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때가 3월 중순이었고, 우린 같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셨고, 잘 들어갔냔 안부 인사도 나눴어. 평소랑 똑같았다구. 그런데 다음 날 갑자기 눈이 막 내리더니 네가 산책을 해야겠대. 손바닥 만한 눈사람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사진도 받았거든.
난 네가 한참 걷다 들어가서 오랫동안 자는 줄 알았어. 연락 한 통 없더니 죽었다네. 이게 말이 되니?
걔는 그렇게 좋아하던 눈에 파묻혀 질식했다고 했다. 폐에 물이 반쯤이나 차 있었고, 발가락이 퍼렇게 얼어붙어 쌓인 눈 때문에 바둥거리지도 못했다고. 대충 그런 소리들을 했던 것 같다. 그 말을 하던 걔 엄마의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아니었나. 누구였지. 나보다 어른이었다. 그리고 너보다. 더 오래 산 사람. 그럼 그 사람 말이 맞겠지. 네 얼굴이 그 사람 얼굴에 겹쳐 네가 말하는 것인지, 네 엄마가 말하는 것인지, 아님 너를 닮은 또 다른 어른이 말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네 얼굴을 했으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
네가 눈을 안은 걸까, 눈이 널 안은 걸까. 난 아직 그렇게 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던 대로 죽은 네가 부러웠나. 조금 미웠다. 네가 왜?
화장실 문을 열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가끔은 변기 속에서도 날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얼마 안 가 거울 속 나의 눈구멍에 들어 있는 게 네 눈인지, 내 눈인지 구분하기를 그만뒀다. 다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생전의 넌 부르지 않으면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 시선 없이 대답할 때가 더 많았나, 가물가물하다. 그런 네 눈이 표면 너머로 나를 쳐다본다. 정확히는 네 눈을 단 내 얼굴을.
말을 걸어본 적은 없다. 그저 의식할 뿐이다. 뚫어져라 쳐다봤을 땐 눈이 시리기만 했다. 네가 내 눈에 깃들었나.
양구는 어깨를 한껏 움츠려 닭살 돋은 팔가죽을 슥슥 쓸며 걸어 다니는 애였다. 여름엔 작업복이라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해진 티를 입고 목을 벅벅 긁었다. 줄이 하나 떨어진 삼선 슬리퍼를 신고 걔가 죽은 그 공원에 머물렀다. 엉덩이 생긴 대로 까진 나무 벤치에 앉아서 살이 까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팔뚝을 쓸어내렸다.
내가 어디 있든 양구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엉덩이 자국 위나 그 반대편이나 아무 상관없단 듯이. 나라는 존재를 영영 무시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낼 기세로 말을 했다. 붙잡지 않는 기억은 흩날리는 법이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눈에 파묻혀 죽는 건 제 꿈이었어요. 그걸 걔가 이뤄서 화가 나요. 전 뺏긴 거나 다름없다고요.......
양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우둘투둘한 팔을 긁었다. 듣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당신 속살이 다 비친다 말한 이후론 그 옷을 한 번도 입지 않았으니까. 그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땐 그렇게 듣기 싫었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여름에, 그때 그 차림으로 10년은 더 산 육지 거북이처럼 목을 내밀곤 닭살이 돋은 팔을 버석한 손으로 쓸며 벤치를 찾았다. 그렇게 양구가 겨울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곧 두 번째 겨울이 다가올 터였다. 양구를 보낼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남아 있는 모든 이야기를 걸레 빨듯 짜내야 했다. 뇌를 긁어서라도, 언어를 막 배운 영아가 되어서라도 겨울을 담아낼 공간을 비워 두어야만 했다. 처음으로 친구가 보낸 야한 동영상을 본 이후 부모를 보기 무서워졌다라든지, 초등학생 때 절친과 싸운 이야기라든지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뒤죽박죽 섞다가도 당장 떠오른 단어를 참지 못하고 뱉었다.
그러면서도 내 눈 속에 그 애가 살아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아는 순간 사라질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나의 영원한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