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사상, 노예제, 사대주의
우리 역사에서 자유주의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역사상 수많은 민란과 저항이 있었지만 근대 자유주의와 연결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시대 이래 왕조 정치가 지속돼 왔고, 왕실이 불교와 유교를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나라 전체에 퍼져 있었다
조선은 유교사상과 종법제도가 유일한 통치이념이 되었다
최초로 자유주의 사상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조선말에 이르러 서양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태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선을 근대국가로 변모시키려 했던 개화파의 등장이다
이들이 개혁하려 했던 조선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조선사회는 어떤 나라였기에 근대 자유주의자들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는가?
조선은 주자학의 원리를 도입하여 세운 나라였다
조선시대 주자학은 고려시대까지 살아온 생활 풍습과 의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가 되었고,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조선의 이념과 관습은 오늘날에 까지 우리 의식과 관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후기 근대 서구문명이 발생하던 때에 조선의 대외정책은 철저한 쇄국과 고립의 길을 선택했다
흔히 조선을 '은둔의 나라'라고 했다
고립되고 단절된 외딴섬과도 같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은둔의 나라'를 순수함을 간직한 나라로 해석하려 하지만, 조선은 그리 훌륭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조선을 보고 기록한 사실들을 보면 마치 '헬조선'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개화사상이 출현한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주자학을 도입하여 개조된 나라였다
주자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정착시킨 이는 세종이었다
세종이 조선을 개혁하면서 모범으로 삼은 나라는 중국의 남송이었다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을 따라 행동하는 상황을 표현한 속담이다
제비가 따뜻하고 풍요로운 강남을 찾아 떠날 때, 제비가 함께 따라간다는 것을 보고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강남'은 중국 양쯔강 남쪽의 따뜻한 지역(江南, 강남)이고, 남송을 지칭한다
남송은 12세기 초 금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한 송나라 후예들이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하여 세운 남쪽의 송나라 정권을 말한다
양쯔강의 기름진 농토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잉여생산물을 교역하는 상업이 크게 번성했었다
세종은 남송의 농업방식과 통치이념을 통째로 들여와 조선을 개혁하기로 한 것이다
남송은 이미 원나라에 멸망했고 중국에서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권력이 교체되었음에도, 2백 년 전 남송을 발전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세종은 생산력의 원동력인 강남농법에 주목하였다
강남농법에는 모판에 벼를 길러 모내기하는 이앙법, 이모작 농사 등이 포함된다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 기술, 철기 농기구 등의 도움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세종은 강남농법과 함께 남송의 통치이념 주자학에 주목하였다
남송의 번성은 주자의 성리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고, 주자학 원리에 맞춰 조선을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것이다
세종과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고려는 각 지역의 호족과 협력하여 통치하던 국가였다
조선은 태조가 고려왕실을 멸망시키고 탄생한 권력이며, 태종이 창업 공신 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벌인 뒤에는 왕중심의 나라체제가 들어섰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를 가장 중시하는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5백 년은 주자의 나라가 되었고, 어떤 종교와 학문도 허용치 않는 이념집단이 다스리는 사회가 되었다
세종은 제일 먼저 여자중심사회에서 남자중심사회로 바꾸고자 했다
조선 이전에는 여성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유교 원리에 따라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로 바꾸기 시작했다
태종의 정적 숙청과정을 보면 숙청 대상이 왕의 처가 또는 외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태종이 제일 먼저 공격 대상으로 삼은 대상은 모두 왕후 집안이었다
아버지 태조의 왕비였던 신덕왕후, 처가인 원경왕후의 민 씨 형제,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 등 모두 왕후들의 집안이었다
조선건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민무구 민무질 등 4명의 처남들이 먼저 제거되었다
태종의 아들들이 외가에서 자라서 처남들과 혈육의 정이 깊었고, 왕실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태종은 세종을 보위에 올린 뒤 곧바로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을 역모로 몰아 처형한다
심온을 사은사로 삼아 중국에 보낸 뒤, 그가 귀국하는 도중에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한 다음, 역모죄로 몰아 자결하라는 명을 내려 죽게 하였다
태종이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 씨 가문을 없애려고 꾸민 역모사건을 빌미로 삼았다
처가와 외가 등이 가족관계의 중심이 되었던 당시 사회 풍속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당시에는 혼인도 여자집안이 주관하여 진행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를 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남자가 장인 집에 들어가는 것이 장가이고, 여자가 시댁에 들어가는 것을 시집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남자들은 풍족한 처가에 사는 것은 행운이 될 수 있었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외가에서 길러졌다
어렸을 때에 외가에서 이모와 외삼촌들과 살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당연히 외갓집 소속감이 크다
유교가 추구하는 남자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세종은 남자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먼저 결혼제도를 남성중심으로 바꾸는 일에 집중하였다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시집을 가는 결혼제도를 강요하기 시작한다
이를 ‘친영’(親迎) 제도라고 부른다
세종과 김종서의 대화록을 보면 당시 조선에서는 여성중심의 가족제도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친영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는지를 물었고, 이에 김종서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 혼례를 치르는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집으로 들어간다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와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마련해야 하므로 부담이 큽니다.
남자집이 부자라면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남자 집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것을 꺼려왔습니다”라고 답한다
신부집으로 남자가 들어가면 몸만 들어가면 되는데, 신부가 시댁에 들어가게 되면 혼수를 마련해야 할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김종서는 세종에게 유교식 친영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왕이 직접 친영제를 실행하면 점차 확산될 것이라고 전한다
세종은 김종서의 건의에 따라, 자신의 이복동생 공주를 양반가에 시집을 보내는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이일을 계기로 여자가 시집가는 풍습이 확산되지만, 조선시대 중반기 중종에 이르러야 이러 결혼제도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유학자 이율곡도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인 강릉 오죽헌에서 자랐고, 외가에서 어머니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조선중기 때까지 이런 풍습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함재봉의 '한국사람 만들기' 中에서 >
남자가 결혼해 일정기간 여자집에서 살아가는 혼인제도를 서류부가 혼(壻留婦家婚)이라고 불렀다
사위가 처가에서 머무르는 혼인이라는 뜻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곳도 외가였고, 여성들이 부모를 모시는 책임을 떠안았다
남자는 일정기간 처가에 지내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이혼이 매우 흔한 일이어서 혼자 집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부모의 재산을 상속할 때에는 여자들의 권리가 인정되고, 결혼한 여자들도 똑같이 분배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초기만 해도 전통 풍습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세종이 이런 관습을 인위적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교식 남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급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족 사회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한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유교에서 여성은 한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딸로 살다가, 남편의 아내가 되고, 다시 자식의 어머니로 사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 했다
유교가 강조하는 핵심 덕목은 한마디로 신분상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기 신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충과 효 즉 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태조가 고려를 멸망시킬 때에는 역성혁명 논리를 내세웠지만, 왕조를 창업한 이후에는 충효논리를 중시했다
유교는 왕의 통치를 참으로 잘 뒤받침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유교는 남성의 가문이 중시되는 문벌사회이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는 신분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유교의 최고 지표가 되었다
군신 간의 도리가 분명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간 도리를 강조했다
가문과 족벌이 중심이 되는 사회, 특히 남성 가문을 중시했다
조선은 가문을 중시하는 족벌사회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을 가진 집안이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남자들이 집안을 이끌어가는 전통이 새로이 들어서고, 남자의 집안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역사상 최초로 족보가 등장한다
1476년 안동권 씨 족보가 최초의 족보이다
족보가 등장한 배경에 대해 안동권 씨 족보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우리 동방은 예부터 종법도 없고, 보첩도 없었다.
아무리 문벌이 번성한 집안도 몇 대만 내려가면 고조부, 증조부, 조부 등의 이름조차 모르고, 후대 친척들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효제를 일으키고 예양을 이루고자 한들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당시만 해도 집안의 역사와 가족들을 기록하는 족보라는 것이 없었고, 비로소 안동권씨 족보의 출현을 계기로 족보가 생겨난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후대 친척들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천 년 전 조상과 그 후손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집안의 조상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대부 집안들도 족보조차 없었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자기 집안 내력을 족보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여성 중심사회이고 외가 가문을 중심으로 진행돼 왔는데, 친가 쪽 내력이 상세히 전해질 가능성이 적다
이렇게 가문들의 족보가 탄생하기 시작됐고, 불과 5백여 년에 불과하다
족보가 출현하고서부터는 집안의 제사를 책임질 장자가 가족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왕은 전체 백성을 대신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장자가 가족들을 대표하여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람이다
또한 황제는 만국의 국가를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자의 위치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하늘과 천자가 이어지고, 황제와 왕의 서열이 명확하며, 왕과 신하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이념체계와 신분질서를 만들게 된 것이다
세종이 만든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어떤 종교와 이념도 국가질서를 어지럽히는 난교 취급을 받았다
난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해 매우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사회는 유교사상에 근거해 전체 백성을 신분으로 가르고, 신분에 주어진 도리를 다하도록 강요했으며, 어떤 종교와 사상도 허용치 않는 단일이념집단으로 변모해 갔다
마치 이념에 근거하여 나라와 사람을 개조해 간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닫힌사회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특정한 종교와 이념이 지배하는 시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오늘 우리들 의식 속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유교는 더욱 퇴행적으로 변해갔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해 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더욱 강화된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하고, 조선이 다시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게 해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사대의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7세기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되자, 사대에 빠진 조선의 사대부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소수의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러한 명청교체기에 조선의 진로와 관련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되는 사건이다
소현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살다가, 9년 만에 귀국하였다
청나라에서 섭정을 하던 황족 도르곤이 소현세자 형제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섭정 왕이었던 도르곤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가 중국 선양에 머무르고 있던 때에는 청나라가 아직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이었다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당시 가장 큰 현안은 청나라가 명나라 정복에 파병하는 문제였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파병을 약속했고,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수군 1만 명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음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명과 조선의 사이를 확실히 분리시키기 위해서 수군파병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장수 마부대와 협상을 했다
그는 조선이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군대 징발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2천 명으로 파병숫자를 줄여줄 것으로 요청했다
청나라 마부대는 1만이 넘는 수군을 계속 요구했고, 결국 교섭 끝에 그 수를 6000 감축하는데 합의하였다
인조는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임경업장군을 대장으로 임명했다
임경업은 대표적인 반청주의자였는데, 명나라를 치러 가는 전쟁에 장수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임경업은 명과의 전투에서 소극적으로 대하다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고,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소현세자가 양측의 협상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용골대는 소현세자가 이들을 비호한다고 강하게 압박하자, 소현세자는 "나는 타국에 있지만 일국의 세자인데 어찌 이리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으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라."라고 조용히 반격했다고 한다
청의 의심을 해결하는데 소현세자가 외교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다른곤이 명나라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진행할 때 다르곤과 함께 동행한다
다르곤은 소현세자에게 함께 갈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조선이 숭상하는 명나라의 멸망 현장을 직접 확인시켜 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선양의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만리장성을 뚫고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전쟁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북방의 소수에 지나지 않던 만주족이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7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새로운 세계의 문명을 처음 접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아담 샬(Adam Schall)이라는 독일의 천주교신부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북경의 천주교 교회 신부가 남긴 글에 소현세자가 등장한다
“소현세자가 자주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뜻을 같이했다”라고 전한다
아담샬은 소현세자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섭정왕이었던 다르곤과 친분을 쌓으며 중국의 신흥권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다르곤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한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 아버지였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언행을 접하며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멸망한 명나라를 아직도 천자의 적통으로 삼는 유교주의 국가에서 소현세자는 단시간에 공격대상이 되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당한다
세자빈도 사사되었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두 아들은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조선이 유교를 유일무이의 진리로 삼는 폐쇄적인 이념집단이었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정적으로 삼아 독살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이 서양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 것이며, 동생 효종의 등극은 조선이 다시 유교의 틀에서 갇히는 형세가 되었다
소현세자가 죽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된다
효종은 주자성리학자들의 극단적 사대주의 사상이 된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선택한다
소중화사상은 송시열이 올린 상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은 소위 ‘기축봉사’로 불리는 상소를 통해,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명나라에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은 나라이니, 주자의 적통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한다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이니 중화가 될 수 없고,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화세계를 이어갈 나라는 조선이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은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 간의 관계를 넘어 부자간의 관계에 해당한다고 규정한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이 오랑캐는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차마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시어 원한을 축적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북벌론을 제창한다
청나라와 관계에서도 “관문(關門)을 닫고 약속을 끊으며,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 우리 의리의 원만함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며 쇄국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전쟁준비에 들어간다
그런데 북벌은 실현가능성이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철기군이 실존하고, 중국의 신흥 제국으로 상장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으로 조선은 더욱 폐쇄적이고 이념에 얽매이는 형국이 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사실은 천리(天理)가 어긋난 것이고, 하늘의 이치는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중화문명의 정통 왕조인 명을 계승하고 주자 사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가 아니다
조선이 중화문명의 뿌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송시열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충청도 괴산에 있는 화양계곡으로 들어가 살았다
화양계곡은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렸으나, 송시열이 화양동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화(華)는 중화(中華)를 뜻하고, 양(陽)은 불행이 지나가고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송시열과 제자들을 화양계곡을 소중화의 성지로 삼으려 했다
계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대표적인 글자가 大明天地 崇禎日月이다
대명천지는 명나라의 천하임을 말하는 것이고, 해와 달은 명나라 마지막 왕이었던 의종의 것임을 주장하는 글귀이다
송시열 사후 그의 제자들은 만동묘를 세운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
조선은 모든 국가를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나라가 바로 된 것이다
조선이 주자성리학에 집착하면서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접할 기회를 닫아버린 결과이다
강력한 고립과 쇄국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이들은 조선후기 위정척사파의 원류가 되었다
조선은 노비가 다수를 점했던 노예제사회였고,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노예제는 계속되었다
조선시대는 양반과 노비의 계급 이동은 철저히 제한된 계급사회였다
서울대 이영훈교수는 조선이 노예제사회였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시대 17세기에 이르러 노비들은 전체인구의 40%에 늘어났다
고려시대에는 노비의 숫자는 대체로 4% 수준이었고, 아무리 늘려 잡아도 1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구의 수는 약 300만에 불과했으므로 노비의 규모는 몇십만 명 수준이었다
천민 신분으로 태어나 고려의 최고 권력자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
고려 무신시대 이의민과 공민왕시절 신돈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12세기 일어난 만적의 난은 고려시대 노예반란의 대표적 사례인데, 당시 만적은 '재상과 장군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숫자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다
17세기 서울지역에서 발견된 호적에는 노비가 전체인구의 60%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후기 인구 약 1천만 명 가운데 최소한 4백만 명 이상이 노비의 신분으로 살았다"
<이영훈, 노예제사회 중에서>
노비 증가 원인으로는 양천제 도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태종 때까지만 해도 양인과 노비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태종 14년에 실시된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은 양인 남성과 천인의 여자사이의 자녀가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제도였다
노비는 국가에 세금을 내거나 군역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노비가 증가하면 국가의 재정 기반이 약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태종은 양인의 수를 늘려 국가의 군역과 조세 부담을 분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비종부법은 양반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노비는 중요한 사유 재산이었기 때문에, 노비종부법은 양반들의 재산권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노비종부법을 폐지하고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였다
다시 세조에 이르면 경국대전에서 일천즉천(一賤即賤)의 원리를 만든다
‘한번 노비가 되면 후손도 끝까지 노비가 되는 법'’을 만들었다
양반과 노비사이에 애를 낳아도, 자식은 노비의 신분을 따르게 되어 노비가 되었다
노예제 사회를 연구하는 외국학계는 조선의 노비제도를 매우 특수한 사례로 거론한다
대체로 외국의 노예제사회에서는 노예와 양인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자식은 양인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분을 대물림하는 사례는 없었다
3천5백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법에서도 자유민 남자와 노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자유민으로 인정되었다.
그 아비가 자기 자식임을 인정하는 순간, 노예 여인도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다.
아비가 자기 자식이라 인정하면 그 아이는 자기 몫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아이의 어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中에서)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 교수는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를 훨씬 넘는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단정한다
외국에서도 조선과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규모로 노비제도를 존치시킨 사례가 드물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나 고대로마의 노예제도 전체인구의 3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과 같은 넓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노예제가 유지된 사례가 거의 없다
인구의 40%가 넘는 노예가 존재한 곳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외국의 노예제들은 대체로 정복한 이민족이거나, 납치하여 인신매매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조선의 노비는 공동체에서 같이 살아온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노예집단을 만들었다
미국 남부지역 노예제 사회에서도 10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면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조선의 서울에서는 미관말직 양반 관료도 평균 100명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관료 중에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758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퇴계 이황도 367명의 노비 문서를 남겼다.
왕족이 소유한 노비 숫자는 더욱 많았다
세종의 왕자 중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은 각각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고 한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최악의 신분차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노비는 가장 큰 재산으로 분류되었고, 가격도 약 660일 노동가치(경국대전)로 규정되었다
고려시대 노비의 가치는 약 120일분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비가치는 대폭 상향되었다
고려 노비는 열심히 일해 일 년에 120일분을 가져다준다면, 나머지 기간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조선노비는 아무리 일해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양반의 상속목록에서도 가장 먼저 거론된 재산이 노비이고, 그다음이 토지였다고 한다
여성 노비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재산을 늘려주었기 때문에 그 공을 인정받아 면천해 주는 사례도 있었다
노비는 사람에 해당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1422년 세종은 '주인고소 금지법'을 제정하였다
노비가 주인의 잘못을 고발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즉시 목을 베도록 한다는 내용의 법이다
노비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주인에게 저항하거나 해를 끼치게 되면, 양반이 직접 ‘강상죄’로 처단해도 된다
노비는 주인의 범법행위를 알아도 대역죄를 제외하고는 주인을 고발할 수가 없다
그들의 부모 형제를 죽이거나 혹독한 형벌을 가해도 관청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권리가 없다
반면 양반들은 노비에 대하여 무한정의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조선시대 노비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양반집과 근처에서 거주하며 주인인 양반을 위해 일하는 ‘솔거노비’가 있었다
또 다른 노비들은 전국에 흩어져 거주하고 생업에 종사하며 주인에게 ‘신공’ 소위 몸값을 지불하는 ‘외거노비’이다
양반들은 전국을 돌며 자신들의 노비들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몸값을 받아내고, 노비의 자식들이 태어나지 않았나 점검한다
기록에 의하면 어느 양반이 여자노예를 관가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매를 쳤다는 내용이 있다
양반은 여자노비가 몇 명의 아이를 낳았는지 실토하라며 고문했다고 한다
노비는 소중한 재산이며 노비가 낳은 자식들은 양반의 재산증식과도 같기 때문이다
여자노비는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주인의 고문을 견뎌야 했다고 전한다
< 이영훈교수, 조선의 노예제 강의 中에서 >
노비가 가장 많은 시절에는 인구의 반에 육박하는 노비들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일부에서는 외거노비의 존재를 이유로 서양의 노예제와 다른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외거노비 역시 양인과 구별된 신분을 갖고 있었고, 그들에게 양민의 권리도 부여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보호대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생존방식이 상이했을지 모르지만 노예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야하는 신세는 부정할 수 없다
조선시대 노비제는 영조 때에 이르러 변화가 시작된다
양천제에서 해방되어 노비들의 자식이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노비세습제를 규정한 일천즉천(一賤則賤)에서 종모법(從母法)으로 바뀐다
남자노비와 양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소생은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노비에서 양인이 된 사람들도 군포를 내는 군역의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런 종모법을 통해 18세기초 40%에 달하는 노비들이 감소하게 되고, 19세기에 이르면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0%로 줄어든다
물론 종모법 영향 만으로 이런 결과가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노비감소에 어느정도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노비제도의 가혹함을 비판하고 노비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이다
'성호'는 ‘별이 머무는 호수’라는 낭만적인 이름이다
마을 이름 첨성리에서 성(星)을 따고, 인근에 위치한 호수의 호(湖)를 따서 성호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익은 몰락한 남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고 재야의 학자로 살았다
이익 역시 양반으로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며 살았지만, 노비제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 번 종이 되면 천만년이 가도 그 신세를 면치 못하고, 학대와 고통은 천하고금을 막론하고 유례가 없을 정도"라며 노비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드러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안의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지만, 노비의 수를 줄이고 양민을 확대하자고 했다
양민들이 늘어나면 조세와 무역도 늘어나 나라 재정이 확충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이익은 일찍부터 서양문화와 기술을 접했고, 특히 서양의 천문학을 소개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는 유교국가 조선을 어떻게 잘 고쳐서 좋은 나라로 개혁해야 할지에 방점을 두었던 것 같다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과거제도를 개혁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익은 젊었을 적에 남인 아버지의 유배 전력 때문에 과거조차 볼 수 없는 처지였다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중농주의 주장을 하고, 수탈과 고리대로 인해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균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상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전히 유교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등장한 실학파들 조차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주교를 접했던 다산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다’ ‘신분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양반과 양민의 문제였지 조선의 노비제도 폐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도 조선사회를 비판하지만 신분제도 자체에는 언급도 없다
실학파 역시 반상의 구별과 신분제도를 중시하는 양반들이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 조선사회는 대외적으로 쇄국의 길을 걸었고, 스스로 청나라의 속방임을 자처했다
조선말 유교학자들은 개국에 반대하며 서양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에 젖어있었다
위정은 바른 것을 지킨다는 의미이며, 척사는 사악한 것을 물리쳐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위정척사파들이 천주교를 적으로 삼았다
정조 때부터 퍼져나간 천주교가 유교 질서와 정면 충돌했기 때문이다
충효를 최고로 삼는 전통적 질서를 파괴하는 교리로 규정했다
천주교를 믿는 자들을 금수와 같으므로 처단할 것을 주장했고,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항로, 기정진 등이 벌인 위정척사운동은 쇄국의 길로 나아간다
이들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한심하였다
이항로 ‘화서집’에서는 서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쪽 끝의 땅은 살기가 가득 차 있고, 서양인들은 물의 나라에 사는 거북이나 어패류와 같은 무리’라는 표현으로 비하하였다
서양은 도덕이 무너지고, 욕망과 음탕한 기운이 가득 찬 곳으로 묘사한다
중국 북쪽의 오랑캐는 말이라도 통하는 집단이지만, 서양은 짐승과 같아서 말도 통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였다
기정진의 서양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에 서양세력의 침략을 염려하여 올린 ‘병인소’에서 말한다
서양 세력을 인간이 아닌 요괴로 보았다.
그들이 침략하는 것은 우리를 종으로 삼고, 부녀자를 잡아가서 음욕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교사는 천주교를 포교한다는 명분으로 우리의 약점을 찾기 위해 파견된 간첩이고, 천주교인은 서양 세력과 내통하는 매국노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서양 세력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항로와 기정진의 생각은 조선말기 위정척사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위정척사파들은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들이었다
모화는 중국을 문물을 따르고 흠모하는 것을 의미하며, 친중사대의 극치를 말한다
중국이 모든 문명의 뿌리이며 중심이므로, 조선은 명과 청의 책봉체제 안에서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양이 일찍이 중국의 찬란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사악한 무리가 되었다고 보았다
조선말기 고종과 왕실도 청나라의 속방을 자처하며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서양 열강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청에 의존하는 전략을 취했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임오군란과 대원군 납치사건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이양하여 사태수습을 맡긴다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원군이 다시 쇄국의 길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청나라는 미국과 조선의 수교를 추진 중에 있었다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국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게 서양의 여러 나라와 수교하도록 권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러 국가와 수교하게 하여 특정 국가가 조선을 독점하는 상황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청나라 이홍장 등이 '속방'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대원군이 재집권했을 때에는 중국의 리홍장과 미국의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이미 텐진에서 조선과 미국의 수교에 관한 사항을 합의한 상태였다
조선은 협상과정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청나라에 위임한 상태였다
중국은 조-미조약 내용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려 했으나 미국이 반대해 삭제 됐다
그 대신 조선 왕이 미대통령에게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대체했다
청나라는 다시 대원군이 쇄국정치로 돌아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조미수교 협상에 파견됐던 김윤식도 청나라에 대원군의 제거를 요청했다
마침내 청나라는 대원군을 제거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력개입에 나섰다
일본군이 4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한 반면, 청군은 3000명을 파견했다
북양함대 군함 4척이 동원됐고, 사령관 오장경과 그 휘하에 젊은 위안스카이가 동행했다
오장경 사령관 일행은 운현궁으로 가서 대원군을 만났고, “군무에 상의할 일이 있다”라고 답방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소수 병력만 대동하고 청군 진영을 찾았다.
대원군을 맞이한 청군의 마건충은 기습적으로 대원군에게 말한다
‘남양만으로 가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으라’는 명을 전한다
그리고 청군은 그를 강제로 가마에 태워 남양만으로 압송했다
이후 대원군은 텐진으로 납치되었다가 1885년까지 약 3년간 중국에 유배되어 있었다
대원군이 다시 귀국하게 된 것은 중국이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대원군이 인천에 도착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가 그를 호송했고, 그는 조선의 감국대신 총독 행세를 하였다
대원군은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한 그루 매화 앞의 한 늙은이(一樹梅前一老儂)’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조선은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문화시킨 불평등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해서, 조선 국왕은 외교관을 청나라 동의 없이 임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국왕은 청의 북양대신과 동급이 되었고, 청인들에 대한 재판 관할권도 청나라가 가져갔다
조선은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보호국이 되었다
당시 중국의 리홍장은 조선의 지위를 ‘속국’으로 명확히 한 것이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속방’에서, 상호 양국의 합의에 의해 ‘속국’의 위치로 전락한 것이었다
1894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나라는 12년 동안 조선을 사실상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은 굴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조선 지배층도 중국에 저항하지 않았다
고종과 조선왕실도 청국의 속국임을 자처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개화파의 독립사상이 나온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독립사상은 청나라로부터의 굴종을 벗어나 근대 독립국가 위상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개화사상가들은 조선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양과 일본과 같은 근대국가로 개조하는 것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유교 이념에서 벗어나 독립과 문명개화사상을 전파하고자 했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