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중국의 자유 전통

by 이민영

중국에서 자유를 중시한 전통은 고대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간다

기원전 5세기 전후 중국에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한 제자백가 시대가 있었다

제자백가 시대는. 여러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다양한 사상과 학파가 경쟁을 펼친 시기이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 다양한 학파가 경쟁하였던 시기이다

그들 중 자유로운 삶을 중시한 사상을 꼽는다면 도가사상과 묵가사상이라고 본다


도가에서 노자의 이상국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고, 이상적인 통치체계는 '무위(無爲)의 치(治)'로 압축될 수 있다

소국 과민은 작은 땅에 적은 백성이 모여 사는 국가를 말한다

소국과민 사회에서는 전쟁의 비참함이 없고, 통치자의 폭정도 없고, 사람들이 과욕을 부리며 다투는 일도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거대한 도시 문명이 존재하기 이전의 소규모 부족국가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백성을 지배하려는 당시 제후들의 목표가, 세상의 모든 전쟁과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보았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소국과민을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았다.

노자의 도(道)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도에 눈을 뜨면 덕(德)을 지니게 되는데, 덕을 지닌 사람은 다스리지 않아도 모든 일을 이룬다고 하였다.

마치 순수 자연인에게 원래 이타주의적 본성이 새겨져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노자는 덕으로 다스리는 통치 방식을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했다

인간사회에서 자연의 순리가 실현되면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소국과민은 전란에 시달리던 인간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가혹한 통치가 없는, 소박한 삶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었고, 이후 동양의 이상 사회의 전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도가사상의 대가이었던 장자는 자유를 꿈꾸는 사상가였다

장자의 이야기에는 호방함이 있었고 통쾌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동양화 대붕 이미지

장자의 붕(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북쪽 바다에 큰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곤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덜미는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온몸에 한껏 힘을 주고 하늘을 나는데, 활짝 펼친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의 깊고 검푸른 바다는 '하늘 연못', 즉 천지(天池)다."

비둘기와 까마귀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 수 있으랴 할 때 나오는 붕이다


장자는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은 초나라 제왕으로부터 재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신은 희생제에 쓰는 소를 본 적 있는가?

그 소는 수년 동안 배불리 먹은 후 무늬 있는 옷을 입고 죽을 곳으로 끌려간다.

그 순간 소가 '차라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송아지가 되는 게 나을 것을'이라고 생각해도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국가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사마천, 사기)

진흙 속의 물고기로 살더라도 속박받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것이 장자의 자유인에 대한 정의였다

장자는 웅대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고, 관직이나 재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했다


전국시대 일반 대중에게 사랑받은 사상은 묵가였다고 한다

묵자의 핵심사상은 겸애(兼愛)와 ‘교상리(交相利)’는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겸애는 생소한 단어이고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다

겸애는 모든 인간에게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평등하게 제공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사회통치체제가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겸애는 박애와 자비와 같은 의미가 아니며, 서로 사랑하라는 정신적 감성적 의미가 아니다.

묵자 초상화

겸애를 말할 때 항상 ‘교상리(交相利)’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서로(相) 이롭게(利) 하는 관계(交)라는 뜻으로, 겸애는 상호 이익과 결부되는 개념이다.

겸애사상에서 말하는 리(利)는 경제적 이익, 물질적 이익을 말한다.

사람의 욕망과 욕구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을 보장해 주는 사회가 정상적인 통치체제라고 본 것이다

묵자가 바라본 세계관은 고대 중국의 천명사상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천명사상은 하느님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천자가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왕의 통치와 정통성을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

은나라, 주나라도 왕실의 정통성을 천명에 근거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천명사상은 더 이상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제자백가 사상에서도 과거의 천명은 부정되었고, 다만 모든 존재와 질서의 근원으로서 하늘(天)만이 남게 되었다

묵자 역시 천명 대신 하늘의 뜻이라는 천지(天志)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왕들보다 귀하고, 하늘의 뜻은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묵자는 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찍이 하늘이 천자에게 복을 주기를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나는 이것으로써 하늘이 천자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의로움(義)이라는 것은, 어리석고 천한 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귀하고도 지혜 있는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귀한 것인가? 하늘이 귀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것인가? 하늘이 지혜로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의로움(義)이란 하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의 원천은 하늘이고 의로움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천-천자-제후-백성의 수직적 구조는 의로움이 전달되는 체계이며,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천자를 자처하는 왕도 자기 마음대로 다스려서는 안 되며, 하늘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의로움이 정치의 근본이며, 수직적 신분 질서는 의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정이라고 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역정이라고 구분한다.

의정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빼앗지 않으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강탈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꽤 많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역정은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의정을 행하면 왕은 성왕(聖王)이 되고, 역정을 행하면 폭군이 된다고 구별한다.

<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사상가 / 임건순, 2013>


묵자는 인간은 동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하늘은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한다고 한다.

하늘은 온 천하를 두루 사랑하기에 만물을 길러 서로 이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일해야 살 수 있는 존재’, 노동하는 인간으로 보았고, 인간은 생산을 통해 정당한 몫을 배분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고 분업하며 살게 되고, 사회 체제는 분업과 협력,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사회통치체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보았다.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고, 똑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민중들의 욕구를 도출했으며, 사회체제를 하층민의 입장에서 규명한 것이다.

묵자가 바라본 세상의 기본질서도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여 통치하는 체제라고 말한다.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 나타난 춘추전국시대에는 도가나 묵가 등은 사회 체제로 현실화되지 못했고,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상으로만 존재했다

중국 고대 제왕들은 부국강병과 천하통일을 꿈꾸었기 때문에 인민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적을 무너뜨릴 무력과,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병법과 경제력이 중요했다

그리고 유교는 통일된 왕조가 들어선 이후 황제의 통치철학으로 자리 잡았고,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기간 유교이데올로기 영향 아래 살게 되었다


중국에 자유주의가 태동한 것은 근대 서양 문명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에 대한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 중국은 아편전쟁,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더 이상 제국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

서구 여러 나라의 각축장이 되었고, 먼저 근대국가가 된 일본에게도 뒤처지는 신세가 되었다


청나라의 굴욕은 아편전쟁의 패배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2차 아편전쟁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군대에 의해 베이징이 철저히 짓밟혔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청나라 왕실이 거주하던 원명원이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했고 불태워진 것이었다

중국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기억되고 있다

원명원은 청나라 황실의 별궁으로 자금성보다 10배 이상 광대한 왕실 정원이었고, 황제들이 정무를 보던 통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1709년 황제 강희제가 훗날 옹정제가 되는 아들 윤진에게 선물로 하사한 것을 시작으로, 옹정제와 건륭제가 대를 이어 확장한 것이었다

'원명'은 '널리 비추다'라는 뜻으로 강희제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원명원은 동서로 약 2.4㎞, 남북으로 약 1.9㎞ 펼쳐진 드넓은 공간에, 인공호수와 정원,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 서양식 건축물 등이 들어서 있었다

청 황실이 소장한 진귀한 보물, 도자기, 공예품이 전시돼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세계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원명원 유적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원명원 약탈은 고대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 비교되는 야만적 사건이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원명원 약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두 강도가 박물관을 부수고 물건을 약탈하고 그곳에 불을 지른 뒤 가방에 한가득 보물을 담아 손을 잡고 낄낄대며 나왔다. 한 강도의 이름은 영국이고, 다른 강도는 프랑스이다"

"언젠가 프랑스가 약탈한 것을 돌려주길 바란다"라고 했다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일부는 지금도 해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명원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폐허만 남아 있다

원명원 파괴는 “국치(國恥)”의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 국민에게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키고, 중국 근대화와 혁명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청일전쟁의 패배는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상징적 사건이다

서양 여러 나들은 청나라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그들은 매우 놀랐다고 전한다

청일전쟁은 이미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일본과 봉건왕조체제를 유지하는 청나라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한국인의 탄생'의 저자 함재봉 교수는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일본은 청나라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할 때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야당들도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 언론 전체가 전쟁에 찬성하였으며, 각 지방에서 전쟁에 자원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고 전한다

일본에서는 청나라를 시대에 역행하는 구태이고, 자신들은 진보의 전사로 보았다

기독교 사상가로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던 '우치무라 간조' 마저 '조선전쟁의 정당성'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전쟁을 옹호하였다

청일전쟁은 '진보가 동방의 법이 될 것인지, 시대에 역행하여 동양의 발목을 영원히 잡을 것인지를 정하는 싸움'으로 규정했다

일본의 승리는 동방에 '자유로운 정부, 종교와 교육의 자유, 교역의 자유'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진보의 투사이며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고, 국민을 교육하고 언론이 국민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청나라는 전쟁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랐다고 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전쟁할 의지가 없었고,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에 왜 희생되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청왕조는 봉건제 국가였고 청의 국민들은 정부와 국가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다"라고 한다

당시 청나라 북양함대의 미국인 고문이 당시 상황을 증언한 기록에서도,

"청일전쟁에서 이홍장이 홀로 전쟁을 하였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전쟁이 일어났는지 조차 몰랐다.

중국인들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일이 없고, 그저 그들의 주인이나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추종할 뿐이다"라고 전한다

<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中에서 >

조선과 요동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근대국가 일본과의 대결에서 완패하게 된다

청나라가 다시 한번 굴욕스런 결과를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좌절을 딛고 근대국가로 전환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00일간의 짧은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기에 '100일 천하, 무술정변'이라고도 칭한다

19세기 후반에 변법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국에 양무운동이 있었다

청나라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여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양무운동의 슬로건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다

봉건왕조의 핵심 제도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선진 기술과 군사 기술만을 받아들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구호이다

19세기 조선말기에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 동도서기(東道西紀)를 주장하는데, 중체서용과 똑같은 말이다 일본 메이지시대 개화론자들 중에서도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본의 정신(和魂)을 근간으로 하면서 서양의 지식과 기술(洋才)을 받아들이자는 내용이었다

동아시아 한중일에는 모두 봉건적 정신세계를 버리지 못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여 부강해지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양무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 일어난 변법운동은 서양의 기술뿐 아니라 정치제도를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캉유웨이(康有義)는 청나라 왕조를 개혁해 근대국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관심을 가졌고, 정치제도를 개혁하여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98년 무술년 4월 23일 광서제는 캉유웨이의 건의안을 받아들여 특별조치를 내리게 된다

소위 '무술변법'을 개시한 것이었다.

캉유웨이에 의해 추진된 ‘변법자강운동’은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서양 정치를 따라 국회를 만들고 헌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입헌군주제에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라, 광서제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염두에 두었다

일본의 메이지 주역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한 경험을 참고한 것이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서양 학교도 설립하였다


캉유웨이의 개혁은 청나라 광서제의 지지를 얻어 지속되다가 103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무술변법’이라고도 부르는 이 개혁시도는 청나라 실권자인 시태후에 의해 좌절되었다

시태후는 청왕조를 지지하는 수구세력을 끌어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광서제가 근대적 장비와 편제를 갖춘 신식 군대를 창설하고, 군 사령관에 임명했던 위안스카이가 배신하면서 권력은 시태후에게 다시 돌아갔다

광서제는 유폐되고 캉유웨이는 체포령이 떨어져 해외로 탈출해야 했다

변법자강운동은 청나라를 개혁해 보려고 시도였지만 실패로 끝난다

서구와 일본 등에서 진행된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개혁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근대 자유주의는 신해혁명을 통해 진행되고 중화민국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의 청나라에서는 한족이 피지배민족이었으며, 위안스카이의 군벌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서구 여러 나라들이 중국의 여러 지역을 분할 통치하고 있었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실은 외세의 침략에 무력한 존재였다

중국의 과제는 청나라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중화민국은 중국 최초의 자유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의 지도자는 쑨원(孫文)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에서 자라고 배운 경험이 그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쑨원은 미국 하와이와 홍콩에서 공부하면서 서양의 사회체제와 문화를 배우며 성장했다

그는 10대 때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학을 다녔고, 기독교와 서구 학문을 배웠다.

1884년 봄에는 홍콩에 있는 퀸즈 칼리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홍콩에서 서양인이 운영하는 의과 대학을 다녔고, 의사 면허도 취득했다

청년기 서양 교육과 경험이 그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쑨원의 최초 봉기는 청일전쟁 이후 광둥 봉기였다

1895년 하와이에서 현지 화교와 연합해 흥중회를 결성하는데 ‘중국을 회복하여 합중정부를 창립하자’는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가 되었다

이후 홍콩에 돌아와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실행 직전 당국에게 들키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쑨원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루하오동 등 동지들이 처형되었고, 자신은 수배 인물이 되어 일본과 서구를 떠돌기 시작했다

쑨원이 영국에 머물다가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에 의해 체포되었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1895년 당시 그는 청 정부의 수배를 피해 해외로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손문은 유럽 사상과 국제 정세를 학습하면서 혁명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쑨원은 청의 런던 공사관에 의해 납치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납치 위기에서 쑨원은 자시의 옛 스승에 도움을 요청했고, 곧바로 영국 외무부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쑨원의 안전을 우려하여 청나라 공사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쑨원은 석방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곧 영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쑨원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쑨원은 사건을 기술한 <런던 조난기>를 집필해 더욱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런던에 머물게 되면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은 쑨원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쑨원은 혁명에 뜻을 품은 망명가들과 연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하고 조직의 지도자로 뽑히게 되었다

일본 도쿄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한족의 애국지사, 공화주의자,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공동의 목표로 함께 뭉치게 했다

반청 반외세 단체였던 흥중회(興中會), 화흥회(華興會) 등도 동맹회로 합치게 되었다

조직의 목표는 청을 전복시키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며, 더불어 외국 열강을 추방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민족, 민주, 민생주의라는 삼민주의가 조직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일본 도쿄에서 쑨원 추종 세력이 크게 불어나자 청나라는 일본 당국에 쑨원을 추방하도록 압박하게 되었고, 결국 쑨원은 일본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중국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은 청에 저항하기 위한 단체들을 지속적으로 조직했고, 이 단체들이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지속적으로 봉기를 시도했다

신해혁명 전까지 광동성, 광시성, 윈난성 등 주로 중국남부에서 봉기를 실행했다

1907년 황강봉기는 쑨원과 혁명동맹회가 주도하여 청군과 황강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1907년 광시성 친저우 봉기, 광동성 후허 봉기, 1908년 광동성 신우 봉기, 1911년 광저우 봉기 등이 계속되었지만 청군에 밀려 패퇴하고 만다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혁명동맹회가 신해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신해혁명은 1911년 10월10일 우한봉기에서 촉발되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혁명의 시발점은 혁명군이 준비하던 폭팔물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다

당시 청왕조가 조직한 현대식 군대인 신군(新軍) 안에는 오히려 혁명동맹회 지지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봉기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폭팔사고로 청왕조에 발각된 봉기세력은 서둘러 청의 관청과 군사시설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군은 다음날 11일 우창에 군정부를 설립하여 리위안홍을 군정부 지도자로 선출하게 된다

우한에서 시작된 혁명파들의 봉기는 양쯔강 유역 전체로 번져갔다

14개성에서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한 달 만에 거의 모든 성이 호응을 해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1912년 1월 1일 건국 기념 달력

쑨원이 귀국해 12월 25일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4개 성에서 온 대의원들이 난징에서 그를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 추대한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공포했다.


그런데 쑨원은 돌연 통 큰 제안을 하며 위안스카이를 중화민국에 끌어들인다

위안스카이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다면, 쑨원은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고 자신의 대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이양해 줄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쑨원의 제안은 현실적으로 혁명군이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내란사태로 가면 이미 중국을 점령한 서구 국가들이 간섭하고 개입할 명분을 제공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위나 권력보다는 중국 국민의 안위를 중시했던 것 같다

쑨원의 제안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황실에 압력을 가해, 2월 12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위가 퇴위했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나라가 사라지게 되었다

쑨원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대총통에 올랐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 등극을 꿈꿨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1913년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선거 결과는 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국민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이 패배하고 말았다

선거에서 패배한 위안스카이는 선거결과에 승복하기보다는, 대신 공화정을 해체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선거 직후 3월 상하이 기차역에서 국민당 지도자 쑹자오런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국민당 총리 쑨원은 젊은 지도자 쑹자오런을 국민당 이사장 대리로 임명하였다.

쑹자오런은 의회를 강화하여 대총통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매수하기 위해 은행 수표장을 보냈으나 쑹자오런이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에 국무총리 자오빙쥔에게 쑹자오런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3월 20일 쑹자오런이 동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에 탑승하려고 하던 순간, 쑹자오런을 향한 총성이 울렸다.

쑹자오런은 수많은 동지들이 지켜본 가운데 복부에 총상을 입었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쑹자오런 암살은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전면전으로 맞서게 된다

결국 국민당은 위안스카이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2차 혁명을 진행하게 된다

1913년 계축년에 일어난 양측의 무력대결을 계축전쟁이라고 부른다

무장력에서 앞선 위안스카이가 발 빠른 대응으로 국민당의 혁명세력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1913년 11월에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의회를 해산해 버린다.

쑨원에게는 또다시 체포령이 떨어졌고, 다시 일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혁명은 이렇게 끝이 났다


위안스카이는 권력을 독점하고 새로운 황제를 꿈꿨다

1914년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황제 등극을 시도했으나, 중국내부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지 못한 채 병사하게 된다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중국 전역을 통제할 만한 중앙 권력이 사라졌다

10년간 중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10여 개의 군벌이 서로 물고 물리는 세력 다툼을 하는 군벌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광둥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남부의 다섯 군벌과 연합해 중화민국을 다시 세우려 했다.

허지만 예전의 강력한 동맹관계는 사라졌고, 베이징에 있던 중앙 정부는 북부 지방의 군벌 연합이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 유일의 합법 정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지만, 서구 열강은 쑨원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고 베이징의 중앙정부 지도자들을 상대했다

1922년 6월, 쑨원은 군벌에 의해 광저우에서도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다


1923년 쑨원은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한 소련의 도움으로 국민당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소련과 상호우호협력협정을 맺었는데, 소련은 쑨원에게 국민당의 광둥 복귀, 군대의 양성을 돕겠다고 했다

쑨원은 소련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당 입당을 허락해 주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내부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점차 중국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약이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으로 귀결된다

쑨원은 광둥에서 정치적 둥지를 틀고, 1924년 자체 군사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군관 학교의 교장은 모스크바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돌아온 37살의 젊은 장교 장제스가 맡았다.

국민당은 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으로 재정비되어 갔다.

쑨원은 2년 안에 베이징 군벌에게 공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 1925년 3월 쑨원은 간암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쑨원의 사상은 삼민주의, 민족, 민권, 민생으로 압축된다

민족은 중국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만주족 청왕조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한편, 중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여 나온 구호이며, 민족주의는 중국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선으로 계승되게 된다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번진 민족주의의 근간은 바로 중국의 삼민주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봉건왕조시대에는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갖기 힘들다

민중들은 왕조와 귀족들의 폭압과 수탈에 힘들었고, 서로 갈등과 대결하는 양 진영이 하나의 민족으로 단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나 민족의 개념도 없었고, 정부와 국민을 하나로 연결하는 아무런 매개체도 없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청왕조의 폐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서구열강의 침략이 중국 전체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했다


민권은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다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중국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쑨원이 서양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는 중국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서구의 입헌 공화제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쑨원은 3권 분립에 더해 2가지를 더해 5권 분립을 주장했는데, 감찰권(監察權)과 고시권(考試權)을 추가했다

감찰권은 정부관료의 행동과 정책을 감시하고 부패를 단속하는 권력을 따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했다

중국 고대의 어사대(御史臺)와 같은 전통적 제도를 접목시킨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의 감사원과 반부패기구와 유사한 발상이다

고시권은 공무원을 선발하고 시험을 관장하는 권력을 독립시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관료들을 선발하는 과거제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기 때문에, 관료를 중립적으로 선발하고 관리하는 권한을 독립시키고자 했다

정치권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구상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왕조나 군벌이 관료임용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타파해보고자 했다

사법권처럼 독립된 공무원 임용 기구를 설정한 것이다


민생은 자유주의체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었으므로 토지 재분배를 주장했다

"경작지는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내용은 훗날 중국공산당에 의해 계승된다

자본주의 폐해를 목격한 손문은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자본주의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초래한다고 보았는데, 그의 이런 관점은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자본가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면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들은 착취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보았다

그는 사유자본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가 직접 산업과 공공시설을 관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형태의 경제체제를 구상하였다


삼민주의는 중국 최초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쑨원의 사상은 중국이나 대만 모두에게 계승되어 양쪽 모두에게서 존경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쑨원을 혁명의 초기지도자로 존중하며 그를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구자'로 칭송한다

그의 민족적 관점과 민생주의는 중국 공산당 이념과 유사하며, 특히 민족독립과 반제국주의 기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노선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추앙받았다

쑨원이 국민당과 중국공산당과의 협력 관계를 성사시켜, 공산당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만의 중화민국에서는 쑨원을 '중화민국의 국부'로 불리며 칭송한다

중국 국민당의 창시자이고 중화민국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만은 삼민주의를 주요 정치적 기초로 삼아왔다

민족주의 견해는 대만이 중화민국의 정통 계승국가이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워 대만이 유일한 중국임을 강조하는데 활용되었다

민권주의는 대만의 자유주의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민생주의는 대만의 초기 경제발전과 사회적 평등을 추진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해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의 모토가 되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대만에서도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경우, 하나의 중국 원칙과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쑨원은 분명 근대 중국 역사에서 압도적으로 돋보이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중국의 자유주의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쑨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전통이 되어 이어지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쑨원의 자유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전통은 중국에서도 싹을 튀었고 오늘까지 흘러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자유주의 전통은 20세기 전반기의 제국주의 침탈과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좌절되었다

중국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족해방투쟁,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갔다

아직도 중국은 사회주의적 국가주의, 애국주의에 갇혀있고, 자유인의 길을 잃은 듯하다

중국은 세계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 독재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19세기 굴욕의 중국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대륙에서 패퇴한 중화민국은 대만에서 자유주의 체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대만이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현실은 중국의 민족주의가 낳은 폐해일지 모른다

하나의 민족 안에서 다른 국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민족주의 성향이 앞서고,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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