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 메이지유신 3인

근대화와 문명개화

by 이민영

동양의 자유주의 전통은 근대 서양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도 하고, 서구의 식민지 침탈에 대항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생겨났다

근대 자유주의 역사는 일본에서부터 먼저 시작되었다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정이나 봉건제 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19세기까지 일본은 에도막부의 봉건적 통치가 지속되었다

1853년 미국의 소함대가 도쿄 앞바다에 출현했다

일본은 당시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네덜란드에게만 항구를 개방했고, 나가사키에 한정하였다

페리제독이 이끄는 증기선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대통령 친서를 전달한 한편, 함포사격으로 위협했다

결국 일본은 미국에 최혜국대우로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은 증기선이 시커먼 섬처럼 보였다고 해서 흑선이라고 했다

'흑선 두루마리'에 수록된 글에서는 페리제독을 일본 전설에 등장하는 덴구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덴구는 깊은 산골에 사는 요괴로, 벼락이 쳤을 대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개라고 한다

비주얼경제사 中에서

덴구는 보통 붉은 얼굴에 콧대가 높고 긴데, 페리의 모습과 비슷하며, 일본인들은 그를 재앙을 가져다줄 요괴처럼 여겼다고 할 수 있다

페리제독의 강제 개방으로,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비주얼경제사, 송병건. 아트박스 펴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1860년대에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봉건적 체제를 탈피하게 된다

사무라이들이 앞장서 에도막부를 종식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메이지 주역들은 하급무사 출신들로 왕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서구 국가들이 왕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왕의 권한을 규정했던 입헌군주제와는 좀 성격이 다르다

메이지유신은 봉건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고 일본에서 자유주의가 싹트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메이지유신 과정에서는 3명의 유명한 인사가 있다

메이지 공신들 중에는 유명한 인사들이 많고 각자 다른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가장 관심을 끄는 3인이 있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요시다 쇼인, 혁명의 중심세력을 구성한 사카모토 료마, 마지막 사무라이로 알려진 사이고 타카모리 세 사람을 메이지 3인방으로 꼽는다

물론 오쿠보 도시미치 등 많은 공신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3인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들은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로 소위 '공부하는 사무라이'들이었다고 한다

흔히 사무라이라고 하면 칼을 찬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사실 에도시대 지배층 사무라이들은 학문과 무도(武道)를 모두 중시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통일로 오랜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사회가 도래하자,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도입했다

주자학은 막부의 지배체제에도 도움이 되는 학문이 되었다

왕과 신하, 양민과 노예 등 확고한 신분사회를 지탱하는 통치철학을 제공한다

막부체제는 쇼군와 영주, 사무라이와 농민, 상인 등 철저한 신분사회로 유지되었다

주자학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충실하게 살라는 도덕기준을 제시한다

사무라이들은 주군에 대한 충성심,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유학과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은 유학 중에서도 양명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실용주의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했다

지행합일은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라는 말이다

사회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양명학이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쇼인

요시다 쇼인의 미국 밀항시도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할 당시 에도(도쿄)에 머무르고 있었다

페리는 전함 4척을 이끌고 와서 고압적 태도로 개항을 압박했다

그는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엄청난 규모의 증기선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서양의 문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외국을 직접 보고 배우지 않으면 일본은 망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목숨을 걸고 일본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페리 군함에 승선해 밀항을 시도하는 사건을 벌였다

페리는 그의 승선을 거부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옥살이를 하게 된다

페리제독은 밀항을 감행한 요시다쇼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렸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밀항사건으로 고향으로 압송되어 1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한다

그는 수감 생활 중에 작성한 '유수록'에서 일본의 해외팽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한 후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마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그의 주장은 훗날 정한론과 대동아공영권의 기초를 제공했고, 우리를 포함해 주변국들 사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시다쇼인의 근본사상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과 연결돼 있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같이 서양 열강에 당하지 않으려면 막부를 몰아내고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막부체제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봉건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전국의 사무라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요시다쇼인이 석방된 이후, 조슈번 자신의 집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설학원을 개설했다

조슈번은 지금의 야마구치현으로 일본의 서쪽 끝 쪽에 위치한 곳이다

학원은 약 3년 동안 밖에 운영되지 않았지만, 이 사설학당에 향후 메이지유신의 주축이 될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메이지혁명의 발원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가르쳤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교육과정도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제자들과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자유로운 토론, 제자들의 개성과 능력을 존중하는 맞춤식 교육은 지도자를 길러내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향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 최초의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정부의 중심인물 기도 다카요시, 막부타도의 주역이 된 다카스키 신사쿠 등이 있다

쇼카손주쿠 모습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요시다쇼인에 대한 다음과 평가하고 있다

"근대 이후로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한국에는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

일본에서 근대 국가로 이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최교수는 그에게는 도전 정신이 있었고, 도전이야말로 ‘초월’의 동력이라고 했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시다 쇼인은 29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지만, 그는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한국과 악연이 깊은 인물들도 많다

안중근의사에 암살당한 이토히로부미, 명성왕후를 시해한 배후로 알려진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청일전쟁 주역인 오오시마 요시마사 등이 손카손쥬쿠의 제자들이다

약 90명에 달하는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숀카손주쿠는 조선시대 후기에 존재했던 사원과도 비교된다

19세기 조선에도 유학을 공부하는 사원이 전국에 300여 개가 넘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과거급제와 관직이 목표였다

정쟁과 파벌싸움에 몰두한 결과 조선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잃었던 것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가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보다 료마를 좋아한다

손정의 회장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사카모토 료마를 지목했다

료마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중심 세력이었던 사쓰마번(가고시마)과 조슈번(야마구치)의 정치군사적 동맹을 중재한 인물이다

사쵸동맹이라고 불리는 비밀협약은 막부체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료마는 막부체제 이후 설립될 새로운 근대국가의 방향에 대해 8개 주요 정책으로 자신의 구상을 공포한다

그가 됴쿄로 가는 배안에서 8대 정책을 정구상해 제안했다고 해서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료마가 개화문명의 선구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유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서양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가 28세에 서양과 교섭을 벌이던 막부 관료를 암살하려 했던 적이 있다

1860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최초로 선박을 이끌고 태평양을 횡단한, 가쓰 가이슈의 집에 들어가 개화파를 처단하고자 했다

당시 가쓰 가이슈는 대표적인 개화파로 지목되었다
그는 암살하러 온 사카모토 료마에게 잠시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설득했고, 개화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반나절에 걸친 대화를 통해 가쓰 가이슈는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이 됐다

존왕양이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 사연이다


사카모토의 활동 중에서 사쵸동맹은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동맹이 성사되면서 막부가 천왕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대정봉환이 가능했다

원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사카모토 료마의 초상 (위키피디아)

2번에 걸쳐 사쓰마번이 조슈번을 공격함으로써 양쪽은 서로 앙숙이 되었다

향후 일본의 진로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사쓰마 번은 조정과 손을 잡아 막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이고, 조슈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급진파였다

이 두 번이 함께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서로 힘을 합치게 한 것은 사카모토 료마의 적극적인 중재노력 덕분이다

료마는 막부의 무능함이 일본사회의 공통된 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양측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협력하도록 설득했다

사쓰마번은 근대적 무기와 재정적 기반이 튼튼했다

조슈번은 훈련된 병사와 전투경험이 많았다

둘이 합치면 막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협력으로 얻은 성과는 양측 모두에게 공유되고, 새로운 정부에서 역할도 분담하자는 제안도 했다

1865년 료마는 사쓰마번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조슈번의 무기구입을 위해 사쓰마가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조슈번은 무기를 직접 구입할 수 없게 되자 사쓰마의 명의를 빌려 무기를 살 수 있게 했다

또 료마는 사쓰마번 사이고 다카모리의 요청을 받아, 이번에는 조슈번이 군량미 500 섬을 사쓰마번에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사쓰마번은 사자를 보내 군량미 지원에 대한 사의를 표했다

조슈번은 군함을 구입하는 자금을 지불하고, 군함소유 명의는 사쓰마번으로 하며, 운영은 공동으로 하자는 협력도 지속되었다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참여하여 이른바 사쵸동맹을 마무리하였다

메이지 혁명의 주력부대가 꾸려진 셈이다


1867년 료마는 도사번을 통해 대정봉환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하게 한다

'대정'은 '큰 정치' 또는 '국가 통치권'을 말하고, '봉환'은 '돌려준다'는 뜻이다

막부 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정치 체제로 전환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10월 13일 료마는 마지막 막부 통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토 쇼지로를 통해 대정봉환을 관철시킨다

그리고 다음날 대정봉환이 최종 결정됐다.

1867년 12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군대가 교토를 장악했고, 이듬해 1868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왕정복귀를 공식 선포했다.

왕정 복귀 이후 막부폐지를 추진하자, 마지막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에 반발해 저항했다

마지막 막부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대패하고 막부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사쵸동맹이 없었다면 메이지유신은 불가능했고, 두 번이 중심이 되어 사실상 메이지정부를 이끌고 갔다

료마의 가장 큰 성과 중의 또 하나는 그가 작성한 선상팔책(船上八策)이다

도쿄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며 정리한 메이지 정부의 핵심 정책들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정봉환으로 새 정부 설치

2. 상하의정국 설치

3. 인재등용과 관제 개혁

4. 외교 확대 및 공정한 규약 체결

5. 새로운 법령 제정

6. 해군 확장

7. 제국을 수비하는 어친병 설립

8. 금은의 시세를 외국과 균형을 맞추는 법 제정

위 8개 방책은 대체로 근대국가 체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 국가를 타도하고 왕정을 세워 중앙집권적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지방영주들이 지배하는 번체제를 폐지하고 번 대표들을 근대 국가체제로 흡수하려는 구상이다

해군의 확장으로 외국과 동등한 규약을 맺고자 한 것도 일본의 대외위상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선중팔책은 메이지유신 이후 신국가 8대 강령으로 구체화되어 현실화된다


일본의 근대국가로의 이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페번치현(廃藩置県)이다

막부가 번 체제로 다스리던 일본 전역을, 천왕이 통치하는 현 체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폐번치현은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번은 막부를 섬기며 각 지역의 영주가 다스리던 지역이다

번의 통치자 번주는 '다이묘'라고 불리는 영주들로 막부를 섬기며 살았다

폐번치현은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각 번은 현으로 재편됨과 동시에 다이묘는 그날로 면직되고 도쿄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백 년 동안 통치해 온 영지를 떠나는 다이묘들 가운데,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츠마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도 성을 떠났다

사무라이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다

폐번치현 과정에서 번주의 가문에게 과거 번 수입의 10%가 지급하기로 했고, 대신 번의 채무는 중앙정부가 인수했다

각 현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현령이 임명되었다.

일본 전역에서 각각 번을 그대로 현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전국에 3부(府) 302현이 존재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현들이 통합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이 이뤄진 후에 곧바로 암살되고 만다

교토의 오미야 여관에서 피살되었는데, 그를 암살한 세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료마는 메이지유신의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메이지정부에서 자신의 구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역사 인물 중에서 일본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영웅이 되었다



메이지유신 주역 중에 최후의 사무라이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유신의 주축이었던 사쓰마번의 하급무사 출신으로, 막부정부의 군대를 무너뜨린 사무라이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는 료마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재할 당시 사쵸동맹 협상의 주역으로 나서기도 했다

1867년 사쓰마와 조슈, 도사번이 중심이 되어 천왕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감행할 당시, 사쵸동맹이 이끄는 사령관이었다

막부의 군대를 무력화 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세우는 주역이 되었으며, 마지막 쇼군이었던 요시노부를 신정부로부터 배제시켜 막부를 폐지시키는데 앞장선다

이후 막부폐지에 불만을 품은 요시노부가 다시 한번 메이지정부와 무력으로 맞서는데, 사이코 다카모리가 참모총장을 맡아 이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쇼군 요시노부의 후원자들이 일으킨 여러 번의 군사적 반란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공훈을 세웠다

1871년에는 메이지 정부 참여하여 지방의 번을 폐지하고 중앙정부를 세우는데 앞장섰고, 새 정부의 근대 개혁정책을 이끌었다

사이코 다카모리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다 실각당하게 된다

그는 조선을 정복해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정한론을 내세웠다

일본의 개항 요구에 대한 조선 왕실의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조선을 징벌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정한론의 배경은 '폐도령(廢刀令)', '징병령' 등으로 누적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폐도령은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내려놓으라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사무라이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막부 토벌 전쟁에 만족하지 못하며 전투를 계속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났다고 한다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외부로 발산시키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오히로부미 등 당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정한론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직접 자신이 조선에 특별교섭대표로 가서 담판을 하고 죽을 것이며, 일본은 이를 명분 삼아 조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사절로 나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쟁을 곧바로 시작해서는 안 되고, 전쟁은 2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사절을 잡아 죽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때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죄를 토벌해야 한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깊은 전략입니다.

저를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전쟁으로 연결시키겠습니다.”

사이고의 진의는 사절로 나서 조선을 도발하고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의 핵심들은 대부분 해외 시찰단을 꾸려 서구문물을 직접 배우고자 외국에 나가 있었다

유명한 이와쿠라 사절단에 합류했던 그들은 사이고의 정한론을 전해 듣고서는 급거 귀국한다

사이고의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이 정한론에 반대했다

일본을 떠날 때 오쿠보는 사이고에게 중요한 정책들은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시행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고, 사이고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에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서둘러 귀국한 것이었다

조선침략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전쟁이라고 판단했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앞장서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사절 파견을 취소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후 사이고 다카모리는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에 의해 메이지 정부에서 실각당하게 된다

사이고의 죽마고우였던 오쿠보가 사무라이의 영웅에 맞서 정한론을 좌절시킨 것이다


정한론을 중단시킬 때 오쿠보 도시미치가 천황에게 올린 '오쿠보 도시미치 의견서'가 유명하다

일본의 당시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분석한 글이다

오쿠보는 제일 먼저 일본이 조선정벌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재정도 빈약하고, 산업시설도 취약하며, 해외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전쟁에 휘말려 빠져나오지 못하면 일본 내정이 불안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국제 정세도 냉철하게 분석하고 예측하였다

일본이 조선 정벌에 나서면 청나라와 러시아 등 주변국들이 간섭할 것이 분명하고, 서구 각국이 이를 구실로 삼아 반드시 개입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생존하려면 무익한 전쟁에 힘을 쓰기보다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정한론을 중단시킨 것은 메이지정부의 핵심인사들이었다

사이고는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저항이라고 불리는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을 일으키고, 사무라이들과 함께 사라지는 선택을 한다

사이고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무라이들이 뒤를 따라갔다

가고시마에 사립학교(군사학교)를 세우고 교육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는데,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사무라이들의 숫자가 약 2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부분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학생들은 메이지정부에 반감을 공유하고 있었고, 가고시마현은 마치 독립왕국처럼 되어 갔다

1877년 1월에 가고시마 사립학교 사무라이들이 정부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고 전쟁을 시작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마모토로 진격하는데 이때 합류한 숫자가 3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 사이고군대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지만, 정부 토벌군의 합세로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된다

사이고 군대는 가고시마로 퇴각하게 되고, 9월 24일에 정부군의 총공격으로 반란군 최후의 보루였던 시로산(城山)이 함락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장면

이때 사이고 다카모리는 부상을 입고 할복자살을 선택한다

최후의 사무라이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유명 배우 탐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라스트사무라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를 볼 수 있다

정부군에 맞서 사무라이들이 처절히 저항하지만, 결국 대포와 신식무기에 밀려 패하게 된다

사이고는 최후에 이르러서 할복을 결행하고, 그의 부하가 칼로 고통을 끝내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 근대국가로 이행과정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무라이들을 구해보려는 마지막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세이난 전쟁은 사무라이 시대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3대 메이지 영웅들은 충실한 천황의 신하가 되었고, 그들이 추구한 근대국가는 입헌군주제보다는 근대 왕정체제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자유주의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신분제가 철폐되, 고 사무라이와 농민, 상공인들의 계급적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모두가 천왕의 국민으로 통합되었으며, 시민적 평등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법제도가 도입되어 최초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생겨났다

왕정을 물리치고 국민대표들이 모여 법을 만들었던 서구 자유주의체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문명과 제도를 도입해 근대국가를 형성한 아시아 최초의 사례이다

메이지유신은 위로부터 국가를 개조하는 혁명이었기에, 근본적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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