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간디의 자유와 화해

아힘사, 사티아그라하

by 이민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인 인도에서도 근대에 들어서며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인도인들의 투쟁이 있었다

인도인들의 투쟁을 지도한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인도의 정치사상가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이고, 그를 빼고 인도 사상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며, 인도 시인 싯달타가 그를 '마하트마'로 지칭하면서 일반화되었다

인도의 독립 투쟁의 현장에도, 종교적 갈등이 존재한 곳에 그가 늘 있었다

그는 독립 이후 종교적 분열을 막고 전체 인도의 통합과 화해를 추구하다 급진적 힌두교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간디는 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적 지배를 철폐하고자 했고,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인도는 2백여 년에 걸친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에 독립했다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었다


인도는 독립 후에 극심한 종교갈등을 거치면서 결국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였고, 그 후 3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날 간디는 수도 뉴델리에 없었고 인도의 동쪽 끝 콜카타에 가 있었다.

인도 전역이 독립의 기쁨을 누리던 날, 그는 어떤 독립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24시간 단식을 했다

인도 정부는 물론 언론들은 간디에게 '독립일 축하 메시지'를 요청했으나 아무런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

인도 주요 신문, 영국의 BBC기자 등이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답변은 없었다

간디는 독립을 축하할 마음이 아니었고, 눈앞에 벌어지는 유혈충돌사태로 인해 힘들어했다

인도는 독립했으나 곧바로 종교분쟁이 발생했고, 독립과 동시에 조국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힌두와 무슬림들은 끝없는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1946년 8월 16일 콜카타에 터진 유혈사태를 계기로 벵골전역으로 번졌다

유혈 충돌은 바로 옆에 있던 비하르주, 우타르프라데시주로 확산됐고, 인도 서쪽 펀자부주에서도 유혈사태가 확산되었다

간디가 콜카타로 간 이유도 종교 간 유혈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인도 독립일에는 서로 충돌하던 힌두와 무슬림들 모두가 거리에 나와 독립을 축하하며 어울렸다

모처럼만에 충돌이 중단된 날 간디는 광장에 나와서 연설했다

“오늘 보인 친목이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순간적인 충동에서가 아니길 믿고 싶다”라고 말했다

간디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독립일에 벵골은 이미 분할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였다

웨스트벵골은 인도, 벵골의 동부지방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 속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인도 서쪽 펀자부의 수도에서도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있었다

펀자부주 역시 분할되어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고 말았다


** 참고 '파키스탄'의 의미

1947년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펀잡과 동벵갈은 파키스탄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인더스강 유역 5개 지역 펀잡(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글자를 따와 PAKSTAN을 만들었다

'PAK'는 순수하고 신성하다는 의미이며, 'STAN'은 이슬람에서 국가를 의미한다



인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관습은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인의 종교는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은 헌법상 금지되어 있지만 아직도 계급적 차별이 사회생활 전반에 퍼져있다

간디의 삶에서 그의 성장과정과 종교 생활을 알지 못하면,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간디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 자서전을 출판한 바 있다

인도의 전통, 인도인의 의식은 그들의 종교 생활 속에 모두 결합돼 있었다


간디의 어린 시절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종교적 규율과 맹세에 대한 내용이다

간디가 태어난 고향은 힌두교도 중에서도 자이나교 전통이 강한 구자랏 지역이었다

정통 자이나교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영향이 강한 힌두교파였다

자이나교에서는 아힘사 즉 ‘불살생’의 교리는 가장 엄격한 원칙인데, 간디도 그런 전통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했다

간디 집안도 살생을 금할 뿐 아니라 육식을 하지 않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간디 자서전에 자신은 어린 시절 몰래 육식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채식만 허용된 집안 전통에 따라 육식을 하지 않았던 간디에게 어느 날 친구가 육식을 권유했다

그 친구는 육식을 하게 되면 힘이 나고 육체가 강해질 수 있으며, 영국인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인도를 지배할 수 있다면서 육식을 제안한 것이었다

간디는 친구 제안에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그 친구와 함께 가끔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간디는 육식을 하는 것이 부모를 속이는 짓이지만 자신이 대담해지고 강해지기 위해 규율을 어겼다고 했다

인도가 영국을 이겨서 자유롭게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계속 육식을 했다고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부모에게 비밀을 지키고 속이는 일 때문에 점점 수치심이 강해졌다

자신이 육식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간디는 부모에 대한 죄책감으로 육식을 중단했다

육식을 금하는 것이 엄격한 전통이고, 부모를 속이는 거짓말이 나이 어린 소년에게 큰 죄책감을 가져다주었다고 회고했다

종교적 계율을 어기거나 부모에 대한 거짓말이, 어린 소년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는 환경이었다

간디의 아힘사 즉 불살생에 대한 종교적 신념은 향후 사회운동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한 기초가 되었다


간디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채식과 함께 금욕을 맹세하게 된다

간디는 아내와 자식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30대 후반 남아프리카에서 아내와의 성적 관계마저 중단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그리고 이런 금욕 맹세를 혼자서 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금욕맹세를 공개적으로 밝혀서 다른사람들이 알게했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그가 젊었을 때 성적욕구를 참을 수 없었고, 정욕을 이기지 못한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간디는 14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아내에 대한 정욕에 집착했다

학교에서도 그녀를 생각했고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많이 아파서 집에 누워있게 되는 일이 생겼는데, 간디는 매일 간호를 하면서 아버지의 몸을 주무르고 곁을 지켰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삼촌이 집에 왔고, 삼촌이 아버지 곁을 지키겠다고 해서 자신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간 간디는 잠들어 있는 아내를 깨워서 사랑을 나눴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간디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동물적인 정욕이 나를 맹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는 이별의 고통은 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경험은 성적욕구에 대한 부정적 요인으로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에게서 성적 욕구를 제거하는 일은 누구도 참기 힘든 상황이고, 그럼에도 스스로 금욕맹세를 하고 평생 지켜갔다고 했다

간디는 1906년 아내와 금욕을 맹세하고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최종결심을 할 때 그는 정말 힘들었고, 자신의 정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금욕맹세는 브라만의 경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매일 맹세를 지킴으로써 하나의 위로이고 즐거움이 찾아오고 하루하루 아름다움이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금욕을 실행하면서 더욱 종교적 신성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욕이나 극기는 이상으로 머물지만, 금욕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욕심을 찾아내어 없애려고 끝없이 노력한다

생각을 완벽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통제하는 것이 금욕맹세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 안에 있는 신이 마음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최고의 목표이다

금욕을 실천하는데 이상적인 음식은 신선한 과일과 열매이며, 이것을 먹으면 정욕으로부터 벗어나고 해방감을 느꼈다"

금욕과 채식 맹세는 간디에게 단순한 생활 목표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의식으로 보인다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인내와 절제에서 그는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에게서 신은 동물적 본능도 자제시키고, 철저한 채식으로 몸을 정화시키며, 그럼으로써 해탈의 경지로 인도하다고 믿었다

인간의 의지로 자신의 몸이 명령하는 것을 거부하고, 신체와 결부된 마음과 감성마저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게 생각된다

간디의 맹세는 힌두교 전통에 뿌리내리고 충실하게 살아온 인도인의 생활과 종교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간디의 투쟁은 아힘사에 기초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고, 인도독립 투쟁에서 항상 내세운 원칙이다

그는 <비폭력(非暴力) 저항>에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손수 사용하고 있는 무기가 쓸모없음을 통절히 느끼고, 참된 구원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에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쳤다."

"힘사(暴力)가 동물의 법인 것처럼 아힘사(非暴力)는 인간의 법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보다 높은 법, 즉 사랑의 힘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간디는 인도가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비폭력은 인도의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인도가 그것을 포기한다면 인도는 나에게 있는 모든 자존심을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간디의 비폭력투쟁을 말하면 떠올리는 장면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이다

간디의 물레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이 물레질을 함으로써 영국의 면공업 제품을 거부했다

'간디의 물레'에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활동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 사상의 문화적,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간디는 물레질이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이었다

노동과 거기서 얻는 기쁨이 소박한 삶의 가치로 자리 잡는 과정이라고도 말했다

간디의 말 가운데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간디는 종교와 노동이 함께 존재하는 작은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유학했던 간디의 눈에, 서구 산업문명의 부정적 모습이 각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업문명이 인간을 더 탐욕적으로 만들고, 사람의 욕망이 산업사회의 지배, 착취구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도사회의 종교와 생활이 하나로 결합된 작은 공동체를 지향했던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간디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티아그라하’이다

아힘사와 함께 간디사상의 기본 축이 되었다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사티아’는 진실을 의미하고, ‘그라하’는 확고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티아그라하는 진실을 확고히 쥐고 나아가는 의미로 짐작할 수 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살던 시절, 영국에 저항하는 현지 인도인들의 투쟁을 명확히 하고자 '사티그라하'로 불렀다고 했다

인도인들의 독특한 투쟁방식을 인도 언어(구자라트어)로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를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비폭력노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시민들의 불족종 운동을 처음 제기한 것은 쏘로(1849년)이다


** 참고. 헨리 데이비드 쏘로의 비폭력 노선

시민 불복종을 통해 불의한 정부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는 불의한 법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함


물론 간디도 쏘로의 저서를 일고 감명받았으나, 사티아그라하는 자신이 소로를 접하기 전부터 이미 남아공에서 정립된 개념이라고 말했다

구자라트어로 ‘사티아그라하’는 ‘민중의 저항’이라는 점에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인도 사상을 전공한 강성용교수(서울대 철학과)는 사티아그라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간디가 살던 구자라트 지역은 자이나교 전통이 강한 곳으로, 간디는 자이나교 성향의 힌두교였다

자이나교에서는 종교적 맹세('브라따'라는 개념)를 중시한다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다섯 가지 중요한 ‘브라따’를 하는데, '아힘사와 사티아, 무소유와 금욕,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는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여기서 사티아가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자이나교가 추구하는 '진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에 대한 맹세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힌두교에서 수도승의 맹세 규율은 없어졌다

다만 일반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자신에게 내리는 제한조치로 변했다고 한다

단식이나 금욕생활, 육식을 금하고 채식하는 일 등은 모두 자신이 선택한 제한조치에 해당할 수 있다


간디는 이런 제한조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간디는 아내와의 금욕을 맹세하고 실행하면서, 이런 금욕 실천이 인도가 영국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에너지로 작용한다고 믿었다

외부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상식을 벗어난 황당한 인식으로 비칠 수 있다

가령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이유는 인도인들이 육식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1934년 인도 비하르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불가촉천민들을 차별한 것에 대해 신이 우리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강교수는 사티아그라하가 전통적 종교생활에 근거한다고 강조한다

"인도인들은 자신이 섬기고 있는 신들에게 맹세하면서 살아간다.

간디는 바로 이런 인도인들의 심성에 박혀있는 종교적 에너지를 끌어내 인도의 사회적 저항운동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진리는 사랑을 함축하고, 섬기는 것이 힘'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말로 정의한다.

진리와 사랑과 비폭력에서 나오는 힘은 강력하고, 단순히 수동적 저항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강성용의 ‘남아시아 인사이드’ 강연, 유튜브)


사티아그라하는 투쟁방식으로 폭력보다는 비폭력을 우선하고, 단지 협력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일종의 '맹세', 그리고 맹세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은 영화 ‘간디’에서 나오는 ‘소금투쟁’ 장면이다

소금은 필수적인 생활필수품 중 하나인데, 영국 식민 정부는 인도인들에게 소금 세금을 부과하여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인도에서 소금 생산을 독점하고 있는 영국정부는 인도인들이 개별적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을 금지했었다

그리고 소금세 부과는 인도인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간디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로 삼아 사티그라하로 맞선다

1930년 간디는 소금 행진을 시작했다

소금을 비싼 값으로 올리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직접 소금을 얻기 위한 행진을 시작했다

간디는 아흘리아 마을에서 시작하여 다르와르 해변까지 360㎞를 걸어간 후, 그곳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소금행진 모습

처음에는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출발했다

도중에 많은 마을을 지나며 주민들이 합류하게 되면서, 다르와르 해변에 도착할 무렵에는 수많은 인파가 합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은 유혈진압이었다

소금행진의 최종 목적지에 경찰부대를 집결시키고, 소금행진 대열에 대한 잔악한 진압을 개시하였다

영화에서 보여준 장면에서는, 경찰이 곤봉을 휘둘러 행진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치고, 머리에서 피가 튀어 흐르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다시 쓰러지며 곤봉에 맞서는 투쟁을 계속한다

소금행진에 나선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비폭력 투쟁노선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종교적 맹세와 서약에 있다고 말한다

사티아그라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맹세를 불러일으키고, 맹세를 실천할 용기를 주는 것이다

소금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신들에게 맹세를 하고 참가한 것이다

반드시 소금을 얻어 오겠다고 신에게 맹세한 사람들이 그 맹세를 저버릴 수 없고, 폭력도 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종교적 신념이 작용한 것이다

인도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도인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소금투쟁의 결과, 간디는 체포되었다

투쟁에 참여한 3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6만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세계 각지에 간디 소금투쟁이 알려지면서 간디 석방에 대한 탄원이 뒤따랐다

결국 1931년 소금세는 폐지되었고, 간디와 정치범들도 석방되었다


간디는 처음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권리투쟁의 과정에서 사티아그라하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고, 인도 독립운동과정에서 일관되게 실천했다고 했다

훗날 사티그라하 정신은 미국의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캠페인,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는 넬슨 만델라의 투쟁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간디는 종교적 신념을 중시하지만, 특정종교의 원리주의자와 같은 극단적 견해에는 반대했다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종교의 차이를 존중한다


간디는 신에 대한 맹세를 강조했지만 '맹세의 위험성'도 지적하고 있다

맹서와 서약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지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신에 대한 맹세가 전 세계에서 많은 싸움의 근원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맹세는 아무리 명확하게 규정해도 그 내용을 각자의 목적에 맞춰 왜곡한다는 점을 경계했다

"왕이나 부자들도 마찬가지이고, 가난한 사람이나 농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기심 때문에 눈이 멀고 애매한 말로 속이며 세상과 신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맹세의 황금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맹세에 대한 진실을 인정해야 하고, 맹세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면 약한 쪽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

두 가지 황금률이 거부되면 분쟁이 일어나고 진실하지 못한 불의가 생겨난다"

간디는 여기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도 독립 이후 간디는 끈질기게 힌두교와 무슬림의 화해를 위해 헌신하고, 통합된 인도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신념과 행동으로 인해 결국 '힌두교 극단주의자에 의한 암살'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힌두교 극단주의자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했다

간디는 뉴델리에서 열린 힌두교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암살범 나투람 고드세는 간디에게 다가가 권총으로 여러 발의 총격을 가했고, 간디는 숨을 거두었다

인도 분할에 반대하고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평화를 주장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힌두교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극단주의자들이 벌인 행동이다

영국정부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인도 자유인의 최후는 같은 민족, 같은 종교인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다


인도에서 간디는 '아힘사'와 ‘사티아그라하’로 자유인의 길을 걸어갔다

서구의 계몽사상과 시민혁명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인도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하여 자유를 갈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의회주의와 법률이라는 정치체제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에 따라 자신들이 희망한 것을 얻고자 했다

간디의 비폭력 투쟁 노선은 매우 독특하고, 또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비폭력투쟁노선은 강경한 폭력노선을 이기기 어렵다

비폭력노선 보다 폭력노선이 적에게 효율적으로 타격을 주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비폭력 평화주의보다 호응을 얻는다

그럼에도 인도에서 비폭력노선은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간디의 지도아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간디는 인도인의 훌륭한 가치들을 창출하고 실천했다

카스트의 계급차별에 반대했으며, 수많은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화해와 통합에 모든 노력을 바쳤다

간디의 사람에 대한 사랑은 특히 불가촉천민의 차별을 철폐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카스트제도가 인도 사회의 통합과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간디는 전통적인 공동체사회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산업화와 문명이 결국 침략과 억압으로 이어진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인도의 자유는 인도인의 공동체와 전통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새로운 독립국가건설의 길은 간디의 후계자 네루 초대 수상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간디는 생전에 네루를 자신의 후계자로 신뢰했고, '정치적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간디는 젊은 지도자 네루가 현대사회에 맞는 지도자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네루에 맡겨진 인도사회는 인도헌법에 의해 구체화된다

인도헌법에 의해 규정된 인도사회의 특징은, 민주주의 체제와 사회주의적 경제, 세속주의와 연방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네루는 대외적으로 냉전시대의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주의'를 표방한다

간디의 '마을 공동체'와 달리 네루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 경제 모델이 가미된 형태를 띠게 된다

농촌의 종교공동체가 아니라, 현대적인 공장과 사회인프라를 갖춘 산업화된 사회를 지향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경제적 성과를 거둔 소련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선택한 결과는 현재 인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사회의 특징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세속주의'이다

세속주의는 헌법에 명시돼 있고, 인도사회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세속주의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국가는 특정 종교를 지지하거나 국가종교로 삼지 않으며,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이다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고,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도 보장받는 것이다

독립 이후 극심한 종교갈등을 겪은 인도가 선택한 중요한 원칙이다

80%에 육박하는 힌두교, 극심한 종교갈등을 겪었던 무슬림, 시크교와 기독교 등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선택한 원칙이다

그러나 인도사회에서는 극심한 종교적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고, 종교적 열정과 감정을 폭발시키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특정 종교와 이념에 몰두하게 되면, 가공된 어떤 가치에 최상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것을 마치 정의와 심판의 기준으로 삼아버린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원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관습이나 전통의식이 많다

인도 사람들을 잘 알아가기는 어렵지만, 인도에서 간디의 자유주의 전통은 살아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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