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주저 없이 나의 철새가 되어준 이들에게, 그리고 선배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1장.
넓고 푸른 초원에 한 코끼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코끼리는 바람을 가르며 마음껏 달리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초원의 풀을 뜯어먹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요.
어느 날 아침,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초원에 감돌았습니다. 햇살 대신 짙은 안개가 낮게 깔렸고, 새들도 유난히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탁탁, 탁탁—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야, 이 코끼리를 마을로 데려가면 아주 쓸모 있겠는걸?"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내 몇몇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흩어져 코끼리를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사방에서 던진 밧줄이 점점 조여 오며 그의 몸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몸을 돌릴 틈도 없이 코끼리는 어느새 커다란 나무 우리 속으로 밀려 들어갔어요. 그 안은 발을 내디디기조차 어려울 만큼 좁고 답답했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코끼리는 자신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 초원의 냄새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며칠 후, 마을에 도착한 코끼리의 발에는 굵고 무거운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몸부림치며 달아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가혹한 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처 위에 생긴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 못했고, 코끼리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커져갔어요.
마침내 코끼리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길들여져 갔어요. 발에는 짧은 쇠사슬이 채워져 있어 마음껏 걸을 수도 없었지만, 낮에는 마을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저녁이면 마음에 들지도 않는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면서요. 호루라기, 채찍, 웃음, 박수, 고함 소리 속에서 초원의 기억은 흐릿해졌고, 자신을 기다리는 자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죠. 그의 가슴속엔 날이 갈수록 더 깊은 절망이 자리 잡았습니다.
2장.
그러던 어느 날, 족쇄를 점검하던 일꾼이 자물쇠를 제대로 채우치 않은 채 떠났습니다. 코끼리는 족쇄가 헐거워졌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낡은 족쇄의 차가운 무게를 다시 느꼈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던 한 철새가 코끼리 곁으로 내려와 앉았습니다. 철새는 먼 길을 날아와 지쳐 보였지만, 눈빛은 맑고 생기 있었습니다.
“이봐,” 철새가 말했습니다.
“네 발에 묶인 족쇄가 헐거워진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라.”
코끼리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습니다.
“알아. 하지만 도망쳐도 다시 잡혀오게 될 거야. 더 아프기만 하겠지.”
철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기서 도망친 적 있어. 매번 더 심한 벌을 받았지. 아무 소용없는 짓이야.”
철새는 코끼리의 슬퍼 보이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매년 이곳을 떠나 먼 북쪽의 숲과 바다를 건너.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쉬어갈 곳을 찾지 못해 지칠 때도 많아. 그래도 그 모든 순간 하늘을 날며 깨닫지 — 세상은 끝없이 넓고 아름답다는 것을. 하지만 주저앉아 있으면 그런 세상은 결코 만날 수 없어. 코끼리야, 지금이 기회야. 한 걸음만 내디뎌봐. 그다음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코끼리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난 너처럼 날 수가 없잖아.”
철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날개 대신 너에겐 튼튼한 다리가 있잖아.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날 밤, 코끼리는 헐거워진 족쇄를 바라보며 잠들지 못했습니다.
새벽녘, 코끼리는 긴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숨결에는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흔들림이 담겨 있었지요. 그러다 그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균형을 잃을까 봐, 족쇄가 소리를 낼까 봐, 조심하며 움직였습니다.
철컥—
헐거워진 족쇄가 서서히 발에서 빠져나와 풀밭 위로 툭 떨어졌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옆에서 철새가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멈춰 섰습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순간이 정말인지, 아직은 믿기지 않았지요. 그는 잠시 뒤돌아 적막이 감도는 서커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워하던 초원을 향해 발을 옮겼습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래, 이렇게 한 걸음씩 가보는 거야.'
3장.
한참을 철새와 함께 걸어가던 중,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습니다. 곧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습니다. 코끼리는 온몸이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철새도 빗속에서 날개를 힘껏 퍼덕였지만, 바람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때, 저 앞에 커다랗고 오래된 고목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두꺼운 껍질은 세월의 흔적처럼 거칠었고, 몸통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습니다. 코끼리는 그 나무 아래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을까요?”
고목나무는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러려무나. 이리 와서 쉬어 가거라. 오늘은 유난히 비바람이 거세구나.”
굵은 줄기와 넓은 가지가 거센 비바람을 막아 주자, 매섭던 빗소리가 잦아들고 차가운 바람도 한결 누그러졌습니다. 축축하게 젖었던 몸 위로는 이제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천천히 퍼져 갔습니다. 코끼리는 고목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거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 계시는 걸 보니 참 대단하세요.”
“나는 이 자리에서 수백 번의 계절을 맞이했단다. 나무는 키가 자라는 만큼 뿌리도 함께 뻗어야만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설 수 있단다. 여름의 강한 햇빛과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스스로 견뎌내야 해. 고통은 때로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잘 건너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낸 모든 순간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다. 한데,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걱정 내려두고 편히 쉬렴.”
코끼리는 그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고목나무의 말이 햇살을 품은 듯 따뜻했거든요. 그러고는 자신의 발목을. 굵은 족쇄가 남긴 자국은 아직도 뚜렷했지요. 철새도 가만히 코끼리의 발목에 남은 자국을 바라보다가 코끼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코끼리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자국은 내가 강해졌다는 흔적이야.”
철새는 기특하다는 듯 빙긋이 웃었습니다.
코끼리와 철새는 고목나무의 굵은 줄기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습니다. 빗방울 소리 사이로 고목나무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튿날, 비바람이 잦아들자 코끼리와 철새는 고목나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코끼리의 발걸음에는 전날보다 조금 더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4장.
숲을 지나자 눈앞에 반짝이는 강물이 펼쳐졌습니다. 햇빛을 머금은 물결이 춤을 추듯 반짝이며 인사했습니다.
“안녕!"
더위 속에 걷던 코끼리는 갈증을 느끼고 강가에 다가가 강물에게 물었습니다.
“강물아, 우리가 네 물을 좀 마셔도 될까?”
강물은 잔잔히 미소 짓듯 대답했습니다.
“그럼, 얼마든지."
“너는 어디로 가는 중이니?”
코끼리가 물었습니다.
“바다! 나는 바다로 갈 거야. 때로는 큰 바위가 내 길을 막기도 하고, 굽이굽이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멈추진 않아. 방향이나 속도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거니까. 계속 흐르다 보면 언젠간 나는 바다에 닿아 있을 거야.”
코끼리는 강물의 말에 귀 기울이며 물을 들이켰습니다. 차갑고도 맑은 물맛이 가슴속 깊이 번져왔습니다.
‘흔들려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나도 내가 닿아야 할 곳에 도착할 거야.’
시원한 물을 실컷 마신 코끼리와 철새는 강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5장.
어느새, 코끼리와 철새는 드넓은 초원에 이르렀습니다. 코끼리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습니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바람은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살랑이며 그의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발에 닿는 흙마저 따뜻하고 포근했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였지요.
저 멀리서 철새 떼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철새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코끼리에게 말했습니다.
“저기 내 친구들이야! 이제 나도 그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아.”
철새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코끼리야, 세상은 늘 많은 소리로 너를 흔들겠지만, 네가 따라야 할 길은 네 마음속에 있단다. 두려워 말고 원하는 길을 가. 넌 이미 그 힘을 지니고 있어. 그리고 그 길을 찾는 여정에 함께할 수 있어서 참 즐거웠어.”
코끼리가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더 즐거웠어. 나에게 용기를 주어서, 함께해 주어서, 자유를 되찾아 주어서 고마워.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우리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코끼리는 철새가 하늘 저 멀리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코를 흔들며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상처와 고통, 만남과 이별, 그 모든 시간이 결국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와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 깊은 등불로 남아 앞으로의 길을 밝혀주리라는 것을요.
저 멀리 다가오는 코끼리 떼를 바라보며,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