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급진세력의 도전

자코뱅당과 공산당의 경험

by 이민영

서구의 근대 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혁명적 상황을 경험했다

절대 봉건왕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혁명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혁명은 한순간에 끝나지 않았고, 연속되는 혁명의 시기에서 급진주의에 대한 유혹이 있었다

급진적 정당이 나타나 권력을 잡으면, 혁명을 분열과 폭력적 대결사태로 이끌게 된다

프랑스혁명에서 자코뱅당의 출현, 유럽 '1848년 혁명'에서 공산당의 등장, 1871년 파리코뮨 등은 급진세력의 위험을 잘 보여주었다


프랑스혁명에서 최초의 급진주의 혁명세력이 출현했다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이어졌다

1793년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30대 초반에 새로 떠오른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공포정치로 혁명의 적들을 제거해 나갔고, 기요틴으로 불리는 단두대는 공포정치를 실행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단두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단두대 처형 그림(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년간 지속된 자코뱅당 통치기간 중에 처형된 사람들은 국왕 루이 16세를 포함해 약 1만 7천여 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결과 국민공회 내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던 지롱드파도 제거되었고, 급진세력 내 경쟁자였던 당통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1794년에는 아무런 증거 없이 혐의 의심만으로도 반혁명인사를 처형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다

‘프레리알22일법’ 또는 ‘공포정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법은 변호인 입회와 증인심문이 폐지되고, 선고는 무죄와 사형 두 가지에 불과하다

피고인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고, 판사는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가 되었다

혁명재판소는 불과 50일 동안에 137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코뱅당은 훗날 마르크스에 의해 ‘공산당의 원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민중이 왕이나 귀족들 없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유에는 미덕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는 미덕 없이는 자멸적인 혼란만 빚어질 뿐이다.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프랑스 민중은 아직 그런 미덕이 부족하다

공포를 통해 그들의 방종을 단속하고, 그들에게 미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또한 혼란을 틈타 곳곳에서 혁명을 뒤집으려 획책하는 사악한 반혁명 분자들을 철저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은 로베스피에르가 루이 16세 처형을 주장하면서 연설한 내용이다

“나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압제자들에 대해 완고합니다.

나는 민중을 학살하는 전제군주를 용서하는 인류애를 알지 못합니다....... 인권을 억압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일,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는 일, 그것은 야만입니다....... 폭군의 잔인함은 그저 잔인함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잔인함은 미덕입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 / 교양인 )


로베스피에로와 함께 급진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생 쥐스트이다

그는 빈곤이 혁명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사람들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적 자유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굶주린 민중들에게는 자유주의 체제와 공화국도 의미를 상실한다고 했다

젊은 혁명가 생쥐스트가 국민공회에서 행한 연설 내용이다

“행복하지 않은 인민에게는 조국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공화국을 세우기를 원한다면 인민들을 부패시키는 불확실과 빈곤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내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빈곤이 대혁명을 탄생시켰고 빈곤이 그걸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을 주장하는 연설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국왕에게 중간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군림하거나 죽어야 합니다.

왕을 적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심판해야 합니다

악의 없이 통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18세기가 고대 로마사회의 카이사르시대 보다 진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은 독재자 카이사르를 원로원 한복판에서 살해했습니다

어떤 형식도 필요 없었지요”

국민공회 의원들은 모두 일어나 생쥐스트에게 박수를 보냈다

혁명의 이름으로 국왕의 처형을 주장했고, 곧바로 루이 16세와 마리앙트와네트는 처형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막스 갈로 지음/ 민음사)


생쥐스트는 로베스피에르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공포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1793년 그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국민공회 의장이 되어 프랑스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그는 국민공회가 혁명의 근원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공회는 생쥐스트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공안위원회에 전시 비상조치권을 부여하면서 공포정치의 권력기관을 구성하게 된다

1794년 생 쥐스트 소위 ‘방토즈 법령’을 제안하고 국민공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방토즈 법령은 유죄를 선고받은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방토즈법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했고 생 쥐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폐기되었다

20세기 전체주의의 선구자는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오히려 생 쥐스트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코뱅당이 몰락하면서 생 쥐스트는 피에 굶주린 살인자로 격하되었다

그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로베스피에르 등 22여 명 역시 자신들이 만들었던 혁명재판소에서 똑같은 방식을 거쳐 처형이 결정되고,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급진혁명가들이 중요하게 내세운 것은 '혁명적 대의와 순수성'이다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모든 것을 혁명과 반혁명의 단순한 전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혁명정신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혁명 성공을 위해 가장 비타협적이고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인간은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금세 믿음으로 성장한다

사람들은 어쩌면 믿음을 창조하는 기계인지도 모른다

의미와 신념이 합쳐지면 못할 행동이 없어진다

순수한 목적을 위해 믿음이 창출한 폭력과 공격성도 정당화될 수 있다

급진정당의 행동은 거침없이 나아가게 된다


'1848년 혁명'과 공산당 출현


1848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독일지역에서 공산당이 출현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지 반세기 만에 유럽 전체가 혁명운동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이를 '1848년 혁명'이라고 한다

현대 유럽이 탄생한 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48년 유럽 여러 국가에서 혁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민의 봄’이라고 선언했고, 역사에는 ‘1848년 혁명’이라고 말한다

1년여 동안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지속되었고, 1849년 여름 유럽 전역의 혁명 세력은 참패했다

1848년 혁명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중부와 동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프랑스 2월 혁명은 독일지역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3월에 혁명봉기가 발생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재상이 실각하고 황제가 폐위되는 일이 발생했다

재상 메테르니히와 황제 페르디난트 1세도 군대를 동원했지만 진압에 실패한다

황제는 자유주의 체제를 약속해야 했고 재상은 실각해 망명하게 되었다

12월에는 황제 페르디난트 1세도 퇴위하게 된다

이탈리아 각지에서도 자유주의체제와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이 지속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 등에서 자유 정부를 원하는 지식인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 롬바르디아 등 각지에서 통일된 이탈리아를 위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난 원인은 서민들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있었다

1848년은 몇 년간 지속 돼온 ‘감자 흉작’으로 농민들은 심각한 식량위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감자가 저소득층의 주요 식량이 되어 있었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들여왔는데, 주로 농촌과 빈민층들에게 값싼 주식으로 보급되었다

유럽에서는 ‘감자 마름병’이 창궐해 몇 년째 감자흉작이 계속되고 있었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감자 마름병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피해가 심각해 농민들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영양부족으로 허약해진 신체에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시기에 숨진 인구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르고 전체인구의 10%에 이른다고 전한다

<송병건 비주얼경제사. 2015>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도시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일자리는 부족했으며, 임금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유럽 사람들의 경제적 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은 이런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나왔다

1848년 2월 발표된 <공산당 선언>에는 공산주의의 목표와 전략이 담겨 있다

공산당 선언의 시작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848년 당시 유럽에서는 각 나라나 도시의 반정부 세력에 대해, 해당 통치자들은 모두 공산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유럽의 공산주의자는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다양한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공산당의 목적을 밝히는 선언을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 역사는 1848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계급투쟁은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임을 분명히 했다

부르주아는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생산력 증가와 기술적 혁신들, 대항해와 세계시장의 창출 등은 부르주아 사회가 창출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모두 '금전관계'로 대체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파기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유들은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즉 ‘상거래의 자유’만이 남았다고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이 동일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뒤엎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처음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하는데 한정된다

그리고 민주주의 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는 결국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공산당의 10대 주요 정책내용도 발표되었다

토지 소유를 몰수하고, 고율의 누진세와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모든 망명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을 몰수한다

국가가 자본을 독점하며, 운송 수단과 공장을 국가가 소유한다

모든 사람은 노동의 의무를 부과하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없앤다

아동에 대한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아동노동을 금지하도록 했다

공산당의 최종 목표를 밝히고 당면하여 실행해야 할 주요 정책을 제시한 것이다


공산당선언 마지막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임무에 대해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의 단결과 협력을 위해 어디서나 애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에서 대해서도 말했다

‘공공연하게 자신의 입장과 의도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공산당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848년 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직후, ‘1848년 혁명’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독일 쾰른에서 마르크스 활동


1848년 혁명에서 독일지역 사람들이 처음 봉기한 곳은 바덴공국이었다

혁명의 물결은 바이에른 등 게르만족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프로이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를린에서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

학생, 노동자와 프로이센 경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졌다

5일간의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난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 헌법 제정과 제한적 참정권 도입을 포함한 개혁을 약속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축하 시위가 벌어지자 군대가 재차 투입되었고, 다시 전투가 벌어져 약 300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마침내 군대를 철수했다

1848년 베를린 (위키백과)

군대가 철수하면서 프로이센 수도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민군이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혁명세력이 정부를 세우게 되자, 1848년 3월 게르만족 대표 830여 명의 대의원들이 모여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독일 헌법 초안을 채택했는데, 헌법에서는 보통선거권, 의회 정부, 그리고 황제의 존재를 인정했다

독일 전체적으로 통일된 통화 및 관세 제도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통일 정부로 나아가지 못했다

각 지역정부의 내부 자치권을 인정했다


1848 혁명의 일부였던 독일혁명도 단기간에 실패로 끝났다

독일혁명의 실패는 혁명세력 내부의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분열로 시작되었다

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이 주도한 폭동은 중산층이 장악한 시민군대에 의해 (Bergerwehr) 진압되고 말았다

국민의회 역시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는데,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하지 못했다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분열된 혁명세력의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되찾는다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가 서로 분열하고 공격하는 사이에 11월 10일, 프로이센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하여 왕의 지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해산시켜 버리고, 의회 지도자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독일 혁명의 결말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급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크스이며 그리고 각국의 공산주의들을 지휘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쾰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1848년 혁명시기에는 마르크스와 독일 공산주의자 동맹이 노동자들의 시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활동은 ‘新라인신문’을 창간하고 기고문을 통해 공산주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新라인신문 : 민주주의의 기관’ (Neue Rheinische Zeitung: Organ der Demokratie)이 공식명칭이다

1848년 6월 1일 쾰른에서 창간하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마르크스가 편집장을 맡았다

‘민주주의 기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의회 민주주의의 수립이 아니라 진보적 소부르주아, 노동계급, 농민을 포함하는 혁명적 "민주 전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민중민주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新라인신문은 혁명 기간 동안 정치활동을 지휘한 공산주의자의 주요 근거지라고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신문 기고문에서 공산주의자의 임무와 활동에 대해 말했다

프로이센 정부가 추진하는 헌법제정의 한계를 지적하고, 단순히 헌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헌법은 종이 위의 글자일 뿐, 인민의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했다

1848년 혁명과정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왕정과 봉건귀족을 몰아내기 함께 싸워 승리했으나, 동맹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반동적 봉건세력에 맞서 싸울 때는 하나가 되었지만, 혁명 세력 내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했다

부르주아는 노동자와 농민의 기본 요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만을 앞세웠다고 비판하며,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를 강조하면서 ‘혁명은 민족 단위가 아니라 계급단위의 국제적 운동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독일 혁명은 단독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여러 국가와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1849년 혁명패배 직후 ‘新라인신문’이 프로이센 정부에 강제 폐간되었다

프로이센 정부는 신문폐간과 함께 마르크스에게 ‘24시간 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내렸다

新라인신문의 마지막호는 붉은 글씨로 발행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메시지는 '현재의 패배가 일시적이며.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새로운 혁명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무너졌으나 그 패배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승리를 본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1871년 파리코뮨 혁명정부


파리쿄뮨이 등장하기 이전의 유럽은 혁명의 역사였고, 파리코뮨의 시작은 1848년 2월 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왕정이 무너진 뒤에도 왕정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적 변혁의 시작은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몰락과 비참한 처지에서 싹텄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기인한다

열악한 근무 조건, 장시간 노동, 적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부유한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 계급 격차는 점점 확대되었다

전통적인 귀족들 역시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하고 있었지만, 농민들은 항상 가난하고 사회적 변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리고 왕정은 절대주의적 권한을 행사하며, 언론 검열과 대중 집회 제한 등의 조치로 유지되고 있었다


2월 혁명은 중산층과 노동자들이 선거권 확대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며 ‘개혁연회’라는 집회를 계기로 촉발되었다

정부는 집회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파리 곳곳에서 벌어졌다

첫 시위가 시작된 다음날, 군대가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은 파리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런데 루이필립왕은 시위발생 이틀 만에 영국으로 망명해 버리고 만다

2월 혁명으로 프랑스에 두 번째 공화국이 들어섰다

2월 혁명은 1848년 혁명을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자유주의체제와 민족국가가 등장하는 결정적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두 번째 들어선 공화국체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또다시 왕정체제로 돌아간다

루이필립 왕이 물러난 뒤,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가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권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프랑스 헌법은 4년 단임제였는데, 나폴레옹 3세는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하려고 입법부에 재선 출마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헌법을 개정하자는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의회가 거부입장을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10년 대통령제 헌법을 승인받았다.

1852년 나폴레옹 3세는 다시 한번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자신이 황제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인정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출범했고 프랑스 제2제국이 탄생했다

또다시 공화정이 폐지되고 왕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국민투표를 통해 나폴레옹 황제를 선택했고, 1870년 그가 폐위될 때까지 제2제국은 지속되었다

적어도 19세기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제도가 그다지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지 못했던 것 같다


파리코뮨은 나폴레옹 3세 통치가 끝난 직후, 파리에서 형성된 급진 혁명정부이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 3세는 전쟁 중에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히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왕정체제는 무너졌다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세 번째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870년 9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프로이센 군은 파리를 포위했고,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 방위군을 만들고 파리를 사수했다

새로 출범한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프로이센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너무나 굴욕적인 휴전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파리시민들의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당시 티에르 임시정부 행정관이 체결한 프로이센과의 강화조약을 국민의회가 비준했지만, 파리 시민은 이에 불복하여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한 프로이센 군은 파리 시민의 저항에 부딪혀 3일 만에 철수하고 만다


한편 프랑스 티에르정부는 파리 시민군대를 무장해제 하고자 했다

그들이 사용한 대포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몽마르트 언덕에 설치된 대포들을 압수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시민의용병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몽마르트에 대포를 설치하고 대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사실 당시 대포들은 시민들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돈을 거둬 사들인것이 대부분이었다

정부군 병사중 일부는 지휘관의 발포명령에 항명하며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하고, 또 일부는 국민방위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대치과정에서 시민군이 정부군 장군을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티에르 정부는 즉시 파리 외곽에 위치한 베르사이유로 퇴각했고, 파리시내는 사실상 파리시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정부가 공백이 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자치기구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한다

시민들이 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회가 주도하에 코뮨평의회 선거를 실시하여 85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

그리고 3월 28일 코뮨 평의회 의원과 시민들이 시청앞에 모여 자치정부인 '파리코뮨'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파리코뮌 바리케이트(앙드레 드 방베즈)

급진주의 권력 '파리코뮨'이 이렇게 탄생하였다

훗날 마르크스는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계급 권력'으로 평가했고, 사회주의 권력의 모태로 삼았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혁명가들이 참가한 좌파 정부를 구성했다

코뮨은 프랑스 삼색기 대신 붉은 깃발을 내세우고, 급진적 정책을 채택한다.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자본가들이 철수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할 수 있게 했다

야간 노동을 금지하고 특히 빵집 노동자들이 밤에 일할지 않도록 금지했다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임대료룰 유예하거나 취소하는 정책도 시행했다

귀족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나 집을 빈민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여성들의 차별을 해소하고, 정치적 활동을 보장했다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종교와 관련된 교육이나 공적인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노동자계급과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당시 귀족과 부르조아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3개월간 지속된 파리쿄뮨은 결국 정부군에 의해 진압돼 최후를 맞았다

5월 21일 정부와 코뮨의 협상이 결렬된 직후, 티에르는 군대를 동원해 파리를 탈환하라고 명령한다.

이른바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 The Bloody Week)이 시작되었다.

일주일간에 걸친 진압작전은 매우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코뮨은 거리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여러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5월 28일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파리코뮌은 프랑스 정부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약 20,000명의 코뮨 전사와 민간인이 사망하고 38,000명이 체포되었다.

코뮨이 몰락한 후 코뮌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있었으며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파리 코뮨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3개월 동안 파리를 장악하고 통치한 혁명 정부였다.

1848년 2월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주의 운동은 왕정으로 회귀하고, 급진적 파리코뮨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대격변을 여러 번 겪었다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 짧은 두 번의 공화국, 두 번의 황제 통치 등 일곱 번에 걸쳐 정치체제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혁명의 과정에서는 두 번에 걸친 급진 권력이 등장했고 결국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에는 산업혁명을 통해 부자가 된 부르주아계급이 중심이 되어 제3공화국을 수립한다

급진주의의 반작용으로 프랑스에서는 보수적 공화정체제가 들어섰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후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1940년까지 약 70년 동안 존속한 안정된 체제로 남게 되었다


자유주의체제는 혁명의 과정에서 급진적 정당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급진주의자들이 혁명에 충실하게 되는 순간, 반드시 반혁명에 대한 증오와 폭력성으로 분출되고 만다

극단적인 공포와 독재 이외에는 다른 통치방법이 없다

인간이 지어낸 의미와 신념이 극단적 대결을 불러오고, 좀처럼 신념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항상 급진주의 권력은 수많은 피와 희생을 치르고서야 끝을 볼 수 있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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