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1,2,3호는 이제 나이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10대의 시작과 절정에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틈 속에서 10대의 삶은 무엇으로 정의될까를 떠올리면 고민할 것도 없이 아마 학업이지 않을까한다. '입시'를 향한 내몰림의 삶.
사실 나 또한 그 시기를 동일한 방식으로 지나왔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 것이 우리집 아이들을 내몰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분명 선생님들의 올바른 가르침대로 선생님의 말씀을 믿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채 일단 모두 달리니까 나도 달렸다. 물론 진학이라는 결과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그 진학 이후 또 달렸다는 것이 모르겠다는 것이다. 뭐가 뭔지도 모른채 간호대학을 입학 해 교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학점으로 졸업 해 유수한 병원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 취업 후 또 달렸다는 것이 모르겠다는 것이다. 간호학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겠고 환자의 고름과 피를 입으로 흡입하는 간호처치를 하셨다는 프로렌스 나이팅게일(너무 존경스럽지만...)이라는 분의 사명의식이 내겐 딱히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난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달리던 그 날 사건은 일어났다.
간호학생으로 신생아실을 실습하던 날이었고, 그 날 난 밤근무(나이트근무)였다.
그 병원의 신생아실의 밤근무의 큰 임무는 분류기준에 맞춰 밤마다 아기들의 침대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주째 고정석인 아기 3명이 있었다. 간호사선생님께 물어보니 미혼모 아기이고 이 아기들은 곧 기관을 통해 입양될 아기인데 지금 서류절차상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그제서야 보이는 아기 네임카드속 산모의 나이. 17살. 16살. 15살. 그 때 나는 22살.
그 날 밤의 혼란은 정말 혼란 자체였다. 그 밤은 1초만에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술에 잔뜩 취해 필름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소녀들에 대한 속상함과 답답함과 막막함이 짙은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실습 날 밤근무에 찾은 신생아실.
"띠리리리~리, 띠 리리리리, 띠 리리리리" 신생아실과 연결된 외부 콜벨이 울린다.
"내 OO병원 신생아실 OOO입니다."
"저.... 저.... 아기 한번 볼 수 있어요?"
"산모이름이 누구시죠? 지금은 아기 면회시간이 아닌데 내일 아침 10시 면회시간에 보세요."
"아..... 네!!!"
잠시 후 다시 콜벨이 울린다. 수화기 넘어로 들리는 미세한 떨림과 훌쩍임으로 산모이름을 말하고 내일 아침은 아기를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통화시간이 길다고 생각 한 담당간호사선생님께서 수화기를 뺏든 가져가셔서 다시 처음부터 설명과 설득과 동의의 실랑이가 시작되었지만 '엄마'였던 그녀는 창문너머로 잠시만 보내주겠노라고 하고 마무리 되었다.
나는 자는 아기를 깨웠다. 베냇저고리를 최대한 이쁘게 동여맸다. 얼굴을 깨끗이 씻겼다. 최선의 2:8가르마로 빗질했다. 속싸개 포 밖으로 불끈 쥔 두 주먹을 꺼내주었다. 어쩌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르는 '엄마'에게 불끈 쥔 주먹으로 당차게 살아 보겠노라는 의지를 보여주듯. 그렇게 나는 엄마없이도 잘 살수 있다는 모습의 도전을 보여주려는 듯 아기에게는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여전히 그 소녀들을 향한 답답함이 있었다.
신생아실 귀퉁이 커텐을 조금 열었다. 신생아실 창문에 붙어있는 125만화소의 나와 동일한 핸드폰. 그 당시 캠코더가 유행이었다. 신생아실 면회가 시작되면 면회실 창문에 캠코더가 창문에 다다닥 붙어 아기의 작은 행동도 놓치지 않으려는 부모의 열정이 있었다.
그 소녀들은 그 때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건 그 당시 신생아실의 대세 아니였으므로. 그 소녀들의 아기들을 향한 주변의 알수 없는 시선이 창문너머의 아기들에게 전해 질 수도 있으니까.
화장끼 없는 앳된 얼굴의 그 소녀들은 연신 125만 화소의 2*3cm 액정의 핸드폰 카메라로 아기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었다.
나도 그녀들도 옆의 '엄마'인 간호사선생님도 다 함께 울었다. 그 날 웃었던 이는 아기 셋 뿐.
난 그날 알았다. 그 소녀들은 '위대한 엄마'임을.
그 소녀들은 낙태라는 '대세'를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본인들 인생에 큰 오점이라는 '대세'도 들었을 것이다.
위대한 엄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소녀들을 향해 일주일 간 품었던 마음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위대한 엄마'들은 정말 소중한 존재이니 자책하지 말고 부디 사는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난 그 날 '간호학'이라는 학문이 좋아졌다. 이 학문을 통해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여러 통로를 통해 알아보고 보건교사가 되면 '학교라는 곳에 가서 자라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성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며 그 성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도 내가 할일이 있지 않을까를 어렴풋이 마음 속에 저장 해 두었다.
그렇게 졸업 한 뒤 병원 생활을 하면서 희미하게 잊어졌던 기억이 특이한 기회를 통해 살아나 2006년 보건교사임용고시를 통해 보건교사가 되었다.
학교 생활이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내 성은 내 것이니, 내가 결정하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되고, 낙태라는 말보다 임신중단이라는 '대세'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간다. 그 가운데 그 '위대한 엄마'들을 생각하며 '성'이라는 과학적 지식을 '감동과 느낌'을 통해 '소중함이라는 가치관'을 삶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할 수있는 '대의'를 꿈꿔본다. 난 나의 이런 생각이 학교라는 곳에 국한되지 않길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