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놈의 몰락기 (2023)

by 최은영

내가 진학한 치과대학에는 그 해 12,077명이 지원했다고 들었다. 정원은 67명이었다. 다른 건 하고 싶지 않은데 떨어지면 뭘 해야 하나. 치대 가는 데 내 전부를 걸었기에 마음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다 연말, 선물처럼 도착한 합격 메일을 마주하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기어코 해냈구나.’


나는 운이 꽤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먹은 건 이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내뱉던 주문이 있었다. “하면 되지, 하면 다 돼. 나는 될 놈이니까.” 그런 20대를 지나며 나는 점점 기고만장해져 갔다.


그에 비해 30대는 비워내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10대, 20대, 30대를 바쳐 달려온 길의 끝에서 마주한 건, 생각보다 초라한 현실이었다. 내게 주어진 능력이 겨우 내 앞가림이나 할 수준이라니. 아이유의 노래 가사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그렇게 기를 쓰고 애를 쓴 결과가 이거밖에 안 되는 건가 하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 나이가 되면 뭐든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틈만 나면 뭐가 문제였을까를 곱씹으며, 끝없이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열심을 낼 이유와 목표가 사라지자, 무기력이 순식간에 삶을 잠식했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텅 빈 공허만이 남았다. 매일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이 진흙탕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조차 기대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해보곤 했다. 모든 열심을 다해도 부족한 것 같은 불안함을 안고,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고민만 흘려보낸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 흙탕물 같은 시간들 속에서 나는 아주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었다. 기대와 실망이 번갈아 밀려오며 결국 깨달은 건, 삶은 내가 설계한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긋난 기대와 그로 인한 좌절은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예전의 나라면,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냐며, 안 되는 건 결국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얼마나 건방진 말인지 안다. 세상에는 그 어떤 열심과 간절함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도.


종종 인생이 수채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유화처럼 덧칠해 지워버릴 수 없으니까. 실수나 실패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주어진 몫을 다해도, 더 멀리 가기 위해 스스로 떠안은 일들까지 해내도, 여전히 뒤처지거나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 불확실함이야말로 인생을 완성하는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이 꿈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조금 더 살아보니, 내 조건에 맞는 가장 행복한 선택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가지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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