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가 없는 뚜벅이다. 가끔 엄마 차를 빌려 타기도 하지만, 사실 20년 넘게 운전을 해왔어도 운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문제는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북적거리는 곳이 점점 더 불편해진다는 거다. 그리고 대중교통이 잘 닿지 않는 동네로 이사한 뒤부터는 차 없는 삶이 불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은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차를 사거나 유지하는 데 들어갈 돈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며 짜증이 날 때도 많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문득문득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글감이 생기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창작에 도움이 된다. 글은 어쩌면 고립 속에서 가장 잘 쓰이는지도 모른다.
요즘 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늦게 결혼해서 이제 막 한 살 남짓한 아기들을 키우고 있다. 그 친구들이 아기 돌보느라 움직이지 못하니, 내가 집으로 찾아가고, 그렇게 만나고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 됐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15분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거다. 여유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도 결혼이 늦었다. 아이를 가지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상적인 나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 1~2년 동안 나 자신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원하는 것을 알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무엇을 참을 수 있고, 무엇은 참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나를 잘 몰랐다. 그래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무작정 참았고, 거절하는 법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했다. 그 상태로 결혼을 했더라면 분명히 파국이었을 거다. 엄마 같은 성인군자를 만나지 않는 한, 나를 돌보는 일은 나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도, 투자도,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은 여유가 있을 때 더 잘할 수 있다. 가끔 세상이 정해놓은 ‘적당한 때’나 ‘이상적인 시기’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기준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내린 결정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남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조바심이 들 때도 있지만, 결국 나는 나만의 속도를 찾고, 나만의 템포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떠밀려 선택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 저기 버스가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