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와 흑백요리사

by 이동배

고교학점제, ‘표준 레시피’를 넘어 ‘삶의 시그니처’를 만드는 무대로

이동배

가. 흑백요리사가 우리 교육에 던지는 질문
최근 흥미 있게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흑백요리사’이다. 이 프로그램의 백미는 요리사 개인이 가진 요리실력을 단순히 뽐내는 데 있지 않다. 지역의 요리사로 갈고닦은 자신만의 레시피를 독창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고, 팀 미션에서는 흑백 요리사 간 주어진 요리소재를 가지고 ‘전략적 협업’의 과정이다. 정해진 레시피를 따라 요리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재료를 재해석하고 자기와 다른 음식 분야의 고수들과 부딪히며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는 과정을 보며 고등학교 교육현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면 시행 1년을 맞이한 고교학점제라는 주방의 현실을 살펴보자. 192학점이라는 거대한 식단표는 차려졌지만, 학생들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요리하고 싶은지 묻지 못한 채 ‘입시제도의 평가’라는 단일한 평론가 앞에 서 있다. 오직 ‘탈락’과 ‘성공’의 두 가지 잣대인 것이다. 고교학점제가 도입되어 학생들의 관심에 맞춰 과목 선택권은 늘었으나 수능 범위 과목이나 내신 획득이 유리한 과목으로 쏠리는 ‘전략적 기피’가 만연하고, 학교 담장에 갇힌 수업은 아이들의 배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우리 교육도 ‘정해진 키트에 맞춰 요리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창의적으로 개척하는 마스터 셰프’를 키우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나. 10%의 여유, 실패가 허용되는 ‘자율적 배움의 시간’
참된 배움은 지식의 수동적 습득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뜻을 묻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전체 192학점 중 약 10%에 해당하는 18학점은 학생이 스스로 배움을 묻고 설계하고 지역사회의 교육자원과 연계하는 ‘학생 설계형 자율 교육과정’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고교 생활 중 10%의 ‘안전한 딴짓’은 학생들에게 실패해도 괜찮은 도전과 모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그동안 칸막이 교육과정에 갇혀 정해진 방향대로만 학습했던 학생 개개인에게 ‘배움의 주권’을 돌려주는 시도이자, 개별 교과목의 칸막이를 넘어 학생의 관심사를 본인의 배움 이력으로 연결하는 혁신적 시도가 될 것이다.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의 총 4학기 동안 아이들에게 배움의 공간을 돌려주자.

다. 다층적 참여 과정과 학교 밖 ‘마을 캠퍼스’
18학점이 학교 현장에서 안착하려면 학생의 준비도에 따른 ‘다층적 참여 과정’이 필요하다. 스스로 배움 주제를 만드는 [개인 설계형], 친구들과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협력하는 [팀 프로젝트형], 그리고 주제 선정을 어려워하는 학생을 위해 학교, 교사나 지역 교육활동가가 제안한 주제에 참여하는 [가이드형]을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과정이 가능하도록 시간표 작업도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학생들의 배움터는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학교 내 유휴 공간을 토론과 작업이 가능한 공간으로 재구조화하는 동시에, 지역 내 대학 연구실, 기업, 지자체의 유휴공간, 온라인 공간 등을 ‘마을 배움터’로 인증하여 학교 밖으로 캠퍼스를 확장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 밖 실전 현장에서 전문가와 교감하며 탐구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지식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과학과 사회의 공통주제인 ‘기후위기’의 문제와 경제과목, 지리과목과 연계하여 “기후 위기는 우리 마을의 경제를 어떻게 바꾸는가?”의 주제로 탐구수업을 할 수 있다. 언어와 매체와 사회문화, 미술과목을 연계하여 “마을 콘텐츠 제작”이나 “지역 생활사를 아카이브 화한 그림과 영상 기록물 제작” 등을 시도해 볼 수 있다. AI 교육을 학교에서 데이터과학 과목과 인공지능 기초를 수강한 학생들이 자기가 있는 지자체의 인공지능 관련 기업과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참여한다면 앎과 삶이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더해서 현재 주로 3학년 2학기에 편성된 융합교과나 교양과목을 1학년, 2학년에 전면 편성하여 덧붙인다면 학생의 관심사 기반의 자율설계 학점과 교과 간 칸막이를 허무는 융합주제중심 교과설계가 가능하다.

라. 인사혁신과 행정적 지원
학생이 자율적으로 설계하는 배움 교육과정이 ‘업무 폭탄’이 아닌 ‘교육 혁신’으로 작동하려면 인사와 행정의 대전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째, 지방 분권화와 권한 위임이 필요하다. 교육과정 편성 및 교과서과목 개설 승인 권한을 교육부에서 교육감, 교육감에서 지역 교육지원청 교육장에게 대폭 위임하여 지역 특색에 맞는 배움의 과정이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둘째, 공모형 리더십 인사제도 확산이 필요하다. 관료적 행정을 넘어 지역의 자원을 학교와 연결할 수 있는 ‘교육장·교장 공모제’를 확대하여 이 분들이 학교의 교육과정을 선생님들과 함께 변화시킬 수 있도록 혁신적인 인사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전문 인력의 지원이 필요하다. 교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교육청과 지자체 간 배움 연계 부서와 전문 코디네이터를 배치하고 마을 강사 네트워크를 밀착 지원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지속적인 연수를 통해 교육과정 설계자로서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넷째, 평가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수능은 자격고사화로 전환하고, 내신은 절대평가화가 되어야 한다. 학생 자율형 설계 과목은 융합과목과 동일하게 등급 대신 Pass/Fail 방식을 적용하고, 질문의 과정을 중시하는 ‘환류 중심 서술형 기록’으로 대입 전형에 중요하게 반영되는 전형 요소가 되어야 한다.

마. 경계를 넘나드는 배움, 나세움을 지원하는 교육 대전환
이미 우리는 경계를 허문 교육이 가져오는 성장의 사례들을 목격하고 있다. 고등교육에서는 전 세계를 캠퍼스 삼아 현장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미국의 미네르바 대학,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아주대 총장 시절 도입해 학생들에게 ‘배움의 주권’을 돌려준 아주대의 ‘파란 학기제’는 자율 배움 설계가 교육의 질을 어떻게 바꾸는지 증명했다. 이러한 흐름은 공립형 대안학교인 경기도의 ‘신나는 학교’나 전환형 학교인 서울의 ‘오디세이 학교’를 통해 고교 현장에서도 그 유효성이 확인되었다.
10%의 나세움 자율설계과정은 단순한 학점의 배분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나세움’의 주권을 돌려주는 선언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마을,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협력하여 배울 때, 우리 교육은 비로소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질문하는 시민’을 길러낼 수 있다. 이제 국가와 지역사회가 아이들이 마음껏 꿈의 레시피를 실험하고 친구들과 협력하며 자신만의 삶의 시그니처를 완성할 수 있는 ‘살맛 나는 배움터’를 열어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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