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엘(Noel, 2004)》에는 신앙을 잃어버린 신부 찰리 보이드가 등장한다. 그는 더 이상 신부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여주인공을 보며 신앙을 되찾고 눈을 감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천사 미카엘이 비로소 그 깨달음에 이르는 장면과 겹쳐졌다.
그런데 영화 속 신부는 왜 신앙을 잃었을까.
나는 왜 신앙을 잃었을까.
책을 읽다 문득 눈을 뗄 수 없었던 한 문장이 있었다. "신이 내 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 ]"
글쎄, 그 공백을 채우는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고난이 아니었을까.
내가 무언가를 겪고 있을 때, 기를 쓰고 버텨내고 있을 때,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는 어디 계셨나, 무엇을 하고 계셨나 묻고 싶어진다.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은혜였겠지' 알 것 같으면서도, 당장 눈앞에 넘어야 할 산이 다시 보이면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친다. '또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 건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는 답이 돌아올 것 같아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회의하게 된다. 그 대답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를 확인시켜 주는 덤덤한 통보처럼 느껴진다.
나 자신의 어려움보다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신음과 고난이다. 신앙의 선배들, 존경하는 이들이 겪는 처절한 시련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명예롭다 ‘는 생각 대신, '내가 가야 하는 길도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줄 서서 벌 맞을 차례를 기다릴 때, 제일 마지막 순서인 사람이 느끼는 공황 상태와 비슷하다. 벌을 맞기도 전에 앞사람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이미 기진맥진한다. 나보다 더 굳건했던 이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신은 정말 공평한가?'라는 의문이 비수가 되어 신앙을 찌른다. 이 고난이 결국 성숙의 과정이라는 지루한 진리가, 고통 그 자체의 압도적인 무게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내가 옴싹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모든 저항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결국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신앙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의 완전한 항복이다.
"당신이 이겼어요. 이제 마음대로 하세요."
체념과 방기, 모든 주도권을 내려놓는 이 순간의 고백이야말로 지금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최고치다. 찰리 보이드와 미카엘이 마침내 도달했던 그 평화로운 깨달음의 지점에 나는 아직 이르지 못했나 보다. 나는 아직도 이리저리 휘휘 나부끼는 갈대와 같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순간에야 비로소 무릎을 꿇는 이 역설적인 행위. 이 나약함과 체념 속에 진짜 신앙의 끈이 아주 가늘게 매달려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의 신앙은 영웅적인 고백이 아니라, 절망 속의 항복이라는 형태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혈기왕성했던 20대의 내가 보면 참 한심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한마디 해주고도 싶다.
“더 살아봐, 이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