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사는 가족 (2023)

by 최은영

1.

어렸을 땐 동생이 얼마나 예쁘던지 동네방네 데리고 다니며 자랑하곤 했다. 유치원에서 맛있는 간식이 나오면 차마 혼자만 먹을 수 없어 꼭 챙겨 와 동생에게 나눠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서 더 맛있는 걸 먹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동생과 그렇게 애틋한 사이였던 건 아니다. 아기였던 동생을 엄마가 안기만 하면 내려놓으라며 대성통곡을 했고, 동생 기저귀를 갈아주면 맞지도 않는 기저귀를 들고 와 나도 채워달라며 생떼를 부렸다. 언니 같고, 오빠 같고, 친구 같은 지금의 든든한 동생을 떠올리면 그때 잠시나마 미워했던 기억이 괜스레 미안하다.


치대생 시절, 내게 주어진 방학은 봄과 여름에 일주일, 겨울에 2주 남짓이었다.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지내던 나는 방학이 시작되면 주저 없이 짐을 꾸려 동생에게 향했다. 동생은 차로 여덟 시간이 걸리는 먼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동생 옆에 있으면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한 학기 동안 쌓였던 긴장과 힘겨움이 조금씩 옅어졌다.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었던 얼어붙은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자라면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하지만 함께 유학길에 올라 견뎌낸 시간들은 우리를 둘도 없는 사이로 만들었다. 눈빛만 봐도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제는 시차조차 다른 곳에 살아서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짬을 내어 연락해야 한다. 그럼에도 시시한 농담부터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며 여전히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보고 싶을 때 곁에 없는 것이 늘 아쉽고 허전하지만,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서로를 응원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동생이 더 그리워진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동생. 동생이 없었다면 내 삶은 김 빠진 사이다처럼 밍밍한 맛이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2.

혼자 사는 지난 15년간 굳어진 버릇이 있다. 나는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침마다 먹지 않으려는 나와 뭐라도 좀 먹이려는 엄마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요즘은 눈 뜨자마자 군말 없이 식탁 앞에 앉는다. 나보다 먼저 아침을 맞이하고 나의 하루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첫끼를 준비하는 타인은 이 세상에 엄마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후로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코 끝이 시큰해지는 날이 많다. 가을은 유난히 엄마와 공항에서 헤어지던 날이 자주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래서 엄마와 나에게 공항은 마냥 즐거운 곳이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설렘이 가득한 꿈과 희망의 공간일 테지만 우리에게는 이별이 더 익숙한 곳이다.


아침잠이 많지만 한국에서 엄마가 잠깐 오셨다가 돌아가는 날에는 알람 없이도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전날부터 멀미처럼 울렁거리는 슬픔을 달래며 엄마 몰래 눈물을 훔치느라 좌불안석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면 싱숭생숭한 마음에 여기저기 엄마의 흔적을 찾아 한동안 집 안 곳곳을 기웃거렸다. 옷장에 엄마가 두고 간 스웨터를 발견했던 날에는 스웨터를 껴 입고 그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직 남아 있는 엄마 냄새를 킁킁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엄마의 흔적을 느껴보려고. 그러다 한참을 목 놓아 엉엉 울기도 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날을 떠올리면 그 스웨터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몇 년 전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따기 위해 공부하는 내 옆에서 잠든 엄마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만큼이나 발에도 주름이 많아졌다. 엄마가 조금만 더 천천히 나이 들어갔으면, 이젠 아프지 말았으면 생각을 하다 엄마는 늘 이런 마음이었겠지 싶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어 밤낮으로 기도하며 안타까움에 애가 닳았을 엄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퇴근하고 저녁에 돌아와 엄마가 설거지하는 소리, 일상을 지키는 엄마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엄마 품에 안긴 듯 분주함 속에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잠잠해지는 것만 같다.


3.

내가 한국에 돌아와 세 번의 큰 시험을 치르는 동안 아빠도 생사의 고비들을 넘겼다. 손에 쥔 연필을 차마 놓지 못하고 밤새 울며 책상 앞을 떠날 수 없었던 날이 있었고, 코로나가 창궐하던 겨울 응급실 앞 주차장에서 하루 종일 밤새도록 차 안에서 마음 졸이던 날이 있었다. 내 상황이 어떻든 아랑곳없이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참 야속했다. 내 세상은 이렇게 쑥대밭인데, 출근길은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답고 날씨는 아무 일 없는 듯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아빠를 잃을 뻔하고 보니, 여태껏 하지 못했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빠는 스무 살에 아빠를 잃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다. 얼마나 슬펐을까.


"아빠, 아빠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안 슬펐어?"

"말할 수 없이 슬펐지."

"얼마나 오래 슬펐어?"

"그걸 어떻게 이야기해. 지금도 큰 꼴짐을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 들어오시던 모습이 선해."


항상 씩씩하고 지치지 않는 아빠는 큰 산 같았다. 갈대처럼 휘날리고 요동치는 나를 다잡아주는 닻 같았다. 그래서 아빠는 슬픔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우리를 유학 보낸 후로 동네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가 되셨다고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행여 우리와 멀어져 끊어진 연처럼 떠나보내게 되진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에, 우리 또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싶은 그리운 마음에 그땐 그랬단다 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 얘기해 주셨다.


끝없이 이어지는 타지생활에 지쳐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집으로 가는 길이 참 험난하다 싶던 어느 날, 나의 깊은 한숨을 들은 아빠가 스카이프 너머로 말씀하셨다. “살아보니까 종착점엔 아무것도 없더라. 과정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이 인생이더라, " 하고.


이제는 내가 아빠의 산이 되어주고 닻이 되어주고 싶다. 당연한 듯 여전히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고, 평범한 보통의 하루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던가 싶을 만큼 어느 정도는 다시 평온해진 일상이 감사하다.


4.

가족은 나의 우주, 나의 모든 것이다.


가족은 생각만으로도 포근함을 떠올리게 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낮잠 자는 방에 추울까 싶어 살며시 담요를 덮어주거나 히터를 틀어주는 것. 좋아하는 간장게장의 게딱지를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 늦은 밤 춥고 어둡고 귀찮지만 편의점에 같이 걸어가 주는 것. 사랑은 그렇게 소소하지만 따뜻한 것이라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곳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이었다.


나와 동생은 학교도 학원도 길을 두 번 이상 건넌 적이 없다. 어린아이들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90년대에 엄마아빠는 최대한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는 1층이나 2층으로만 이사를 다녔다. 덕분에 나는 지각 10분 전에 일어나도 유유히 걸어갈 수 있는 여유 아닌 게으름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그 사랑이 결코 소소하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 가족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이산가족이 되어 살고 있다. 이쯤이면 무덤덤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헤어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유학생활이 끝나면 예전처럼 다 같이 오손도손 모여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가족 모두가 슬픔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를. 항상 평온할 수는 없어도 대체로 행복하기를. 하루라도 조금 더 즐겁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이미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늘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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