떡을 직접 만들어 먹다니. 과거의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사람 다 됐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야생 봄나물을 채취하는 행위는 겨울에서 봄으로 지나는 시기에 몸을 깨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지난한 겨울을 지나며 굳었던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일. 때마침 그 시기가 지나면 본격적인 봄 농사가 시작되니, 실제로 워밍업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이 거저 준 제철의 싱싱한 나물을 채취하고 섭취한 몸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곧 내가 키운 작물도 그들처럼 자라나게 된다. 이걸 깨닫고 감격하는 중이다. 




 채집 생활 덕분에 제주에서 봄이라는 계절을 만끽할 방법 하나를 더 체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곳 제주에 잘 적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올 계절엔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제주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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