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취약한 자유주의

독재자와 절대권력의 등장

by 이민영

자유주의체제는 단단하지 못하고 취약하다

자유주의 체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두가 같은 권리를 갖고 살아가는 사회이다 보니,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혼란이 찾아올 수 있다

자유주의는 내부에서부터 생겨난 위험에 붕괴된 사례가 많았다

특히 혼란한 상황, 외부의 침략은 대중선동에 능한 독재자가 출현할 가능성을 높인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참주가 등장하는 과정, 로마공화정 몰락과정,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황제 등장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유주의 체제는 혼란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훌륭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상징조작이 통할 수 있고, 거짓말에 흥분하기도 쉽고, 집단을 만들어 극단적 대결에 들어가기도 한다

혼란이 장기화되면 사람들은 혼란을 수습할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싹튼다

이런 상황은 절대권력의 등장을 재촉한다

민주주의로 인한 혼란은 독재자의 폭압을 불러오고 권력을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체제에서 권위주의체제로 역행하는 방식이다


아테네 민주정 초기에 참주제로 넘어간 적이 있었다

솔론 개혁 정책이 단행되고 민주정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독재자가 쿠데타로 민주정을 폐지하고 ‘참주(tyrannos)’가 되었다

참주는 합법적인 권력을 얻는 대신 쿠데타나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획득한 독재자를 말한다

독재자는 대중에 인기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사람의 불만을 무마시킨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대중선동과 상징조작, 군사력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솔론의 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귀족들은 자신들만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불평했다

농민들은 빚 탕감과 함께 빼앗긴 토지를 찾기는 했으나, 스파르타 토지개혁처럼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 줄 것을 원했다

재산에 따라 계층을 나누고 참정권을 제한했던 금권정치에도 불만을 가졌다

솔론에 대한 비난과 불만이 커지자 그는 망명을 선택했고, 이후 아테네는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당시 아테네에는 세 개의 계층을 대변하는 정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오래된 귀족들의 ‘평원파’(Pedieis), 무역과 상업에 종사한 신흥 부자들의 ‘해안파’(Paralioi), 빈민층 중심의 ‘산악파’(Hyperakrioi)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산악파의 리더였고 산악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고, 그는 산악파 사람들을 규합하여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암살사건 조작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힌 뒤, 아고라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연설했다

자신의 정적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50명의 개인 호위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에게 호위대를 허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때 고령이 된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꾸미는 음모'라며 홀로 항거했다고 한다

BC 561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개인호위대를 동원하여 아크로폴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곧바로 참주제를 실행해 버린다

이때 빈민층 사람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한 반면, 귀족과 신흥부유층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저항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가 된 이후 6년 만에 권력에서 쫓겨나게 된다

평원파 귀족과 해안파 상인들이 힘을 합쳐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반격을 가해 아테네에서 내쫓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축출된 이후, 귀족들과 상인들은 곧 다시 분열하여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해안파 지도자 메가클레스는 비밀리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딸과 결혼한다면 다시 참주로 추대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이 내쫒았던 참주를 다시 끌어들인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에 동의하여 메가클레스와 합심하여 아테네에 귀환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페이시스토라토스는 황당한 상징조작을 실행한다

그는 ‘푸에’라고 하는 키가 굉장히 크고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를 이용하는데, 그녀를 완전무장한 아테나 여신(아테네 수호신)으로 분장시키고는 수레에 태워 아테네 시가지를 돌게 했다

"아테나 여신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며 소리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푸에와 함께 마차를 하고 아테네로 귀환했다

귀환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 (Pinterrest.com 게재)

시민들은 그녀가 정말 여신인 것으로 착각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다시 참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장 유치한 방법이 대중들에게 먹힌 상징조작이었다

당시 아테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엉뚱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클래스 혼인동맹을 통해 참주에 복귀하게 되었다

참주에 오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의 아내를 냉대하고 무시했고, 이로 인해 메가클래스와 갈등을 겪었다

혼인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다시 추방되는 신세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세 번째 등장은 군사력을 동원해 아테네에 입성하는 방식이었다

트라키아에 머물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광산개발로 군자금을 마련한 뒤, 용병을 고용하여 군사력을 키웠다

BC.546년 군사쿠데타로 세 번째 집권에 성공했으며 20여 년 동안 참주제를 시행하다가 죽었다

무려 50년 가까이 참주제가 지속되었다

추방과 복귀를 반복했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33년 동안 권좌에 머물렀고, 그의 아들 히피아스는 대를 이어 참주가 되었다

포악한 히피아스가 시민들의 봉기로 축출되고 난 후에서야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최초로 하층민의 인기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철저히 농민과 빈민층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굳건히 다졌다

정적이었던 일부 귀족들이 소유했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를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농민들에게는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를 살 수 있는 자금을 제공했다

도로 개량 공사, 신전 건립, 상수원 개발 등의 토목 공사를 진행했는데, 빈민을 위한 일종의 아테네판 ‘뉴딜 정책’이었다

영농 및 건설 공사에 필요한 자금은 세금을 통해 마련했다.

순회 재판 제도를 도입해서, 도시 밖에서도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참주제로 권력을 독점했지만, 각종 정책들은 하층민들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주력했다

인기정책은 강력한 권력기반을 다지는 도구가 되었다

대중적 열기를 뜨겁게 달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솔론의 개혁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지만 정치적 혼란을 초래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실현불가능한 포퓰리즘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탁월한 정치력을 가진 독재자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솔론을 각별히 대우하면서 상의했다고 한다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지도 않았고, 솔론이 세운 법들을 바꾸지 않고 기존의 체제를 유지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민중을 괴롭히지 않았고 아테네는 언제나 평화로웠다고 전한다

민주주의는 후퇴했지만 인기 있는 독재자의 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도 대중인기영합 정책과 대중선동을 통해 절대권력을 창출될 수 있었다


로마시대 공화정에서도 내부의 갈등과 혼란이 지속되다가 독재자가 등장했다

초기 로마공화정은 BC.1세기 무렵부터 서서히 몰락해 간다

결국 시저에 의해 공화정은 폐지되었고, 시저가 암살된 이후 옥타비우스가 초대 황제에 오르면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의 상호 존중과 균형에서 성립된 사회체제였다

두 계층의 상호 균형이 깨지면서 공화정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해 가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귀족과 평민들은 대등한 법률적 권리를 갖고 있었다

BC287년 호르텐시우스 독재관에 의해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에 의하면,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원로원의 인준 없이 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신분투쟁의 최종결과 귀족 '파트리키'와 평민 '플레브스' 두 계층은 대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귀족과 평민의 관계를 규정한 말이 있는데, 보호자라는 의미의 '파트로누스'와 피보호자라는 '클리엔스'가 있다

귀족은 평민의 보호자가 되었고,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의무를 다하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받아들였다

로마에는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존재했다

로마사람들은 인간사회에는 수많은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다

다양한 사람 관계는 이런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공존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귀족들 역시 사회적 공공의무를 다했는데, 공공사업에 드는 비용이나 공무원의 급료의 재원을 부유한 귀족의 기부를 통해 부담했다

현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천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행위나 후원사업 전통이 되었다

이러한 귀족과 평민들의 동등한 권리 및 두 계층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인해, 로마는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공화정 질서가 생겨났다


공화정의 토대가 무너진 것은 농민들의 경제적 몰락에 원인이 있다

오랜 전쟁이 평민을 위기로 몰아가고 결국 사회적 충돌로 이어진 것이다

이 시기 로마는 포에니전쟁과 동맹시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벌였고, 중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농토를 돌보지 못하면서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농민들이 전쟁에 참가한 뒤 고향에 돌아갔을 때에는 비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전쟁동안 농사를 돌볼 수 없었던 탓에 자신의 토지가 이미 귀족이나 부유층에게 빼앗긴 경우가 많았다

귀환한 평민들은 빚에 내몰리고, 급기야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가 빈민층이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해 국가는 팽창했지만, 로마는 귀족들의 토지 독점과 중소농들의 몰락으로 치닫는다

로마 귀족들은 평민들의 토지를 합병하고, 전쟁에서 획득한 공용 토지를 독점하면서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만들어 갔다

이 당시 대농장농업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가축사육이나 올리브 등의 상업작물을 생산하는데 주력한다

반면 중소농들은 먹고살기 위해 곡물을 심었는데 이로 인해 점점 농업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더욱더 대농장 규모를 더욱 크게 늘려나갔다

중소농이 몰락하고 숫자가 줄어들면서, 전쟁에 나갈 중보병 수가 줄어들었다

로마군대는 왜소해지고 더욱더 군인들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로마의 빈부격차 심화를 배경으로 그라쿠스 형제들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BC. 133년 호민관이 되어 토지개혁을 발표한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이었다

어머니 코넬리우스는 한니발을 꺾고 로마를 구한 스키피오의 둘째 딸이었다

그라쿠스 형제 흉상

티베리우스가 행한 연설에서, "짐승도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은 공기와 태양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는 시민 1인당 공공토지를 점유할 수 있는 한도를 일정규모(500유게라)이하로 정하고, 성인 자녀들의 몫을 포함하더라도 1천유게라 이상을 넘지 못하게 했다

1천유게라를 넘는 토지는 몰수하여 빈민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참고> 1유게라(iugera)는 고대 로마의 토지 면적 단위로, 약 2,521m² 또는 0.25헥타르에 해당함


원래 공공토지는 전쟁 등으러 획득한 것이므로 누구의 소유지도 아니고 국가 소유이다

귀족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한 개혁 조치였다

그러나 대농장을 경영하던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그들의 반발이 거셌다

호민관 티베리우스는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동려 3백명도 목숨을 잃었다

어떤 경우에도 신변이 보장되었던 호민관이 정적들에 의해 살해되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그의 암살로 토지개혁 시도는 좌초되고 만다

티베리우스가 살해된 지 10년 후, 그의 아우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다시 토지개혁을 시도한다

형과 똑같이 호민관의 자리에 오른 동생 가이우스는 형이 시행한 토지 법안과 곡물 배급 법안 등을 통과시키면서 다시 토지개혁의 불씨를 살린다

귀족들과 원로원은 크게 반발하고, 마침내 가이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공화정 최초로 발동된 비상사태 선포는 로마 원로원이 호민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로원은 집정관에게 가이우스를 재판 없이 죽여도 좋다는 내용을 승인한다

가이우스 추종세력들은 원로원의 결정에 저항하여 아벤티노 언덕에서 최후의 항전을 이어갔다

결국 집정관은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비정하게 학살했다

형에 이어 아우 가이우스도 제거되었고, 그의 동료 3천여 명이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라쿠스 형제들의 토지개혁 시도는 귀족들에 의해 무산되었고, 공화정은 혼란과 폭력으로 치닫게 된다

시민들의 경제적 몰락에 직면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중심이 된 원로원이 민회를 무시하게 되고, 공화정의 균형 원리는 깨져 버렸다

부의 독점과 권력 집중에 의해 로마 자유주의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파산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가 빈민층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들은 시민들의 의무인 중보병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점차 정치적 권리도 상실하게 되었다

로마시민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귀족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원로원과 민회의 대결은 이제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BC 1세기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최후의 대결이 벌어지는데, 마리우스와 술라의 전쟁이다

마리우스는 평민들을 대변하는 집정관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워 인기가 높았고, 각종 개혁을 진행했다

특히 마리우스 군사 제도 개혁은 로마군의 모집 방법을 지원제로 바꿨다

과거에는 갑옷과 투구 공격무기를 장착한 중보병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만이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시민들이라도 무산계급은 아예 군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빈민들이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당시 중소농들이 몰락해 빈민층이 늘어났고, 재산을 가진 남자들은 늙었거나 너무 어렸다

더 이상 전통적인 로마시민군들로 구성된 군단이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몰락한 시민들을 군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문제는 국가에 군사재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장군들이 우수한 병사를 고용하는 용병제 성격을 띠게 되었다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직업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장군과 휘하 군사들은 서로 보호하고 보호받는 관계가 되었다

장군은 보호자 '파트로네스'가 되고 병사는 보호받는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빈민들이 장군들의 도움으로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들은 직업군인이 되었고, 점차 장군과 군인들은 일종의 군벌로 변모하게 된다


마리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한 대표적 인물이 술라이다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재산을 축적하고 정계에 진출했으며, 마리우스 휘하에서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술라는 민회를 대변하는 마리우스와 결별하고 원로원파를 대변하는 정적으로 성장한다

BC89년 마리우스와 술라는 전쟁지휘권을 둘러싸고 충돌하였다

폰토스왕국의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이 발발하자, 원로원은 술라에게 6개 군단을 주고 참전시켰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술라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자신이 전쟁 지휘권을 얻고자 했다

마리우스는 호민관 술피키우스를 앞세워 민회에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킨다

민회는 술라의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한다

전장에서 로마 민회 결정을 전해 들은 술라는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법은 누구도 로마 시에 군대를 진군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이런 전통은 공화정 수립 이래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허나 술라의 군대는 사상 처음으로 로마로 진격해 마리우스를 진압하고 만다

마리우스는 노예들을 동원해 싸우게 했지만 검투사들은 술라의 정규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로마를 점령한 이후 그는 전쟁을 이끌 권한은 집정관 자신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원로원은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등 마리우스파 인물들에게 궐석재판을 열어 사형을 선고한다

마리우스는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겨우 아프리카로 피신할 수 있었다

술라는 민회나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라도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는 법안을 선포한다

로마에서 공화정의 기본 원칙이 깨졌다

민회와 원로원의 균형관계가 무너지고, 원로원 중심 체제로 이행한 것이다

얼마 후 로마로 진군했던 술라는 다시 주둔지로 돌아가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계속했는데, 술라가 없는 틈을 이용해 마리우스는 로마에 다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로마에서 집정관 시나와 그의 동료였던 옥타비우스 사이에 폭력 대결이 발생했고, 불리한 상황에 처한 시나가 아프리카에 있는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 헸다

마리우스는 시나가 군대를 징집할 수 있도록 도와서 로마로 진격했다

마리우스의 개선(티에폴로)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의 군대가 로마를 포위한 후 도시를 점령하게 된다

술라에 이어 마리우스도 군대를 동원해 로마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 역시 집정관 옥타비우스를 죽이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한편, 솔라를 무법자로 선포한다

전쟁터에 나간 술라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2차 로마진군을 개시한다

BC. 82년 마리우스와 시나가 죽은 다음 해에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를 다시 장악한 술라에게는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술라는 내전에서 승리하자 살생부를 만들어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

살생부에는 90명의 원로원 의원, 15명의 전직 집정관, 2,600명의 기사 계급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술라가 시저를 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살생부에 당시 18세의 젊은이 시저의 이름도 들어 있었지만, 부하들이 살려줄 것으로 요청해 구명해 주었다고 한다

술라는 시저를 살려주면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억하라. 그대들이 이토록 간절히 살려내고자 하는 이 젊은이가 언젠가는 우리가 진심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귀족 정치를 무너뜨릴 것이다. 카이사르 안에 여럿의 마리우스가 보인다”라고 평했다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

술라의 직관력이 대단했음을 전하는 일화이다

술라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었고, 호민관과 민회의 권한을 축소시켜 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장악한 원로원 중심의 지배구도를 만들었다

술라의 독재체제는 자신이 죽기 직전, 스스로 사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상호존중의 관례가 중단되고, 상대를 향한 무한공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로원과 민회는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대화와 타협은 없었고, 견제와 균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폭력대결로 치닫고 공화정의 전통은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자신들의 권한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게 되면 결국 충돌과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권력자는 현재의 권력에 당할 수밖에 없고, 정치는 미래 권력을 놓고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이후에는 장군과 군벌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결과로 인해 장군들과 사병들로 구성된 군벌들이 등장하였고, 이들 군벌들의 경쟁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율리어스 시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강력한 독재정치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시저가 왕정을 꾀한다며 브르투스에게 살해되지만, 그의 죽음도 공화정 몰락을 막지 못한다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잃었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던 사회체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제국주의로 팽창하게 되지만, 공화정 체제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근대 자유주의체제 등장 이후에도 국민들 스스로 절대왕정의 출현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급진적 공포정치를 겪었고, 엄청난 유혈사태와 혼란상황이 지속되다가 결국 왕정체제로 되돌아갔다

나폴레옹 황제의 등극은 국민들의 투표로 결정했다

프랑스 자유주의 체제 역시 나폴레옹 황제 치하에서 좌절을 맞았고, 형식적으로 입헌군주제를 띠고 있지만 새로운 형태의 절대권력체제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사라졌고 언론사는 모두 폐쇄되었다.

73개 달하던 언론사는 4개만 남겨두고 모두 문을 닫았고, 4개 언론사도 관제언론이 되었다.

나폴레옹 치하 경찰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감시하고 체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비밀경찰은 그의 반대자들을 추적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802년 나폴레옹은 급진주의자들이 폐지했던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를 부활시켰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탄생한 자유주의 원칙과 대의가 중대한 시련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중들의 선택은 늘 급진적 행동으로 치닫거나, 정반대로 절대권력을 선택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나폴레옹의 등장과정은 고대 로마시대 권력을 1인에 집중시킨 시저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다

나폴레옹과 시저 두 사람은 똑같이 젊은 시절 전장에서 전공을 세우고, 대중적 인기를 배경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하급 군인으로 출발해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른다는 공통점도 있다

1793년 나폴레옹은 툴롱전투에서 영국군과 왕당파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마침내 장군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1795년에는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파리폭동을 진압하면서 정부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다

다음 해 1796년, 프랑스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에 불과한 젊은 장군이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왕국의 연합군을 물리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성공을 발판으로 대중정치지도자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프랑스혁명의 전파자로 자임하고, '영웅 이미지' 상징조작으로 대중적 지지를 높였다

로마시대 평민에서 출발해 황제의 지위까지 접근했던 시저에 관심이 많았다

나폴레옹은 시저의 '갈리아연대기'를 최고의 병법서로 꼽았다

로마시대 '갈리아연대기'는 로마인들에게 최고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갈리아전쟁은 로마인들에게는 반란을 의미하지만, 프랑스의 조상 갈리아인에겐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조상 갈리아인들을 이끈 걸출한 장군 베르생제토릭스(Vercingetorix) 보다도, 정복자 시저에 더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배르생제토릭스는 카이사르에 패배해 로마에서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현대 프랑스에서는 베르생제토릭스를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프랑스 자유주의의 근원으로 삼고 있고,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그를 ‘첫 번째 레지스탕스’로 추대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전쟁 승리 이후 대대적인 영웅 이미지메이킹 작업을 진행한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정신의 전파자로 자임하며 정복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과 예술분야의 성과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진행된 이미지 조작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그는 한동안 밀라노에 머물렀는데, 그때 나폴레옹은 프랑스 화학자, 수학자들을 밀라노로 초청해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토론하는 모습을 현지 미술가들에게 화폭에 그리게 하여, 마치 나폴레옹이 군인이면서 학문에 정통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또한 이집트 원정 도중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는데, 이때 ‘야파의 전염병 희생자를 방문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앙투안 장그로 작)라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마치 예수가 흑사병환자를 멀리하지 않고 기적을 행사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자파를 방문한 나폴레옹 그림

실제 나폴레옹은 야파지역을 방문한 적도 없고, 흑사병 환자를 본 적도 없으며, 오히려 환자들을 독살해서라도 빨리 격리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언론 활용 능력에도 뛰어난 귀재였는데, 언론사에 전쟁소식을 담은 보고서와 성명서를 전달해 전 국민들에게 홍보했다.

연극과 책자들도 주요한 홍보수단으로 삼았다.

이미지 조작으로 얻은 대중 지지도 덕분에, 이집트 전쟁에서 패하고 난 이후에도 지지여론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는데 예술적 교양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좋은 재료가 되었다

예술이 교양의 상징이 되고, '선의를 가진 인격체'를 상징하는 장식품과도 같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정복하면서 예술품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약탈해 가기 시작했다

예술품 약탈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고, 광범위한 목록을 작성했으며, 위원회 위원들이 자신의 재량으로 작품을 취득할 권한을 갖게 하였다

위원회에는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고, 그들이 약탈에 앞장선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미술품을 놓고 파리에서 거대한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는 '자유와 예술 축제'의 이름으로 진행되었고, 프랑스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에 맞춰 열렸다

아탈리아에서 호송된 작품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라파엘로의 그림,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였던 타치아노와 베로네세의 대작, 고대 로마조각품과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은 파리에서 화려한 퍼레이드를 열어 공개했고, 이후 루브르박물관에 전시하게 하였다

파리 곳곳에서는 혁명정신을 기념하는 음악회와 연극 공연이 개최되었다

나폴레옹은 예술품이 단순한 전쟁승리의 전리품이 아니라, 프랑스혁명정신과 연결되고 있음을 부각했다

프랑스가 예술품들을 소유할 뿐 아니라 파리가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음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축제는 프랑스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나폴레옹의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전공을 거둔 군인이미지에서 도약해, 프랑스 국민적 영웅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혁명 수호와 혁명정신의 전파자로서 나폴레옹의 입지가 한층 높아졌다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로 당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집정정부의 제1집정관이 된다

3명의 집정관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입법부와 행정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대중적 인기를 배경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1802년 제1통령을 종신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헌법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후 1804년에는 종신집정관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투표를 실시해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쓰는 형식을 취했다

과거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의 업적과 노력으로 황제에 올랐음을 선포한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를 폐기시키고 황제체제를 부활시키는데 민주주의가 활용된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나폴레옹 왕정이 탄생하고, 프랑스혁명이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함께 나아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침략과 정복전쟁은 유럽 각지에서 자유주의자들의 투쟁으로 귀결된다

나폴레옹 전쟁은 혁명정신 전파를 앞세우고 있지만, 정복지에 세운 정부는 프랑스의 대리통치조직에 불과하고 꼭두각시 정부였다

이탈리아에서 치살피나공화국을 세우지만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위한 소위 괴뢰정부이다

네덜란드에 세운 바타비아공화국, 스위스에 세운 헬베티아 공화국도 마찬가지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점령하고서는 스페인왕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에 임명한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정치체제와 같은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지만,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대륙체제에 편입돼 프랑스 통제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스페인 각지에서는 나폴레옹 지배에 저항하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은 강압적 통치로 스페인 국민들을 다스릴 수밖에 없고, 자유주의 정신은 사라졌다

마침내 1813년 스페인은 비토리아전투에서 국왕 조제프의 군대를 물리치고,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럽 각지에서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출현하는데, ‘자유주의자’는 이들을 지칭한다

당시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정체성을 갖기보다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세력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일 지방에서는 해방 전쟁이(1813-1815) 일어났고, 자유주의 이상과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개혁을 진행했다.

스페인에서는 나폴레옹의 형이었던 국왕 조제프에 대한 저항으로 전국적인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카디스에 정부를 수립하고, "라 페파"로 알려진 1812년 자유주의 스페인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의회인 카디스 코르테스(Cadiz Cortes)를 창설했다.

헌법은 왕권을 제한하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주의체제를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도 까르보나리와 같은 비밀 조직이 프랑스에 대항하게 되었고, 그들 역시 이탈리아 통일과 같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으며, 입헌 정부와 시민 자유 등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리베랄레스'(자유주의자)로 불렸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혁명 사상과 민족주의를 전파한 것으로 얘기하지만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나폴레옹 집권은 프랑스혁명의 좌절을 의미하고, 전제정치와 대외 침략에 기반한 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지역에서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정치적 운동이 생겨났고, 이들이 추구하는 체제를 ‘자유주의’라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2023)


자유주의의 위기는 대중선동에 능한 독재자의 등장으로 초래된다

고대 아테네의 참주제, 로마 황제체제의 등장,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 황제 등장은 모두 자유주의를 해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자유주의체제의 취약성이 드러난 경우이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은 많다

대중선동을 배경으로 한 급진주의, 집단적 광기를 부추기는 민족주의, 다수의 폭정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혼란기에는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싹튼다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 이후에는 항상 결국 권력 집중과 억압체제를 만들어낸다.

정치적 억압은 반드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고, 다시 자유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이 생겨나기 마련인 것 같다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끝없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존재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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