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순간들 (2018)

by 최은영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일주일 간의 추수감사절 방학이 지나고 나면 바로 기말고사에 과제물도 마감이다. 몇 날 며칠 밤을 새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었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밤기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학기 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게 뻔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일들을 모른 체하고 떠나는 여행이 마음 편하진 않았지만 일단 기분 전환을 하기로 했다.


기차는 이내 전원적인 대학 도시를 빠져나갔다. 시카고로 향하는 길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바퀴 소리, 달빛 아래 밤바다처럼 변해버린 끝없는 옥수수 밭, 하늘 가득 쏟아지는 별빛, 이어폰을 통해 흐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시네마 천국. 어느 하나 놓칠 것이 없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모노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듯했다. 이왕이면 오만과 편견 속 둘째 딸 엘리자베스처럼 어떤 자리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찬 여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갑자기 없던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어깨를 짓누르던 학점, 진로, 대인관계 등 여러 가지 고민들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뜻밖의 여행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였다.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을 안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대도시의 야경은 아름다웠고 차가운 밤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다 보니 권태기가 왔다. 문제는 너무 일찍 찾아왔다. 일 년 만이었다. 고작 일 년 일하고 이렇게 힘들면 앞으로 몇 십 년을 어떻게 더 사나. 낙담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잘만 사는 것 같다. 나만 힘든가 보다. 세상천지에 나만. 더 낙담했다.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자기 친구가 그러더라며 얘기를 한다. 세상 사람들 다 괜찮은데 자기만 힘든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더라는 이야기. 피식 웃음이 났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세상에 나만 그런 건 없구나 싶었다.


누구든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행복한 사람이 따로 있지도 않다. 행복한 삶의 비결 중 하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끊임없이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 때 떠났던 기차여행이 떠올랐다. 역시 기억에 남는 순간은 뜻밖에 찾아온 순간이다. 뜻밖에 찾아온 순간은 예측하지 못한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다시 꺼내 입은 겨울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뜻밖의 만원 몇 장처럼.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내 결정을 만류했다. 여기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이냐며. 듣고 보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날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내겐 가족이 1 순위이다. 언젠가 죽음을 앞두고 후회할 일은 어쩌면 다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닌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밥 한 끼였으리라는 말에 격한 공감을 했다.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며 구슬프게 우는 사내를 만난 공자 이야기를 읽으며 행여 내 얘기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배고프지 않대도 결국 밥상 앞에 앉히고야 마는 엄마 옆에 내가 있다. 베란다에선 은행 꾸린 내가 나고 부엌에선 간장 조린 내가 나서 방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어 어쩔 줄 몰라하다가도 정말 집에 왔구나 실감이 나 배시시 웃음이 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세렌디피티 (serendipity)이다. ‘뜻밖의 발견’ 또는 ‘운 좋은 발견’을 뜻한다.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기도 하고 내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 온 지 일 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 시험 세 개를 치렀고 하나가 남았다. 될 놈은 된다,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하기엔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음 졸이던 날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짙어진다.


우연한 일로 인연이 생겨 만나게 된 친구들은 유쾌하기 그지없고 덜컥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이 대학 저 대학 캠퍼스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얼떨결에 아빠 손에 이끌려 다니게 된 작문 수업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끌어냈고 이따금씩 떠나는 가족여행은 그들의 사랑과 소중함을 재확인시켜 준다. 불과 일 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다.


뜻밖의 순간들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요즘이다. 한국에서 15년 만에 맞는 가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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