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급날이다.
카드이용대금 결제하고, 적금 빠져나가고, 학자금 대출금 갚고 나니 몇만 원만 남았다. 얼마 전 적금을 하나 깼는데, 또 하나를 깨야할 것 같다. 통장 잔고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급해진다.
나에게는 4억쯤의 빚이 있다.
유학생활과 맞바꾼 결과다. 취업만 하면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복리는 생각보다 무서운 놈이었다. 빚을 갚는 속도보다 이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를 때, 기다린 시간에 비해 순식간에 사라지는 월급을 볼 때 맥이 빠진다. 이제는 그만 걱정시켜 드리고 번듯하게 효도하고 싶은데 나보다 더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현실이 참 서글프다.
나는 마음이 짓눌릴 땐 주로 서점에 간다. 책은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한다. “어느날 400억의 빚을 진 남자”라는 책처럼. 대기업에 다니며 평범한 삶을 살던 작가 유자와 쓰요시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부도 직전의 회사와 400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되면서 16년간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맺음말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의지할 사람도 없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래도 내 인생을 잃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기도했던 그날의 나와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를 보며 절대 움직일 리 없다고,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움츠러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불가능할지 어떨지는 일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내 어깨를 토닥이는 것만 같은 메시지였다.
4억도 아니고, 무려 400억.
왠지 모르게 용기가 생긴다. 그래, 까짓 거 나도 할 수 있겠지. 건강하게 살아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 않겠나. 돈은 벌면 되고, 빚은 차근차근 갚아나가면 되고. 언젠간 갚을 수 있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로 현재를 갉아먹으며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나를 타이르며 조급함을 가라앉히곤 한다.
하지만 생각처럼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살다 보면 순조롭고 평온하여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날도 있고, 괴로워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 날도 있다. 불쑥 찾아온 불안이 가시지 않을 땐 가만히 생각해 본다. 돈으로 해결하거나 살 수 없는 것들을, 그래서 감사한 것들을. 가령 나의 건강이라거나, 건강하진 않으시지만 그래도 내 곁에 계시는 부모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동생과 친구들 몇몇, 넉넉하진 않지만 일상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월급을 주는 직장, 그리고 든든한 조력자 같은 직장 동료들처럼.
“20억이 생기면 뭐 할 거야?”
언젠가 동생이 물었다.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일 거라고 답했었다. 지금보다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가끔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가고, 조앤 K. 롤링처럼 책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바라는 건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삶이다. 아무래도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뒷받침이 된다면 좀 더 수월하게 이룰 수 있을 바람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 팍팍함에 굴복하지 않으며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취향을 가꾸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 나였으면, 그렇게 말랑말랑한 마음을 가지고 나이 들어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