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모처럼 긴 휴가를 내고 동생을 찾아갔다.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집이 동생의 복잡한 상황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아침 일찍 동생이 출근하고 오전 내내 집을 치웠다. 청소를 마치고 카메라 너머 동생이 늘 쉬는 날 아침에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기차 경적소리, 기러기 우는 소리, 도로 위 분주하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 적막을 깨는 냉장고 소리를 들으면서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동생은 이 자리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느끼는 평화로움과 고독함이 공존하는 이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까.
동생이 퇴근할 때가 다가오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뭘 먹어야 하나. 꽤나 긴 시간 자취했었지만 시간에 쫓기며 지낸 탓에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요리와는 친해지지 못했다. 혼자 고분고투하며 지내고 있었을 동생에게 근사한 식사를 차려주고 싶은데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으니 큰 마음먹고 장을 보러 가도 미궁에 빠졌다. 결국 된장국 하나 제대로 끓여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신이 모르는 것은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공감하게 되는 말이다. 부끄럽게도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공부와 일 밖에 없다. 살면서 놓친 것은 요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꾸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반 일리치는 명문가문 출신으로 판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상류층의 인정을 받는 결혼을 했다. 업무에서 승승장구하며 얻는 만족은 자존심을 높여주었고, 사교 모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유쾌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편하고, 즐겁고, 고상하게. 그가 추구한 삶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을 잃고 죽음에 가까워서야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쳤음을, 자신이 잘못 살았고 평생을 낭비했으며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장면이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종종 유화처럼 덧입혀 덮어버릴 수 없는 수채화가 인생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은 실수했다고, 실패했다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되돌릴 수도 없다. 계속 흐를 뿐이다. 나도 최근에서야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결코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사는 것과 같지 않을 수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루하루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보지만 여전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싶은 날들이 이어진다.
답은 몰라도 일단 뭐든 시작해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빨리 뭐라도 해 봐야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답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돌아보면 언제나 이걸로 뭐가 달라지기나 할까 싶은 작은 사건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아무리 늦었어도 아직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때였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시작해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퍼뜩 길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