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대축일의 응답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9)

by 어엿봄

+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빈 무덤을 보고도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고 성령을 받아야만 진정 부활을 깨닫고 살게 될 것이다.


사순의 시작, 재의 수요일의 초대는 화해였다. 나 자신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 과연 이 회심의 여정에서 나는 화해를 이뤄낼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따라 부활의 순간까지 왔다. 그분께서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생명을 얻은 그 몸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내가 살았다. 너는 치유되었고 다시 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음을 믿어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마음이 열렸다. 모든 것을 녹이고 위로하기에 충분한 한 마디였다. 내가 얼마나 변화했는지 당장은 알 수 없다. 애타게 기다린 치유와 화해였는데, 사실 얼마나 그 길에 다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나는 다시 살아내야 할 것이다. 다시 일상을 살면서 나의 지난 여정을 읽고 감상하며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때 내게 새겨진 주님의 얼굴이 선명해질 것이고 또 나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고생이 참 많았다. 마지막 성주간엔 정말 바쁘고 피곤해서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예수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짊어지고 가셨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겨우 바쁜 숨을 몰아내 쉴 때, 부활초에 불이 댕겨졌다. 주님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이 땅에 충만한 때가 왔다. 내 모든 상처에서 구원의 빛이 터져 나올 때가 왔다. 나는 나았고 살았고 구원을 받았다.


끊임없이 죄를 짓는 나였다. 나는 그의 가식적인 밝음이 부담스럽고 또 그의 무리한 요구가 싫고, 불편한 소통이 어려워서 툴툴대고 미워했다. 날카로운 한 마디로 그에게 생채기를 내거나 그 작은 아픔에서조차도 눈을 감아 못 본 체 하였다. 아니 나는 나의 참 얼굴을 하지 않고 꾸며진 얼굴로 그를 대하며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런 내가 다시 산단다. 이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역설의 신비가 놀랍기만 하다. 나의 가난한 마음에 그분의 부유함이 가득 차니, 그를 안아주기 좁기만 했던 나의 품이 드넓은 꽃밭과 같아진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한 꽃밭이다. 나의 죄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이 향기는 새로운 생명에서 번져 나온다. 그리하여 나는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그분의 사랑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죄들이 죽었으니, 스러져가는 나의 미움과 소원함에 나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 잘못들로 그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사실 주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니 그에게 가지려던 내 권위와 힘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나의 미움이 그리고 이 소원함이 그를 아프게 할 자격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내 안을 가득 채운 주님의 새 생명, 즉 사람을 살리는 그 힘만이 나를 다스리고 또 나로 하여금 그를 살릴 것이다.


작고 못생긴 내 손을 주님이 잡았다. 그분이 내게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였다.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돌보아 주고 싶다고, 그 아픔 다 털고 일어나게 힘을 주고 싶다고, 다시 살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주님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뜻을 이루셨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주님이 나를 그 하늘에 살게 하신다. 땅과 하늘이 함께 하는 삶, 어울림이 빛나게 아름다운 삶이 펼쳐진다.


바로, 지금 여기에 아름다운 삶이 있다. 주님이 얻어낸 내 삶의 아름다움이다. 나의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잊고 있었을 나의 본질 그 아름다움을 살 차례다. 나를 아끼고 또 너를 아껴 귀하디 귀한 존재로서 빛나는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낼 차례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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