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짓눌릴 땐 주로 서점에 간다. 그날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어느날 400억의 빚을 진 남자⟫였다. 대기업에 다니며 평범한 삶을 살던 작가 유자와 쓰요시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도 직전의 회사와 400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되면서 16년간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다. 4억도 아니고 무려 400억. 책장을 덮는 순간, 이상하게도 용기가 생겼다. 그래, 나도 할 수 있겠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뭐든 가능하지 않겠나.
하지만 마음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살다 보면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바라는 날도 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날도 있다. 불안이 가시지 않을 땐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곁에 계신 부모님, 멀리 있어도 힘이 되어주는 동생과 친구들, 일상을 지탱해 주는 직장과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 그 소중함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작가는 맺음말에 이렇게 적었다.
“의지할 사람도 없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래도 내 인생을 잃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기도했던 그날의 나와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를 보며 절대 움직일 리 없다고,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움츠러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불가능할지 어떨지는 일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내 어깨를 조용히 토닥여 주는 듯한 말이었다.
언젠가 동생이 물었다. “20억이 생기면 뭐 할 거야?”
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고, 가끔 여행을 다니며, 내가 동경하는 조앤 K. 롤링처럼 책을 쓰고 싶다고. 사실 내가 바라는 건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인 여유였다.
장마가 지나고 여름이 깊어가는 요즘, 나는 만화책을 자주 읽는다. 좋은 만화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단숨에 읽었던 ⟪오디션⟫과 ⟪풀하우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는 ⟪피아노의 숲⟫, ⟪슬램덩크⟫, ⟪러프⟫에 빠져 있다. 어른이 되어 맥주나 하이볼을 곁들여 만화책을 읽는 순간은 묘하게 특별하다. 세상의 풍파를 겪고도 끝내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증표 같아서다.
어릴 적에는 만화책을 숨기느라 애를 많이 썼다. 피아노 뚜껑 속, 자물쇠를 채운 바이올린 케이스, 침대 매트리스 밑이 단골 은신처였다. 다 커서 엄마에게 왜 그토록 못 보게 했냐고 묻자,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마치 “그래서 잘 컸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원래 늦바람이 더 무서운 법인데 말이다.
만화책뿐만 아니라,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그 무게가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듯하다. 친구들은 종종 왜 그렇게 책을 읽느냐고 궁금해하곤 했다. 답은 간단했다. 좋아하니까.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시작은 어린 시절에 있다. 같은 그림책을 수십 번씩 읽어 달라 조르던 나 때문에, 엄마는 결국 전집에 딸려 온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셨다. 글자를 몰랐을 때는 그림만 바라보며 상상의 세계에 빠졌고, 글을 알게 된 뒤에는 도서관에서 내가 고른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설레었다. 첫 책거리 선물로 ‘따옥이 만화일기’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의 흥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작은 순간들이 쌓여 책은 내 일상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은 단순히 글을 담은 종이가 아니다. 종이를 넘길 때의 질감, 한 장 한 장 사각거리는 소리,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잉크와 종이 냄새까지 나를 설레게 한다. 책을 펼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목소리와 삶이 나를 기다린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걷는 길과 책 속 인물이 걷는 길이 포개지고,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이 스며든다.
무엇보다 책의 매력은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람은 보통 한 번의 인생만 살지만, 독자는 수천 번의 삶을 경험한다. 작가와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함께한다. 그렇게 다른 시대와 세계를 건너오며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다.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선물이다. 직접 겪지 않고도 실수를 우회하거나 만회할 기회를 건넨다. 고전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대의 경험과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정답 없는 인생 속에서도 어떤 길이 바람직한지 헤아려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늘 옳은 선택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은 세상을 이해하고 상상력을 넓히는 창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도, 책 한 권이면 내 삶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책은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한다.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은 내가 무엇을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면, 삶이 변한다. 때로는 즐거움을 위해서, 때로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삶을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