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자유민권운동, 우애사상
일본 메이지 시대에 최초의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일본 일만원권에 그려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사람이다
미국과 유럽을 직접 방문하여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전파한 계몽가이며, 언론을 통해 대중을 각성시키고자 했던 언론인이었다
또한 게이오대학교를 세운 교육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학문의 권장'이라는 자신의 저서에 매우 쉽게 쓰여져 있다
이 책은 당시 3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3천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10명 중 1명은 이 책을 사서 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의 권장 첫 문장에서 그는 인간의 평등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석가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양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는데, 이 말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리라 본다"
사람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는 하느님이 정한 무슨 숙명 같은 게 있어서 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사람들의 노력, 배우려는 욕망과 의욕이 있느냐에 따라 신분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일본 봉건막부사회에서는 신분은 고정적이었으며 신분간 이동이 막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진보적 주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키치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한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권리는 타인에 의해 어떤 속박도 받지 않으며, 하나의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서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오직 자유를 주장하며 '자유의 한계'를 모른다면 그것은 방종과 타락으로 빠지는 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자유의 한계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자유의 범위를 한정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 사상에서 가장 본받아야 할 정신으로 '독립'이라고 했다
개인에게서의 독립심, 국가로서 자유독립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이고, 국가 간의 권리도 서로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강한 나라가 위력을 동원하여 무리한 압력을 가한다면 국가의 권리관계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임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일본이 서구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나라가 독립을 이루려면 국민들이 확고한 독립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공자의 유교적 정치의 문제점은 국민들을 무지몽매한 존재로 여긴 점이고, 뛰어난 정치가가 지배하면서 잘 이끌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배자가 주인이 되고 국민들은 식객으로 전락하는, 신분의 차이를 고착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특별히 일본인의 비굴한 태도를 지적하면서 일본인에게 유독 '독립심'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 상인들이 요코하마에서 무역협상을 할 때에 외국인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놀란다.
외국인들이 돈이 많은 것에 놀라고, 외국상사의 당당함에 놀라고, 외국 기선이 빠름에 놀란다.
외국인들의 무리한 요구에 일본상인들은 위세에 눌려 손해를 입고 수치를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이런 수치는 그 사람 혼자만의 손해나 수치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수치이다"
언론 출판물이 보여준 정부에 대한 비굴함에 대해서도 신랄한 표현으로 비난한다
"정부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면 무턱대고 마구 격찬하여 대서특필하는 것은 마치 윤락녀가 손님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과 꼭 닮았다.
정부를 받들어 모시기가 마치 하느님을 모시는 듯하고, 스스로 비하하기에는 마치 죄인과 같다"
후쿠자와는 자유주의 사상을 서양에서 배웠지만, 일본과 일본인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독립심'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를 제외하고 일본 자유주의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과 달리 그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채 민간부문에 서 있었고, 서구 자유주의 사상을 일본국민에게 전파하는데 주력했다
후쿠자와 역시 큐우슈우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봉건적 막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역시 유학을 익히며 성장했다
미국 페리의 무력시위로 강제로 개항된 이후 일본사회는 서구문명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쿠자와는 서양을 공부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 널리 퍼진 네덜란드 학문에 집중하였다
오사카에서 설립된 학교에서 네덜란드어와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1858년 그는 도쿄로 건너가 자신이 속한 나가츠번 출신 무사들에게 난학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맡게 되는데, 후쿠자와가 근무한 작은 학교는 나중에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의 모태가 된다
그 당시 그는 요코하마를 우연히 방문하게 됐는데, 자신이 공부한 네덜란드어가 외국인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서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외국인들이 주로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다시 영어공부에 몰두하여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다
이러한 서양에 대한 관심과 학습 덕분에 그는 서양을 직접 방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후쿠자와는 1860년 가쓰 가이슈의 신사유람단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문명을 체험하게 되었다
미국 체험과정에서 후쿠자와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한달간 머문 미국생활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서양의 발달된 도시문명이 아니라,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체제였다고 한다
미국사람들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가문’에 대해 관심도 없고 잘 알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누구라도 도쿠가와 가문과 그 후손들에 소상히 알고 있고, 그들이 권력자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서 워싱턴의 후손은 아무런 권력도 없고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후쿠자와의 두 번째 서양체험은 1862년 유럽방문이었다
도쿠카와 막부 사절단의 통역 수행원으로 임명돼, 함께 유럽에 파견된 것이었다
그는 유럽사회의 자유주의 체제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회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국회는 어떤 기관인지 국민대표를 뽑는 선거법은 알 수가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당파가 둘로 나뉘어 태평천하에서도 정치적인 싸움질을 하고, 더 놀라운 것은 적이었던 상대방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일본 무사들이 한번 칼을 뽑고 싸움을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문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는 며칠이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겨우 납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호기심이 서양의 사상과 사회체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그는 서양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만들어 일본에 소개하고,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을 주장한다
‘서양사정’은 무려 25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나중에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이 책을 상당히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말기 개화파들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후쿠자와와 개화파가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조선인 2명이 자신이 운영하는 게이오슈쿠에 유학 오면서부터이다
후쿠자와는 자신이 20년 전 서양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일을 떠올리면서, 조선인들을 자신의 학교에 받아들였다고 한다
후쿠자와는 김옥균, 어윤중, 박영효 등에게 조선의 근대화에 대해 설명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때 후쿠자와가 주장한 내용이 ‘문명개화론’이고, 이들이 개화파로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문명개화론은 사람의 정신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지 한 사람의 정신발전이 아니라 천하 대중 전체의 정신발전을 이루는 것임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후쿠자와는 대중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법으로 신문을 중시했다
그가 유길준과 박영효에게 조선에서 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에서 신문을 창간하도록 인쇄기술과 기술자를 지원하였다
후쿠자와는 조선사람들이 신문을 쉽게 보기 위해서는, 한문이 아니라 언문과 한문을 혼용하는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일본사람이 한글 사용을 강조하며 '국한문 혼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최초의 조선신문은 한성순보는 국한문 혼용이 아니라 한문신문으로 발간된다
민씨일가 등의 권력자들이 신문발간을 방해한 것이었다
순한글로 발간된 것은 나중에 1896년 독립협회가 발간한 독립신문이며, 이것이 최초의 한글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파의 후원자가 되었고, 개화파의 핵심 리더가 된 김옥균도 유키치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에 세 번 일본에 건너갔는데,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후쿠자와를 만났다.
일본에 건너가 체류했던 개화 승려 이동인을 통해 만남이 이뤄졌다고 한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 자금과 인력 등을 후원했고, 3일 천하로 끝나 일본으로 피신한 김옥균을 끝까지 지원했다고 한다
김옥균이 청나라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에는 후쿠자와는 자신의 집에 김옥균 위패를 안치하고 애도했으며, 김옥균의 처와 자식들을 찾아 돌보기도 하였다
개화파는 후쿠자와의 독립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고, 스스로 독립당을 만들었다
이 당시는 독립은 청나라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부터는 위안스카이에게 외교와 군사권을 넘겨주었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조선왕실과 조정은 스스로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자청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청나라에서 독립하여 일본을 모델로 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왜 조선의 개화파를 지지했을까?
일본 메이지정부는 천왕을 중심으로 점차 근대 국가체제를 구축해 가고 있던 시기였다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짓밟히고, 조선과 일본도 서구의 위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인식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아시아 3국이 함께 서구의 침탈에 공동 대응하면 각 나라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은 자력으로 서구와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찍 문명화된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문명화를 지원하고, 서로 협력하여 서양에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는 후쿠자와에게 큰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조선의 개화파 주역들과 약 600백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개화파들의 싹을 말린 것이다
특히 후쿠자와에게는 자신이 그토록 후원했던 사람들이 처참하게 처형되고,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멸문지화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그는 조선과 중국이 스스로 문명화될 수 있다는 기대를 접게 된다
후쿠자와는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나라와 어깨를 같이해야 한다는 '탈아론'을 제시하기 이른다
후쿠자와는 탈아론 주장으로 인해, 그가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서구 여러 나라들이 동아시아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근대화를 거부하고 봉건왕조 체제에 안주하는 조선과 중국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문명개화를 거부한 국가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일본은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서구와 같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국제 관계를) 도모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더불어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탈피하여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지나(支那, 청)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고, 바로 서양인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 (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 사설에서)
이웃나라 조선과 청나라의 문명개화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완전히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조 때문에 중국과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평등과 독립을 강조하였고,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언론과 학교를 중시한 사람이다
메이지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민간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근대적 시민권리 개념을 전파했다
그에게 강한 국가는 자율적인 개인들이 독립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그의 생각을 돌아보게 한다
메이지시대 또 하나의 자유주의 전통은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지혁명 이후 일본에서는 2가지 저항운동에 직면한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층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또 하나는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구성하자는 자유민권운동이다
메이지유신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고 천황을 옹립한 사무라이들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근대적 자유주의가 등장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헌법 제정과 국회 설치를 주도한 것은 자유민권운동이고, 이타가키 다이스케라는 인물이 주도했다고 한다
1874년 자유민권운동의 시작을 알린 사건은 1월 12일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중심이 된 애국공당(愛國公黨)의 창당이다
애국공당은 ‘통의권리(通義權利)’를 이념으로 삼았고 목표는 민선의원(民撰議院 즉 국회) 개설이었다.
통의권리는 ‘하늘이 인민에게 공평히 준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는 동양식 천부인권이었다
'통의(通義)'는 모두에게 통하는 이치를 뜻하며, 동양에서는 '자유'의 의미와 함께 '권리'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도 국민의 권리를 설명하면서 '자유'와 '통의'로 말했다
여기서 '자유'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소극적인 권리를 의미하고, '통의'는 자유와 더불어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라고 해석되고 있다
1월 17일에 이타가키 등 8명은 민선의원설립건백서(民撰議院設立建白書)를 태정관 좌원(左院)에 제출했다. 이들은 건백서를 통해 일부 인사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유사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민선의원을 개설할 것을 주장했다.
<참고>
건백서는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정식으로 제출하는 문서로, 주로 상소, 건의서, 보고서 등의 형태이다
조선말기 박영효도 개혁에 대한 건백서를 고종에게 올린 바 있다
건백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정권은, 위의 제실(帝室)도, 아래의 인민도 아닌, 오로지 관료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인민에게 참정권을 주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의사로 구성된 국회를 열라.
국회를 열어 천하의 세론에 기초한 정치를 시행하고, 국가의 융성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건백서를 계기로 의회제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학자들도 민선의회 설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건백서는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되지도 않고 기각되었다.
건백서가 기각되자 그는 고향으로 가서 '건백서'를 신문에 게재하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1875년 2월에 전국적인 조직인 애국사(愛國社)를 결성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본에서 자유주의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지만 당시 메이지정부는 천황 중심의 통치를 유지하려 했다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정부의 보수적 세력과 강하게 충돌하기 시작한다
1881년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던 이타가키 다이스케 총재를 중심으로 자유당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은 ‘자유를 확충하고 권리를 보전하며 행복을 증진하고 사회의 개량을 도모한다’,
‘선량한 입헌정체를 수립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삼았다
자유주의 태도를 지향하는 비교적 진보적 정당이었다.
1882년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지방에서 강연을 하던 도중 한 극우인사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유민권운동에 불만을 품은 인사가 이타다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타가키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구니사다 쥬로(国定九郎) 라는 청년이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이타가키를 찔렀다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으나, 이타가키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다행히 생명을 건졌지만, 그가 쓰러지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자유민권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자유민권운동이 확산되자 메이지 정부는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설치하는데 합의한다
1890년 당시 일본 정부를 이끌고 있었던 이토오히로부미는 자유민권운동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메이지 헌법과 제국의회를 수립했다
일본의 헌법은 서양의 입헌군주제와는 사뭇 달랐다
일본에서 국가 최고권력자는 천왕으로 규정되어 있고, 입법, 행정, 사법, 군사등 모든 권한이 천황에 집중되어 있었다
국민대표들로 구성된 제국의회는 상원(귀족원)과 하원(국민대표)으로 구성하고, 귀족원은 황실과 정부 고위층이 임명하였다
참정권도 제한했는데, 일정 재산을 소유한 남자들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했다
법률과 예산도 의회에서 심의하지만 천황의 재가 없이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제국의회 개설과 함께 내각을 구성했지만 천황이 신임해주어야 한다
일본은 입헌군주제 형태를 취하지만, 일본의회 권한은 극히 제한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지 한참 지난 1891년에서야 국민의 대표가 참여한 국회가 개설된다.
메이지정부의 주축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와 이토 히로부미 등이 주도권을 잡았고, 민권파의 공격을 피하며 천왕 중심의 정치를 계속해 갈 수 있었다.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은 이들 천왕중심세력들에게 밀려 비주류에 머물렀다
이후 일본은 천황 중심 국가가 되어 서구제국주의와 같은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20세기 중반에는 '우애사상'을 제기한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있었다
한 집안에서 수상을 두 번이나 배출한 하토야마 이치로(52,53,54대 총리대신) 가문이다
그의 우애사상은 프랑스혁명정신의 '박애'를 재해석한 것이다
박애정신이 잘못 번역된 것으로 보고 우애라는 개념으로 대체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권리에 관한 것이라면, 우애는 의무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자유는 여러 선언문에서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평등은 차별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법 앞에 평등하며,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계급과 신분 차별을 폐지시키는 것이다.
우애(또는 ‘형제애’)는 1795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고, 항상 자신이 원하는 선한 일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황금률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혁명 3대 이념 중의 하나인 연대 또는 우애(Fraternité)가 박애라는 표현된 것은 일본 근대 번역가들이 ‘Fraternit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잘못 번역된 결과이다.
이 오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지금까지 ‘박애‘로 받아들이고 있다.
‘Fraternité’은 종교에서 말하는 이타적인 개념의 '박애 또는 자비'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동지간 연대를 말하거나, 공동체 내부에서 계급적 차이를 초월한 연합을 뜻한다.
우애사상의 원류는 오스트리아 정치인 쿠텐호퍼 칼레르기가 처음 제기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현재 유럽통합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칼레르기의 ‘우애주의 사상’을 자민당 정권의 초대 수상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전파시켰다
쿠덴호프의 저서 (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 1936)를 번역하여 1952년 '자유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은 있었지만 우애를 위한 혁명이 없었다는 쿠덴호프의 말에 감명을 받아 '일본우애청년동지회'를 조직한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우애가 없는 자유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부르고, 우애가 없는 평등은 폭정을 부른다고 강조한다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바로 우애라며 ‘우애 정신’을 강조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박애'에 대한 심각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우애'는 공존과 상생의 원리로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인간의 기본권리와 함께, 자유에 뒤따르는 의무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실정치에서 상대방과의 차이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정치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애’의 개념을 한번 돌아보게 하면 어떨까 한다.
하토야마 이치로 손자 하마모토총리 역시 할아버지의 우애주의를 이어받았다
2009년 제1야당 민주당 대표로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단독 정당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민주당 집권은 9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인에겐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퇴임 뒤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만나는 등 한국을 자주 찾아왔다.
2015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방문해 그곳에서 숨진 순국선열 165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이 피해자가 그만두라 할 때까지 거듭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내세운 ‘우애’ 정치는 그의 할아버지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프랑스혁명정신 가운데 ‘우애’에서 가져왔고, ‘우애’로 바꿔 정치노선을 제시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조부의 사상을 계승하여, “우애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현재 하토야마 전 총리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사죄를 전제로,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
과거 군국주의에 기반한 ‘대동아 경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람에도 식민지 침략을 겪었던 이웃국가들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우애란 자립을 할 생각을 갖는 동시에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돕는 것”,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라고 한다
그는 “유럽이 EU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이 진심으로 사죄를 했기 때문”이라며 “모든 문제를 대화와 협조로 해결하는 우애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일본은 패권국가를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중견국가로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일본이 평화를 위한다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주변 국가와 우호관계를 쌓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 2019.6.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열린 ‘한반도의 신시대와 동아시아의 공생’ 강연 中>
실제 하마모토 총리는 우애 사상에 기초한 외교정책을 전개했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제안했고, 미국주도의 글로벌화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이었다
미국에 비판적 태도로 인해 당시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적이 있다
2006년 미국과 일본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현 안의 다른 기지로 옮기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정권교체로 집권한 민주당은 야당시절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현 밖이나 나라 밖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는 민주당 집권기간 내내 미일 간 외교적 갈등사안이 되었다
그리고 민주당은 얼마 되지 않아 자민당에게 다시 정권을 내주었다
하마모토의 우애주의 정책 실험도 거기에서 멈췄다
일본의 자유주의 전통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기 자유주의 사상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자유민권운동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메이지정부 보수파에 가로막혀 완전한 실현을 보지 못했지만 자유주의가 대중적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었다
20세기에 이르면 천왕 중심의 국가주의,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된다
자유주의는 크게 탄압받았고, 자유주의 언론인과 지식인들에 대한 검열과 투옥이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자유주의 부활은 일본제국주의의 패전 이후에서야 가능했다
일본 현대사회에서도 자유주의의 진로는 항상 국가주의, 전체주의 경향의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
일본사회에서 좌우 이념대결은 거의 없었으므로 우익세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과거 일본제국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국가주의적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독일에서 나치주의가 유행하듯이, 과거 일본 제국을 그리워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지금도 국가주의 향수를 자극하고 전체주의로 회귀하려는 성향이 많다
일본 자유주의에 닥친 현실 문제이고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