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김옥균, 이동인, 박영효 등
조선에 근대사상이 처음 탄생한 것은 개화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백 년은 주자성리학이라는 단 하나의 사상만이 지배하고, 다른 종교와 사상은 철저히 금지된 사회였다
개화파는 봉건적 유교국가를 벗어나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최초의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파의 탄생에는 1860년대부터 형성된 특별한 인적 네트워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시기에, 조선에 서양문명이 전해질 수 있는 루트가 있었다
청나라를 여러 번 다녀온 역관 오경석이 서양문물을 보고 전하는 역할을 했다
오경석은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오경석은 역관 신분으로 청나라에 무려 13차례나 다녀온 전문 외교관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청나라가 서양열강들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두 차례 아편전쟁을 접하면서 서양의 무력과 경제력이 중국을 압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2차 아편전쟁은 동양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청나라의 최고의 보물로 여겨지던 황제의 궁, 원명원이 불탔다
1860년 북경이 영불연합국에 점령당할 당시 위문사로 파견되었던 박규수 역시 큰 충격을 받았고, 박규수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한 사람도 바로 오경석이다
조선도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을 느끼면서, 오경석은 청나라에서 서양에 관한 책을 사서 귀국한다
오경석은 친구인 유홍기에게 전해 개화사상을 전파하게 된다
오세창에 의하면 아버지 오경석과 유홍기는 조선의 위기를 함께 느끼면서 개화파를 형성해 조선을 개조해야 한다는 입장에 공감했다고 전한다
개화파 최초 3인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중인출신 오경석을 시작으로 친구 유홍기, 양반출신 박규수가 개화파의 원조가 되었다
오경석은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위협한 병인양요 당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한다
1866년 대원군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을 처형했는데, 이를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 한다
당시 살아남은 세 명이 북경으로 도주해 본국에 처참했던 상황을 보고했다
당시 프랑스정부가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를 동원해 조선을 침략하고자 했다
병인사옥이 국제문제로 비화하자 대원군은 청국에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했다
이때 오경석은 통역관으로 파견되었고, 중국 측과의 연락 및 대책수립을 위해 급히 북경으로 갔다
그런데 오경석은 청나라 관료들과 북경주재 프랑스대사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 함대는 재정이 넉넉지 않아 군비를 차입했고, 3개월분의 군량 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원군에게 전한다
조선이 프랑스함대를 맞아 단기전을 피하고 장기적인 대치전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건의하였다
병인양요에서 조선군대는 오경석의 제안에 따라 장기전을 벌이면서 프랑스함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1871년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요구할 때에는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대원군에게 개항을 단행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대원군은 쇄국정치를 고집하며 오경석의 건의를 무시했고, 대원군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한다
미국과의 신미양요 수습을 위해 오경석은 다시 박규수와 함께 북경에 파견되기도 했다
1875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군함 5척을 보내 강화도에 진주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조선 왕실은 개방론자 오경석을 발탁하여 문정관에 임명하고 사태수습을 맡겼다
당시 대원군은 쇄국을 고집했고, 고종과 민비는 청국의 권유에 따라 개국을 추진하였다
오경석은 일본과 무력으로 맞서면 패퇴할 것을 우려해, 대원군에게 협상을 통해 개국할 것을 건의했으나 또다시 배척당했다
1876년 2월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오경석이 생각하는 바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과 전쟁으로 치달아 더 큰 굴욕을 받지 않도록 개국하는 방향으로 사태 수습에 진력하였다.
오경석은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69년 오경석은 박규수에게 한양의 북촌 양반자제들을 규합해 개화파를 결성할 것을 제안한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박규수는 북촌에서 사랑방 회합을 주선하고,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서광범 등 다수의 양반자제들과 개화사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한양의 북촌에서 젊은 양반자제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형성되었다
오경석 이후 개화사상에 눈뜬 젊은 그룹의 핵심은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유홍기로부터 처음 개화사상을 접했다
박규수 사랑방에 모인 양반자제들 가운에 단연 눈에 띄었다고 한다
유홍기는 오경석으로부터 받은 서양에 관한 책과 세계 각국의 지리 역사본 등을 김옥균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조가 시급하며 신사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정치결사체가 탄생했다
한편 김옥균의 사상적 기저에는 불교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김옥균은 유홍기로부터 불교에 대해 전해 듣고 불교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유홍기는 조선의 선비들이 의례에만 집착하고 사상적 깊이가 매우 얕아서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불교 신앙심이 두터워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옥균과 승려 이동인의 만남은 개화사상 발전에 큰 계기로 작용한다
이동인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계기도 김옥균의 개화파들과 만남이다
1877년 무렵 이동인은 서울 화계사 삼성암(三聖庵)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서 개화파들과 교류했고 개화사상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동인이 서울에서 개화파 인사들에게 책들을 전달했는데, 서양의 역사와 지리, 물리나 화학 같은 과학 관련 서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서적들은 마치 불온서적처럼 규정돼 소지하거나 보다가 들키면 중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개화파 청년들은 처음에는 서대문 봉원사에 읽다가 나중에는 동대문 밖에 영도사로 옮겨갔고, 사찰을 떠돌며 회합을 계속했다고 했다
이동인은 출가승 신분으로 부산의 일본 사찰 '혼간지'의 부산별원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에 설치된 일본 사찰 혼간지 분원을 통해 일본에 관한 소식과 서양에 대한 책을 접했다
일본 혼간지 분원은 부산이 개항하면서 일본의 불교전파를 위해 세워진 절이었다
당시 통도사 출가 스님이었던 이동인은 일본 혼간지를 스스로 찾아가, 그곳에서 서양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혼간지 승려였던 오쿠무라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1879년 개화파는 일본 방문을 계획했고 처음에는 김옥균이 직접 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이동인이 대신 가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동인은 오쿠무라의 도움으로 마침내 일본의 화물선을 타고 밀항을 감행한다.
교토의 혼간지 본원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자 일본 승려로 귀화한다
이름을 조야동인(朝野東仁)으로 바꿨는데, 조선의 야인이라는 의미로 작명했다고 한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일본의 승려가 되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김옥균 등에게 서적과 근대 문물의 실상을 전했다
정계와 사회 유력자와 교제하여 발을 넓히고, 일본의 정세와 제도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서 유명한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1880년 이동인은 수신사로 동경에 온 김홍집(金弘集)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김홍집은 일본 측이 요구하는 인천항의 개항 문제를 논의하러 왔는데, 당시 이동인이 통역을 담당했다고 한다
김홍집은 이동인의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되었고, 수신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홍집을 따라 이동인이 조선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이동인은 김홍집을 통해 민영익을 만났고, 민영익이 고종과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1881년 2월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에 임명된다
통리기무아문에서 신식 군대를 창설한 이후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는 임무를 맡겼고, 고종은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동인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갑자기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이동인이 대원군 등의 수구파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반면 김옥균은 암살배후로 김홍집을 배후로 지목했다고 한다
김홍집은 개화파 중에서도 친청파인데 개화를 위해 종주국 청나라의 역할을 중요시하였다
김홍집 일파는 김옥균과 이동인 등 개화파들이 일본 중심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이동인이 사라진 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들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개화파들이 1882년 7월에 함께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개화파들의 목표는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차관과 무기를 도입하기 위함이었다
김옥균은 1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의 차관을 얻는데 실패한다
차관 300만 엔을 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와 교섭하였으나 빈손으로 귀국한다
김옥균이 귀국할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조선의 왕실은 청나라 속방을 자처하는 신세가 되었다
개화파들은 청나라의 속국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1884년 갑신정변은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민 씨 일파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민 씨 일파들은 또다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12월 6일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 1,500명이 진입하여 정변이 진압되었다
3일 만에 끝나 3일 천하로 불린다
홍영식 등은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개화파는 고종과 민비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제거된다
정변에 연루된 12명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들은 도성 한복판에서 둔기로 쳐 목을 잘랐고, 시체는 사지를 절단하여 길가에 며칠 동안 방치했다
김옥균의 가족 중 생부 김병태는 10년 동안 김옥균을 잡기 위해 살려두다가, 김옥균이 암살되어 시신이 조선에서 능지처참 당할 때 김병태도 교수형에 처해진다
양아버지 김병기, 남동생 등은 옥사했고, 모친은 음독자살 했다
박영효의 집안도 참변을 피할 수 없었다
형 박영교는 정변 과정에서 청군에 살해되고, 아버지 박원양은 장남인 박영교의 손자를 죽이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모친도 처형되었다
홍영식은 영의정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홍순목은 역적의 아들을 키웠다며 속죄하는 의미로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독약을 마셨다
홍영식의 아내도 자살하였다
서재필의 가족도 풍지박살이 났다
아버지 서광효와 형은 사형에 처해지고, 어머니와 형, 형수는 자살하였다
서재필의 두 살난 아이는 굶주려 죽었고, 양아버지 서광하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다
개화파에 대한 조선왕실과 민 씨 일가는 역적으로 몰아 3족을 멸했던 것이다
이때 처형된 이가 약 6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갑신정변으로 개화파는 철저히 씨가 말랐고, 조선말기 근대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 등은 해외 망명생활을 이어간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중국 상하이에서 민 씨 일파 민중전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고, 시체는 조선에 데려와 다시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 등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게 된다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의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김옥균 개화파의 사상을 압축하는 단어는 ‘독립’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에 대한 구상은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후쿠자와의 독립사상과 연결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서 ‘학문의 권장함’에서 독립사상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개인의 독립을 똑같이 중시했다
“국가는 국민이 모인 것이고,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천지간의 인간인 이상, 그 개인사이에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해도 된다는 것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
“독립이란 자기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고 타인의 신세를 지지 않는 정신을 말한다”라고 정의한다
국민들이 독립심을 갖지 않으면 ‘모두가 손님이 되고 주인 없는 나라’ 임을 강조한다
후쿠자와의 조선 개화책략은 '학문을 통해 문명화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민중들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동양 전체에 미칠 파급력이 크다며 반대했다
조선인을 일본에 많이 초청하여 그들에게 문명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개화파들은 후쿠자와의 게이오슈쿠에 많은 유학생들을 보냈다
후쿠자와는 신문의 역할에 주목한 인사였다
대중들을 문명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신문의 역할을 강조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에서 신문발행을 가장 열성적으로 도왔다
신문에서는 조선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과 한문을 혼합한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이 가나와 한문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개화파 유길준은 이런 취지를 받아들여 박문국에서 ‘한성순보’ 발간을 추진했다
그러나 한글 신문발간은 민명목 등 민비 일족들의 훼방으로 좌절되었다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는 순 한문으로 발간되었다
순 한문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없어서, 당초 의도한 신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김옥균의 독립사상에서는 조선이 청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다
서재필이 본 김옥균은 다음과 같다
‘그는 청국의 종주권 아래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이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을 세계 각국과 마찬가지로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되게 하느냐 하고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하였다.
그리고 신지식을 주입하고 신기술을 채용하여, 정부와 일반사회의 구투인습(舊套因習)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의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군사와 외교를 사실상 관장했으며, 고종과 민비는 스스로 청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하였다
당시 김옥균은 청의 지배로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얻고자 했다
특히 청나라 위안스카이가 대원군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 김옥균은 청국타도를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하는 것은 국토를 유린하고 국민을 모욕하고 조선의 왕가를 노예로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갑신정변은 사대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거사였다는 점이고, 기본정신은 독립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옥균의 국제관계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영국대사관 팍스공사는 김옥균의 행적에 대해 본국에 보고한 적이 있다
보고서에는 김옥균이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가급적 빨리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김옥균은 청나라가 조선에서 행한 정책은 완전히 청의 이기심의 발로이며, 겉으로는 조선의 안위를 생각하는 척 하지만 조선이 외국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을 막고, 조선의 진보를 막고 있다고 보았다
김옥균은 미국과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의 우호증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권을 견제하려고 했다
고종과 민비가 왕실의 안위만을 위해 러시아, 프랑스, 영국대사관 등에 신변요청을 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린 모습과 비교될 수 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당시 그는 자신의 개혁구상을 정책으로 발표하는데 14개 조항이 전해지고 있다
김옥균이 작성한 ‘갑신일록’에는 개혁정책 14개 조항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대원군의 환국과 청에 대한 사대와 조공을 청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공정한 인재등용을 약속한다
과거 조선왕조의 주요 관청들은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
13조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대신과 참찬이 중심이 되어 법률도 만들고 행정을 집행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런 구상은 왕정을 유지하며 법률에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무능하지만 조선 왕실을 유지하려는 것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국왕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전환하려던 시도로 보인다
김옥균은 봉건국가를 대체하여 근대국가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갑신일록에는 국민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고, 아직은 근대자유주의 국가 형태나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지 못했다
갑신정변 과정에서 김옥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갑신정변은 개화파들이 일본정부의 지원을 확신하여 정변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김옥균은 사전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 공사와 만나서 거사 계획을 협의한 바 있었다
거사가 진행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일본 공사관 병력 약 200명의 지원을 받았고, 이들이 고종을 경우궁으로 피신시키고 궁궐 수비도 맡았다
그런데 청군이 1500명의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서자, 일본 군대는 퇴각해 버렸고 더 이상의 지원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개화파를 오히려 철저히 외면하고 냉대하였다
김옥균이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 영사관으로 찾아갔으나, 일본 영사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김옥균 일행이 인천 제물포항에 가서 ‘치토세마루’라는 일본배를 타고 피신하고자 했을 때에도, 다케조에는 김옥균의 승선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다케조에의 배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민간인이었던 이노우에라는 사람이 선장을 설득하고, 치토세마루 선장의 결단으로 겨우 일본배에 탑승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다케조에 공사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훈련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절대 조선 내정에 개입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고, 다케조에 공사는 실제 우정국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 함재봉교수 강좌 ‘한국인의 탄생’ 中에서 )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정부는 이들을 외면했고 냉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당시 일본정부 실권자는 이토오 히로부미이다
유신 1세대 주역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1878년 암살된 이후 이토오가 일본 정부를 이끌어왔다
이토오의 전략은 일본 내부문제에 집중하여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국력을 키우고자 했다
대외정책으로는 청나라나 서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선문제를 놓고 청나라와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1885년 4월 갑신정변이 발생한 지 5개월 후, 중국 리홍장과 일본 이토오는 텐진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에서 양국 모두 군사를 물리치고, 향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할 때에는 상호 통보하기로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것이다
일본은 사실상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 셈이었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건너온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들을 무시했다
개화파들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이노우에 외무대신이 면담했다고 전한다
개화파들은 정착 일본정부의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분개했다
서재필은 ‘일본은 절대 개입할 수 없다’는 외무대신의 입장을 전해 들었고, 그는 더 이상 일본에서 살 수 없다면서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서재필, 박용호, 서광범 등은 미국으로 떠났고, 김옥균은 끝내 일본에 남을 것을 고집해 잔류했다고 전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개화파 김옥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벌인 대표적인 사건이 ‘오사카 사건’인데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오사카사건은 야당과 지지세력들이 조선의 개화파를 도와서, 군사력으로 고종과 민 씨 일파를 끌어내리고 김옥균 등이 재집권하도록 하는 기획이었다
일본 야당이었던 자유당의 오오이 켄타로 등이 주도하였다
자유민권운동을 벌이던 야당은 당시 메이지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야당 입장에서 일본정부의 유약한 대외정책을 비판하면서, 정부가 조선의 개화파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자금을 모으고, 함대와 총포 등의 군사력도 준비하고자 했다
조선과 일본에서 동시에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내부자의 밀고로 인해 메이지정부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130여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조선의 고종과 민 씨 일파 들은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실제 김옥균과 일본군이 함께 조선을 공격하러 오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이후 조선왕실은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에 자객을 보냈다
김옥균의 암살은 몇 번이나 실패했고, 일본 정부는 결국 암살로부터 김옥균을 도피시키기 이해 그를 먼 외딴섬으로 귀양 보냈다
2년간 오키나와 부근 오가사와라 섬에 유배한 데 이어, 몇 년간 홋카이도에 연금시키기도 하였다
1894년 암살범 이일직이 몇 년에 걸친 공작을 통해 김옥균을 중국으로 유인했고, 홍종우를 시켜 암살하도록 하였다
일본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일본이 조선문제에 개입하려다 실패하여 발을 뺀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본정부는 조선을 근대화하려는 개화파를 지원하지만, 일본이 조선 내정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대외적 충돌을 일으키는 외교분쟁은 철저히 삼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있기 전에 일본은 정한론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고, 조선을 정벌하자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으로 세이난 전쟁을 치른 뒤였다
일본은 당시 내부 문제에 집중한 채, 대외적으로는 가급적 충돌을 피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김옥균이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전제로 정변을 일으켰다면, 당시 일본 정부의 기본방침을 잘 모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갑신정변이 끝난 이후 조선에서 자주적인 근대화세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외국세력들의 조선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갑신정변 10년 후에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1895년 일본은 갑신정변에서 주장했던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는 갑오경장을 추진하기도 했다
1896년 명성왕후가 시해된 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선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확립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직접 통치가 시작된다
일본은 고종을 압박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