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조소앙,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다

by 이민영

조소앙은 개화파의 도전이 실패한 지 한세대가 지나고, 20세기 초반부터 활동한 인물이다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황실유학생이 되어 일본에 유학했던 사람이었다

일본유학을 통해 조소앙은 고루한 유학자에서, 독립운동가와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조소앙은 공수학회와 대한흥학회 등 유학생단체 간부가 되어 유학생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시기,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던 도중에 도쿄를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은 이승만을 환영하는 모임을 갖고 그의 강연을 들었는데, 조소앙은 이때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1909년 12월에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내자, 재일유학생들이 일진회를 성토하는 입장문을 발표하는데, 조소앙은 그 성토문의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0년에는 유학생 통합단체였던 대한흥학회가 추진한 '합방' 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조소앙은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과 중국의 신해혁명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본 정치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데, 일본 국회와 정치 현장을 참관하기도 하고, 사회단체들이 개최하는 집회와 강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의 일기에는 보통선거 요구나 전차사유화 반대 시위를 목격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던 '자유민권운동'을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다니던 메이지 대학은 프랑스 법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바바 타츠이 교수도 메이지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조소앙은 바바 타츠이의 '천부인권론'을 번역할 정도로 그 교수에게 심취되었고, 인권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국 신해혁명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쑨원이 중국 유학생과 교포들을 '중국혁명동맹회'로 규합하였고, 반청민주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웃나라 중국이 국민혁명을 일으키고, 일본에서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들이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미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도 이런 정황과 연관이 있다

<조소앙, 김기승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조소앙은 1913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그의 사상적 뿌리는 그가 작성한 ‘대동단결선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7년 7월 조소앙이 작성한 이 선언문은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대동단결선언문은 1986년 안창호 유품에서 발견되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조소앙은 여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스스로 삼보(국민, 영토, 주권)를 포기한 날이고, 우리 동지들이 삼보를 계승한 날로 규정하였다

“대한의 삼보는 한순간도 빼앗기거나 쉰 적이 없다. 우리 동지들이 대한국을 완전히 상속한 사람들이다.

저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바로 민권이 발생한 때다”라고 했다

대한제국의 주권이 황제에서 국민으로 이양된 것이고, 황제가 통치하는 대한제국에서 국민이 주권을 갖는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주권은 한국인에게만 있는 천부적 권리이므로, 다른 나라 일본이 대한민국을 강점하는 것은 무효라고 분명히 했다

서양에서 주권의 개념을 사회계약설로 규정한 것과 달리, 한나라의 주권은 각자 민족에게 주어진 천부적 권리이고, 타국에 빼앗길 수 없는 권리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이 최초로 탄생했다


대동단결선언에서 채택된 강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령은 해외 각 지역의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을 조직하고, 총본부를 설치하여 한민족 전체를 통치하고, 각지 지부로 관할구역을 정한다’

‘헌법을 제정하여 민의에 부합하는 법치주의를 실행한다’

‘독립·평등의 신성한 통치권을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동화와 자치 유혹을 방지·제거한다’

‘국민외교를 전개한다’

임시정부의 수립을 예고하는 것이며, 새로 들어설 정부에 민주적 법률과 기관이 설치될 것임을 밝힌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조선왕실과 완전히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대동단결선언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선포한 문서이다

이후 3.1 운동과 임시정부 시절에 그 누구도 조선왕실의 복원을 바라지 않았으며, 새로 건국할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제에 의거한 대한민국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조소앙은 일본에서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고, 대학시절 ‘천부인권’을 번역하기도 해서 인권과 사회계약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기초로 대동단결선언문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소앙은 임시정부가 국권을 회복하면 세워야 할 독립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인물이다

주목할만한 사상적 내용은 종교통합과 삼균주의이다

그는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종교의 통합을 주장한다

1914년 그의 나이 28살에 육성교라는 특이한 종교를 만들고자 했다

민족의 사상적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육성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6개 종교를 통합해 만든 종교라고 해서 육성교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단군을 시조로 한 민족사상, 불교의 자비제중(慈悲濟衆)', 유교 공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智德合致)', 그리스도의 '애인여기(愛人如己)', 무하마드의 '신행필용(信行必勇)'을 함께 묶어 하나의 종교를 구상한 것이다

그는 여러 종교에 관심을 두었고, 종교갈등이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한 행동이었다

육성교를 만들 당시 조소앙은 당시 일본에 유행했던 동서양철학통합론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철학통합은 유교의 공자, 불교의 부처, 기독교의 예수는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조소앙은 단군과 소크라테스, 마호메트를 더해 6대 성자(聖者)들을 똑같은 존재로 보았다

여섯 명의 성자는 하나의 신에 창조된 각기 다른 형태라는 발상이다

육성교를 만들 시점에 조소앙의 자신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세계 종교는 똑같다는 일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이단으로 배척한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직접 종교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에 이른 것 같다

<김기승, 국사관논총 98집 >


조소앙의 육성교 구체적 교리는 복잡 난해하지만 그런 시도는 종교적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려서 성균관에서 유교를 배웠고, 일본 유학 이후에는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 종교통합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고 종교의 자유도 존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소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외교활동의 총책을 담당하게 되었고, 1920년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의 유럽외교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임무를 맡았다

파리에 도착한 조소앙은 비록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유럽에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네덜란드로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유럽 순방에 이어 1921년에는 국제사회당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2019년 재불 사학자 이장규씨가 1919년 유럽외교활동과 관련된 문서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국제사회사연구소(IISH/IISG)의 소장자료 중에서 1919년 8월 9일 루체른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채택된 한국 독립 결의문을 찾아냈다고 했다

'한국민족의 독립에 관한 결의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의 3개 언어로 작성됐다.

결의문에서 "루체른의 국제사회주의대회는 한국인들의 권리의 가혹한 침해에 대해,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명백한 민족 자결의 권리가 있음에도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압제에 항의한다"라고 했다.

이어 "국제사회주의대회는 독립된 자유국가로 인정받고 외세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한국의 모든 요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국제연맹에 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1919년 8월 9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대회(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에 조소앙과 이관용을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끝에 이 같은 결의문 채택을 성공시켰다

당시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 국내 신문들은 25개국이 참석한 이 '만국사회당대회'에서 한국이 독립을 승인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만국사회당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Second International)이 결성된 1889년부터 세계 각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조직의 대표들이 모여서 열린 국제회의이다

조소앙은 영국에서 노동당 등 사회주의 정당과 인연을 맺었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훗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완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소앙은 엉뚱한 행동으로 사람을 놀래게 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그의 엉뚱한 행동을 가십기사로 보도한 적이 있다

조소앙이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러 파리에 갔을 때 일이다

조소앙이 동행했던 동료에게 “내 앙리 베르그송을 가서 만나보고 오려네, 자네 좀 같이 가서 통역을 해줄 수 있겠나?" 물었다

동료는 이 말을 듣고는 또 무슨 실수를 하여 망신을 하려고 그러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뜻을 꺾을 조소앙이 아니고, 베르그송의 거처를 기어이 알아내서 찾아갔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 ‘물질과 기억’ 등으로 당시 철학계의 유명인사였다

조소앙은 베르그송을 만나 영어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Do You Know the head of the time?”(선생은 시간의 머리를 아십니까?)

베르그송이 주춤하자 다시 물었다 "Then, do you knw the tail of the space?"(그러면 선생은 공간의 꼬리를 아십니까?)

사실 베르그송은 영어를 잘 못했고 조소앙의 어이없는 질문에 금방 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소앙은 일어서면서 “나는 가오”라는 한마디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에이 베르그송이란 놈이 무얼 알기에 그리 떠들어대. 쥐뿔도 모르는 놈!”이라고 말했다고 가십기사는 전했다


조소앙은 런던에서 인도의 시성 타고르도 만났다

이 만남은 7년 후 1929년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을 쓰는 계기가 됐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동방의 등불)

조소앙은 1941년 타고르가 세상을 떠난 후 중국 중경에서 추도문을 낭독했다고 회고했다

“그 옛날 런던을 방문했을 때 타고르와 나는 시간의 머리와 공간의 꼬리, 그리고 인간의 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기뻐했다”며 “그런 만남이 있은 뒤 인간이 시(時)와 고(故)와 공(空)의 집에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회상했다


조소앙은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후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1921년 국제사회당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뒤,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잠시 무정부주의에 경도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을 지원한 일이다

김상옥은 1923년 권총과 폭탄을 갖고 서울에 잠입한 뒤, 독립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다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역 부근에서 배회하다가 무장한 일본 군경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교전과정에서 일본 군경들을 다수 사상시켰고, 마지막에 김상옥은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김상옥은 조소앙과 함께 중국에서 ‘한살림 조직’을 같이하던 동지였다

‘한살림’이라는 말은 하나의 공동체로 함께 살아간다는 우리말이다

‘한살림’이라는 말에는 사적소유가 없는 공동체를 말한다

어느 누구도 자유를 구속받지 않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한국에서 해석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조소앙은 김상옥 의거를 소개하고 높이 평가하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 살림이 민족혁명과 계급혁명을 아우르는 진보적 혁명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무정부주의적 성향은 오래가지 않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귀하면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조소앙은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공산당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임시정부 주축이었던 한국독립당과 공산당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한국독립당은 민족대립투쟁을 수단으로 하지만,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수단으로 삼는다

전자는 국내 일체의 반일민중과 외국 피압박민족과 연합하여 일본 타도를 도모하는데 반해, 후자는 무산계급과 세계 무산계급이 연합하여 자본주의 국가 타도를 도모한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도 한국독립당은 자체의 주권을 옹호하고 어떠한 외세의 간섭과 대행통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공산당은 자신의 국가를 동일한 이념을 가진 대국에 편입하는 수단으로 삼아, 자국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한다"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조소앙이 공산당과의 차별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유일한 민족운동단체를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소앙의 핵심 사상은 잘 알려진 대로 삼균주의로 압축될 수 있다

20세기 초반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삼균이란 정치적 균등·경제적 균등·교육적 균등을 의미한다

삼균주의 기념비

삼균주의는 1918년부터 정립하기 시작하여 서구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조도 일부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삼민주의, 인도의 네로 정책들이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받아들인 것과 유사해 보인다

산업자본으로 인한 부의 독점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고려하여, 정부 주도의 산업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토지 분배는 농민들의 중요한 문제로서 자각하고, 언젠가 독립이 되면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는 이미 1918년경부터 구상되기 시작해 1931년 임시정부의 대외선언을 통해 체계화됐다.


1941년 11월 28일,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공포하기에 이른다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국무위원 조소앙이 초안을 작성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채택했다

‘우리나라가 대외 주권이 상실되었을 때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한마음으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유언했다. 임시정부는 복국(復國국권 회복)과 건국(建國)을 통해 독립·민주·균치(均治)의 삼종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이다.’

복국은 국권회복을 의미한다

국호를 정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우고 임시약법을 반포하고 적에 포위된 국토와 인민을 완전히 탈환하는 단계로 설정했다

이 단계를 완성해야 비로소 ‘건국 단계’가 개시된다고 임정은 선언했다

강령에서는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가의 수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任官)과 군사와 외교와 경제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국내에 시행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 한다'라고 정의했다

삼균주의가 건국의 주요 강령과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개인 대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사이의 균등 생활을 실시하려는 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개인의 평등문제는 보통선거제, 토지 국유제, 국비 의무교육제를 중심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민족사이의 균등은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이 타민족으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것으로 실현된다

국가 간 균등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을 금지한다는 원칙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임시정부 주축정당이었던 한국독립당의 당 강령, 그리고 독립군의 강령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삼균주의는 개화파 이후 가장 체계적인 사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서구의 계몽주의사상과 쑨원의 삼민주의 등에서 영향을 받았고, 거기에 우리 전통사상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조소앙은 해방 후 임시정부와 함께 귀국하여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구주석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사람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민이 자유민으로 살게 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사람이다


1948년 조소앙은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납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을 한 이후에는 조소앙은 김일성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북한에 갔다 내려오면서 삼팔선 부근의 여현에서 성명을 발표한다

"남북협상은 완전한 실패다.

이북에 가보니 김일성이 군사세력을 가지고 완전히 독재정권을 형성해 가고 있다

김일성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단독정부를 세울 준비를 마쳤는데,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니, 우리는 완전히 이용당했다"라고 평가했다

협상이 실패하면서 조소앙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그는 김구, 김규식등과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남한의 단독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1조에 나오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창출한 사람이 조소앙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개념화하였다

민주주의와 공화제는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 헌법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도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없다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되어 있다

정치적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명기해 놓은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1919년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 선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정했다

민주주의와 공화제는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하나의 국가 정체성으로 통합시킨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로 똑같은 권리를 행사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공화제는 신분과 계층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연대와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이다

로마시대 귀족과 평민의 공화정, 노동자 농민의 인민공화제,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정 등 다양한 공화국이 존재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민주정과 공화정을 합친 '민주공화국'이라고 정했다

요즈음에는 민주공화국을 민주주의 체제라는 측면을 부각시켜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독재시절과 비교하여 민주정의 기본원리를 주장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화정이라는 측면, 공동체 내에서 계층과 신념이 다른 집단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공화제는 상호존중과 배려를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 규칙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공화국은 임시정부 시기에는 삼균주의의 영향에 따라 균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해방 이후 헌법 제정과정에서는 좌파의 인민공화국과 비교되는 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삼권분립은 민주공화국의 필수적 요소가 되었다



조소앙은 1948년 사회당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조소앙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당명을 좌파적 성향을 가진 사회당으로 정한 것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지만 1950년 6.25 전쟁 중에 김일성에 의해 강제 납북되고 만다

조소앙의 마지막 생애는 북한에서 김일성정권에 맞서는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4년 조소앙은 김일성과 만나 '중립화통일방안'을 제안한다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남게 되면, 외세의 침략과 간섭으로 벗어날 수 있고 남북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이 나중에 민족통일 3대 원칙으로 내세운 자주, 평화, 대단결의 원칙은, 조소앙이 전쟁직후 김일성에게 강조한 중립화통일방안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은 중립화를 빼버리고, 남북을 사회주의로 이행시키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서 남북 연방제 통일방안을 내세운 바 있다


1956년 조소앙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다

납북된 대한민국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단체이다

단체 이름은 1948년 김구 김규식 등이 서울에서 결성한 통일독립촉진회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따왔다

조소앙 안재홍 등 재북 민족주의자들이 활동한 이 단체는 어느 정도 북한정권과는 차별적 입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이승만의 침략정책과 독재정치를 분단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 당시 조소앙과 안재홍은 ‘남북 정부 연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성균관대 이신철교수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활동이 '북한 정권과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단체'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사회주의 체제와는 다른 민족주의 노선을” 북한 사회에서 표방했다

재북평통 창립 선언문에서 통일정부가 ‘민주통일 연합정부’ 또는 ‘통일민주 자주 연합정부’ 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당시 북의 통일전선 조직체인 ‘조국전선’의 노선과 명확히 다르다

'재북평통이 북 정권 하수인’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북평통 간부 19명 가운데 12명이 우익 활동 경력의 소유자인 점도 ‘상대적 독자성’의 근거로 들었다.

김일성정권은 1958년 이 단체 주요 인사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하게 된다

납북된 엄상섭이 체포되자, 조소앙은 조작된 사건이라고 강하게 항의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단식투쟁으로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1958년 9월 10일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 후로 병세가 회복되지 않아 병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생 자유민으로 살았던 조소앙은 북한정권에 저항하다 최후를 맞았다


6.25 전쟁 이후 조소앙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었다

납북되었던 그는 월북자로 낙인찍혀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고, 1956년 이승만 저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조소앙의 가족들은 월북자 가족이 되어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아들 조윤제 역시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취직하기 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조소앙의 신원이 회복된 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서야 가능했다

조선말에서 대한민국 건국,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자유인으로 살았던 조소앙의 삶은 오랫동안 지워졌었다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에게 참으로 가혹한 시절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근대 개화파가 철저히 도륙당하고 가족들 마저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조선말기의 참상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반복되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조소앙이 살았던 일제식민지 시대, 해방 이후 혼란한 건국과정, 납북된 이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상과 기준을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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