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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들

by 김정룡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일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해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고, 그렇게 얻은 쌀은 생존을 위한 필수재였다. 뒤주에 쌀 떨어지면 당장 풀뿌리라도 캐야 했던 시절, 그 시대에 쌀은 생명만큼 소중했다. 그때, 그 귀중한 쌀을 훔치는 도둑놈들이 있었다. 남의 생명과 같은 양식을 훔쳤다.


세월이 흐르고, 먼 나라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로, 60년대 중반, 한국 땅에도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가난을 이겨내려 수십 년 피땀 흘린 보람으로, 어느덧 먹고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 쌀 도둑은 더 이상 없어졌다. 이제 가장 소중한 것은 쌀이 아니라 돈이었다. 돈으로 산 소유물이 내 삶의 성취를 결정하는 세상이 되었다.


덕분에 도둑들은 훔칠 것이 다양해졌다. 그들은 주로 비싼 것을 훔쳤다. 들고 튀기에 적당한 크기면 더 좋았다. 담을 넘은 도둑들은 비싸고 가벼운 보석부터 털었다. 아끼던 소유물을 도둑맞은 사람은 그 상실감을 평생 잊지 못했다. 도둑놈들은 남의 땀과 노력의 결실을 훔쳤다.


세상이 달라졌다. 사람의 인식도, 기술도, 가치도 빨리 변화했다. 이제는 돈을 소유해도 손으로 만질 일이 없어졌다. 통장을 정리하러 가던 은행도 문을 닫고, 이제는 내가 번 돈을 세어 볼 기회도 없어졌다. 나의 전 재산은 스마트폰 화면에 숫자로만 찍혀있을 뿐, 은행 컴퓨터가 고장 나면 순식간에 날아갈까 불안했다. 이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화면 속을 넘나드는 도둑이 판치기 시작했다.


사이버 도둑들은 꽤 똑똑하다. 보이스 피싱한답시고 전화로 구라를 치는 놈들은 하수다. 화면 속 어디에 돈이 있는지 아는 도둑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킹으로 우아하게 나의 소중한 것들을 털어갔다. 여기에 고급 기술이 더해진다. 가짜 사이트를 만들고 투자사기를 친다. 스미싱, 파밍, 랜섬웨어 등 서민들의 땀내 나는 돈을 별별 방법으로 털어간다. 이렇게 도둑놈들은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인생 전체를 훔친다.


도둑들은 우수한 두뇌와 기술로 선진국형 도둑님이 되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담을 넘는 일은 전설 속 이야기가 되었다. 도둑들도 유행을 따른다. 화면 속 돈을 훔치는 know-how를 터득했으니, 이제는 돈 될만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세상에 신기한 물건이 있었다. 한번 훔쳐놓으면 그게 스스로 알아서 돈을 만들어준다. 저작권이다. 매번 힘들게 도둑질할 필요가 없다. 도둑질도 한 차원 높아지는 모양새다.


남이 만든 것을 재빨리 베껴서 싼 가격에 업자에게 넘기면 매출수익이 확보된다. 그러다 소송이 걸리면 도둑들은 가게 문을 닫아버리고, 정산을 마친다. 치고 빠지는 전략이다. 얼마나 세련된 도둑질인가? 남이 써 놓은 글로 지식인 행세를 하고, 남이 만든 곡으로 인기 작곡가가 되고, 스토리 하나만 잘 베끼면 영화고 뮤지컬이고 대박 날 수 있다. 도둑놈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운 좋으면 돈도 짭짤하게 들어온다. 저작권료이다.


쓸만한 사진, 음악, 글이 있으면 일단 가져다 쓰고 본다. 먼저 쓰는 놈이 임자인 셈이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저자의 이름도 바꿔 놓으면 감쪽같다. 누가 뭐라고 하면 가짜로 라이선스도 조작해 넣는다. 그러다 괜찮은 스포츠 중계라도 있으면 바로 스트리밍을 걸어버린다. 접속자 수가 돈이 된다. 나만 보기 아까우면 돈 받고 팔아버린다. 고객을 위한 서비스로, 유통 프로그램도 무단복제해서 제공한다. 불법 공급망이 확대된다.


저작권은 훔쳐도 훔친 티가 금방 나지 않으니 도둑들은 당당하다. 어두운 밤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종이 화폐를 훔치지 않았으니, 자신들은 도둑이 아닌 줄 안다. 남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은 도둑들의 역사가 말해주듯, 사람들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훔친다. 이 파렴치한 도둑놈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창작자들의 생각과 영혼과 삶을 송두리째 훔치고 있다.


그들은

도둑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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