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7일, 판교 나인트리. 경희대학교 테크노경영대학원 AI기술경영학과가 주최한 제1회 화합의 날 행사에서 메바라 한상도 대표의 특강을 들었다. “고민 안 하고 바로 사표 내고 창업했습니다.” 창업한 지 두 달 반이라고 했다. 조직도, 보증도, 퇴로도 없는 자리에서 그는 매주 새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들이밀고, 튕겨 나가면 또 만들고, 또 들이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실패의 비용을 너무 낮춰 두려움 자체가 무의미해진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서 내 도전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전 화성시 과장 직위를 내려놓고 경기도 AI국 파견을 자원했다. 직위도 없는 실무 사무관으로 AI 정책 업무를 맡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처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으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도대체 왜 오신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대답은 늘 같다. AI 정책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큰 조직에서 새로운 실무를 익히고, 사람을 만나고, 현장의 맥락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박사과정에서 공공부문 AI 도입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데, 현장이 실제로 무엇을 고민하는지 모르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었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한 길이 어딘가에 있어서 내가 그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걸어가다 보면 그 길이 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감이 생기면 그때 해야지, 준비가 다 되면 시작해야지, 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뇌과학은 정반대를 말한다. 의욕이 솟아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다 보면 의욕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뇌는 입력보다 출력을 먼저 본다. 서툴러도 일단 시작하는 그 행동 자체가 뇌를 바꾸고, 바뀐 뇌가 다음 행동을 만든다.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장동선 박사는 이를 ‘반사력’이라고 부른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제가 할게요”라고 먼저 손을 드는 사람이 있다. 내심 힘들고 버거우면서도 일단 손을 든다. 그 반사적인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고, 더 많은 기회를 끌어온다. 반면 머뭇거리는 반사가 습관이 되면, 그것이 결국 그 사람 자체가 된다. “몇 번 미루다 보면 나는 늘 미루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도전을 미루는 것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뇌를 조금씩 ‘머뭇거리는 방향’으로 굳혀 가는 일이라는 뜻이니까. 처음부터 올바른 자세로 스윙을 익힌 골퍼가 어떤 라이에서도 자연스럽게 클럽을 내두르듯, 지금 이 낯설고 불편한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쌓는 경험이 훗날 나의 반사력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한상도 대표의 방식도 다르지 않다. 완벽한 기획을 기다리지 않는다. 일단 만들고, 시장의 반응을 보고, 즉시 수정한다.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포크레인 큰 거 하나 얻었으니까, 산이라도 퍼야 되지 않겠습니까.”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쥔 이상, 작은 문제에 쓰기엔 아깝다는 말이었다. 그는 북극항로라는 인류사적 규모의 문제에 1인 창업자로 뛰어들었다. 기후변화로 북극 항로가 열리면 수에즈 운하보다 30% 짧은 항로가 확보되고, 세계 물류 질서가 통째로 바뀐다. 그 허브를 부산이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비전이다.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생성형 AI와 바이브 코딩이 실제로 그 가능성을 조금씩 현실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30~50명이 필요했던 조직의 일을 이제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시대, 의사결정에서 실행까지 1년이 걸리던 사이클이 이틀이면 가능한 시대가 됐다.
과연 우리 사회는 청년들이 크게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문화를 허용하고 있는가. 지난 1월 30일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뉴미디어 스타트업 김가현 대표는 이렇게 제안했다. “실패 경력서 대신 ‘굿 페일(Good Fail) 인증’처럼 도전의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문과생도 AI 툴 바우처 지원과 소프트웨어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테크 창업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업 캠프에 참여했던 한 고등학생은 “2박 3일의 경험으로 창업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 사람을 바꾼다. 이것은 창업 생태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은 구성원의 반사력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머뭇거리는 방향’으로 굳혀 간다. 공직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준비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일단 걷고 있는가. 한상도 대표는 사표를 던졌고, 나는 완장을 내려놓았다. 규모도 다르고 맥락도 다르다. 그러나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 낯선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같다. 장동선 박사의 말처럼, 그 걸음이 쌓여 길이 될 것이다. 도전이란 완벽한 준비 끝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뛰어드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한상도 대표가 부산항을 향해 달려가듯,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자리에서 달려가고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선택한 삶의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