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독립 무장투쟁의 근원

신흥무관학교, 아오야마 맹세

by 이민영


독립 무장투쟁의 근원지는 신흥무관학교라고 할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단체는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었다

신민회는 1907년에 조직된 한국 최초의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이다

실질적인 국권 회복을 위해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 이동휘, 이회영 등이 주도했다

신민회는 조선왕조의 복원이 아니라 민주주의 공화정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신민회에서는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하고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만주 서간도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신민회의 결정은 이회영의 6형제 일가 모두가 만주로 이주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회영 6형제는 1910년 한일병합이 단행되자 논의 끝에 망명을 결심한다

한양 중심가의 가옥과 전답 등을 급히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이들 형제가 모은 돈은 지금의 통화로 환산하면 6백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라고 한다

서간도로 향한 때는 그해 12월 추운 겨울이었다

6형제와 그들의 가족 등 약 60여 명의 대규모 일행이 압록강을 향해 한양을 떠났다

이회영의 부인이었던 이은숙여사는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서, 국경을 넘고 이주하는 과정에서 고생한 경험을 생생하게 전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썰매를 이용했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3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한다. 그러면 이동녕 씨 매부 이선구씨가 마중 나와 처소로 간다”

“우당장(이석영)은 말을 스스로 몰아서 타고 차와 같이 강판에서 속력을 놓아 풍우(風雨)같이 달리신다. 나는 차 안에서 혹 얼음판에서 실수하실까 조심되었고, 6~7일 지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가군의 마음을 평안히 받드느라 돌 전 유아(幼兒), 지금 장실을 안고 종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그러나 괴로운 사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모진 고생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였다


이회영 일가처럼 친족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상룡 일가이다

이상룡은 안동 양반가의 후손으로 유명한 임청각에서 태어나 자랐다

항일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하고,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1911년 1월 이상룡은 50대 중반의 나이에 50여 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만주로 향했다

그 역시 집과 땅을 처분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상룡은 임청각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집안의 노비 문서는 모두 불태웠다

그가 팔았던 안동 임청각은 99간의 거대한 한옥으로, 규모가 너무 커서 도깨비가 나오는 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중앙선 철도가 건설되었는데, 이 철도가 임청각을 관통해 일부가 훼손되었다

일제가 이상룡이 살던 임청각의 일부를 훼손한 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그의 독립정신을 꺾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현재 임청각은 과거의 모습대로 복원이 추진 중이다


이회영 형제들과 이상룡, 그리고 이동녕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에 만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갔다

그들이 삼원보에 정착촌을 꾸리고 맨 처음 조직한 것이 경학사(耕學社)이다

한자 그대로 농경을 하면서 학문을 배우는 공동체이다

1911년 4월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민족지도자 300여 명이 모여 노천집회를 개최했다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의결하였다.

①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②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③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④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⑤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스스로 경제와 교육, 치안을 담당할 수 있는 자치단체를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경학사장으로 이상룡이 선출되었다

경학사는 산하에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하는 신흥강습소를 개설하는데, 이곳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강습소는 인적이 드문 ‘합니하’라는 곳을 택해 개설하게 된다

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고 국제적 이목을 받기 쉬운 곳이라 판단하고, 인적이 드문 벽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게 되었다.

강습소 본관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넓은 토지를 매수해야 하고,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다

이석영(李石榮) 소유의 전답(6,000석)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다

선생과 학생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신흥강습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최초의 군대 양성조직이 탄생한 것이었다

각지에서 청장년들이 모여들면서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19년 유하현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순탄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잇단 흉작으로 재정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빠졌고, 연이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혼돈 속으로 치달았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령으로 떠났다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당시 무관학교 지도부는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3·1 운동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만주에서 무력투쟁을 벌여나갔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 윈난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 훌륭한 무관들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오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일본군을 탈출할 때 최신 군사 전술책과 군사 지도를 가지고 왔다

신흥 무관 학교의 군사 훈련에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이범석도 신흥 무관 학교로 찾아와 교관이 되면서 무장독립투쟁의 전사들을 길러냈다

한 해 약 1,000명의 독립군이 배출될 정도로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흥무관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일본과 중국군벌이 합동수색대를 꾸려 무장 독립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1920년 5월 중일 합동 수색대는 서간도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또는 살해하기 시작했다

탄압을 피해 신흥 무관 학교의 교관과 학생들은 1920년 7월 안도현으로 이동하였지만, 결국 8월경에 신흥 무관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신흥 무관학교는 신흥 강습소 시절부터 10여 년에 걸쳐 독립군을 길러내며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향후 만주와 러시아 등 각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무장 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폐교된 그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였다.

나중에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던 생도들이 있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됐다는 소식에 마지막 무관생도였던 사람들이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에 모였다

참석한 이들은 김경천, 지청천, 조철호, 이응준, 홍사익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얘기했다

모두에게 인망이 있었던 홍사익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지금은 배울 수 있는데 까지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데 까지 흡수하고, 그 위에 실무를 익히고 될 수 있으면 실전까지도 경험해서 충분히 자신이 설 때까지 은인자중 하여 기회를 보아 일을 성사시키자”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해 맹약을 한 뒤 헤어졌다

이것이 ‘아오야마의 맹세’라는 말로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왔다

이들 중 재학생들의 중심이 된 김경천이 있었다

그는 아오야마 맹세 후에 후배 지청천, 홍사익, 이응준을 요코하마로 불러 "조국이 부르는 날 함께 탈출해 한 몸을 조국 독립에 바치자"라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군에서 망명·탈출을 감행한 사람은 지청천, 조철호), 이종혁, 이동훈 4명뿐이었다.

<이원규,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에서>


1919년 3.1 운동 직후 독립전쟁에 투신할 시기라고 판단한 김경천과 지청천이 일본을 탈출했다

수원에서 북행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 도착했고, 열흘을 걸어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했다.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내며 독립군을 길렀다.

지청천은 남만주 독립군 진영의 최고 지휘자인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대한독립군으로 통합한 독립군단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고, 1940년에는 임시정부 소속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해방 이후 귀국한 지청천은 이승만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2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어 국회 외교국방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경천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전설적인 무장투쟁 지도자가 되었다

1921년 소련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다

다음 해 조직된 고려혁명군 사령관을 맡기도 하였다

김경천의 최후는 불운했다

그는 결코 어느 특정 정파에 소속된 적이 없고,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였다

1937년 소련은 연해주 거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데, 이때 김경천은 소련당국에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한다.

1939년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집으로 돌아오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정치범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결국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언도받았고,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김경천은 1942년 공사장에서 영양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아오야마 맹세’에 같이했던 홍사익과 이응준은 일본 육군으로 출세한 인물이 되었다

특히 홍사익은 조선인 출신으로 가장 높은 직책에 오른 대표적 친일인사이다

일본 육군 중장의 지위에 올랐고, 히로히토 일왕으로부터 '장군도'를 받기까지 했다

그는 필리핀에 있는 포로수용소 소장을 지내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연합군에 전범으로 체포됐다

포로들을 학대한 혐의 등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1946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응준은 역시 일본군 대좌에 오르며 일본인 장교로 잔류했다

일본 만주 군으로 파견돼 중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경성에서 태평양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응준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요청으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장관 등 주요 공직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이응준은 군대분야에서 대표적인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공격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1910년 아오야마 맹세를 했던 4인의 운명은 각기 달랐다

김경천과 지청천은 독립의 길을 걸었고, 2명은 일본군에 잔류해 출세를 달렸다

마지막 무관생도는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군대 주도권은 독립운동 진영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 상황은 독립운동 세력이 단합하지 못했고, 강력한 무장집단을 갖추지 못한 독립군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 건국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무장력을 갖추기 위한 시도는 1930년대 김구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끌 정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는데, 한국국민당은 항일투쟁방략으로 무장투쟁론을 당강령에 제시했다.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추구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때부터 한국국민청년단을 설치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해 간다

1940년 임정은 광복군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임정은 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며 크게 두 가지의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전쟁에 참여할 자체 무장력을 갖추고 연합국에 참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리고 초기부터 대립과 갈등을 지속해 온 항일세력을 하나로 통합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임정의 독립운동 지도력을 확보하지 어려웠을 것이다

임정의 최대 무장세력은 광복군이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이후 임정은 중국의 지원으로 무장력을 갖추기 시작한다

중국에 있는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창설을 기획하였다

광복군은 1940년 중경에서 광복군을 창설한다

임정의 군대, 각지의 독립군 부대,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광복군은 중국으로부터 국민당 군대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지기 전까지 중국 국민당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지휘부만 있고 부대원이 없는 조직과 같았다고 한다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형편이었는데, 지원은 광복군을 유지하는 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해방되기까지 한국광복군의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100여 명이 제1지대로 편입되어 김원봉이 지대장을 맡았다

제2지대는 이전의 광복군을 통합한 부대로 이범석이 지대장이 되었다

제3지대는 광복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것으로 김학규가 담당했다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광복군의 전투활동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인도-버마 전선 파견대활동이 언급되고 있다

인도 영국군에 파견된 광복군은 9명으로, 주로 포로심문과 정보수집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군에게서 영어와 기술교육을 마친 이들은 버마 국경지대 임팔전선으로 파견 갔다

1944년 장준하 김준엽 등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광복군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모병되어 중국 쉬저우 전선에 배속되었다.

3월 29일 김준엽이, 7월 7일 장준하가 각각 탈출했다.

탈출 후 중국 국민정부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고 한다

김학규가 이끌고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가 있는 안후이성 린취안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 들어가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활동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하여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후, 장준하·김준엽 등 일행 60여 명은 6천 리 길을 걸어서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임정 건물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감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준하는 당시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나이 든 정치인들이 서로 당을 나누어 파벌 다툼을 하고 있었던 현실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는 임정 요인들의 분열상을 규탄하며, 충칭 교포들의 회의에서 “임시정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라는 한 폭언을 했다고 회고한바 있다

광복군에 대한 장준하의 증언은 더욱 참담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통역이 아니면 일선 지구를 돌아다니는 아편 장사나 일군 위안소의 포주들까지도 하루아침에 광복군 모자 하나씩을 얻어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목불인견의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타국에 있는 동포 재산을, 이런 자일수록 앞장서 몰수하기가 일쑤였고, 광복군도 1,2,3 제대로 나뉘어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과거를 불문하고 독립운동자의 이름을 마구 나눠주었던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면 귀히 맞아들여 광복군 모자를 하나씩 씌워주었다”

장준하와 달리 김준엽은 자신의 회고록에 임정 옹호의 입장을 보였다

김준엽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병 출신 광복군들에게 임정이란 실질적 내용이나 영향력보다는 ‘상징’으로서 의미가 컸다고 강조한다

임정과의 갈등은 장준하·김준엽 등의 학병 출신 중심인물이 시안으로 떠나면서 종식되었다.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돼 이범석 지대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미국 첩보국(O.S.S.)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국내 침투를 앞두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본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을 찾아간 경우는 김문택이 유명하다

김문택은 학병에 징집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규슈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4년 9월 그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반도를 지나 만주를 거쳐 중국 내륙으로 갔다.

1945년 1월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6일 만에 온갖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푸양에 도착하였다.

2만여 리가 넘는 역정으로 탈출 경로와 고난의 정도가 남다르다.

그도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입대했다.

장준하·김준엽 등의 일행은 이미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떠난 뒤였다.

김문택은 남아 있는 학병들과 함께 제3지대에 잔류해 활동했다.

그가 맡았던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비밀 지하공작을 통해 입대한 한인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1945년 CIA의 전신이었던 OSS가 이들 청년들의 존재를 알고 이들을 활용한 특수부대 창설을 제안하였다

미국은 광복군과 연계하여 작전을 편다는 내용의 ‘독수리작전’을 승인하였다

이 계획은 60여 명의 요원을 선발하여 3개월 동안 정보수집ㆍ보고ㆍ통신 훈련을 실시한 후 그 가운데 45명을 1945년 여름에 5개 전략지점에 나누어 침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점령하게 한 후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1945년 광복군 38명이 훈련을 수료했으나 국내 침투작전은 수행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하고 말았다

<우리역사넷, 광복군 관련 기술 >

임시정부는 해외에서 독자적인 무장부대를 창설하는데 실패했고,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은 있었지만 무장력은 미미했고, 참전하지도 못했다

좌우갈등과 민족주의계열의 내분도 해결하지 못했고 통합된 지도력이 없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이후 건국과정에서도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해방 이후 좌우대결도 극단으로 치달았고, 자유주의진영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임시정부 적통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아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단독정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각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다른 나라와의 경험을 보면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적인 사례로 2차 세계대전 나치에 점령됐다가 독립투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를 살펴보자

프랑스는 종전과 함께 완전한 독립과 건국을 이뤄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정말 항복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선(Ligne Maginot)이 독일 전차군단에 의해 돌파되었다

마지노선은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건설한 거대한 요새를 말한다

독일 나치군은 마지노선을 돌파하기 위해 십수 년간 치밀한 준비를 했다

독일의 낫질작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로 인해 프랑스는 저항의지를 상실했다

낫질작전은 요새를 정면돌파하고, 기갑부대를 운영하여 빠르게 진격하는 것이 주요 요소이다

요새를 피해 공격할 것이라는 프랑스의 예상을 깨고,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일대 아르덴 고원의 마지노선을 주 공격노선을 삼은 것이다

마지노선이 돌파된 이후 프랑스 페탱총리는 독일에 어떤 항전도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한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극심한 좌우갈등으로 인해 독일 항복에 대한 수치심도 없었다고 전한다

1930년대 유럽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등장으로 혼란했고, 민주주의는 이에 대한 대항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국가지도자는 무능했다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백성들이 조선왕조의 멸망에 대해 결코 애석해하지 않았다는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프랑스를 다시 세우고 프랑스 정신을 다시 일깨운 것은 사를 드골이다

드골은 군인 출신으로서 2차 세계대전 발발당시 국방부차관을 지낸 사람이다

일찍부터 군사이론에 능통했던 사람이고, 그는 일찍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제기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결합시킨 기갑부대의 창설과 전격전(電擊戰)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프랑스군 지도부에 의해 무시되었지만, 오히려 독일 히틀러는 독립적인 기갑부대 만들었다

히틀러는 기갑부대를 마지노선에 투입해 성공을 거뒀다

드골은 독일에 패한 그날 엄청난 좌절과 분노에 휩싸이면서 다짐한다

“독일 기갑부대로부터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달아나던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혔지만 독일 기계화부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한 다음, 서진(西進)하는 독일군의 길을 막지 말고 남쪽으로 가라고 놓아주었다.

독일군들은 ‘너희들을 포로로 잡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이런 모욕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나는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 국가적 수치가 깨끗하게 지워질 때까지”

<드골의 회고록 中에서>

드골은 영국으로 건너가 BBC방송을 통해 독일에 대한 항전을 선포한다

드골이 영국의 처칠을 설득해 BBC방송이 가능했고, 1940년 6월 18일 ‘프랑스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로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할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오랫동안 프랑스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정부는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적대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적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적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재기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오!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대의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드골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에 호응하는 프랑스 군인들은 거의 없었다

나치 통치하의 프랑스 남부 정부는 드골의 저항운동을 반역으로 규정, 궐석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드골의 저항은 해외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드골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자유프랑스 군대의 창설, 프랑스 내부에 산재한 레지스탕스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에서 뒹케르크 철수작전으로 건너온 프랑스 군인들과 민간인들로 구성된 자유프랑스군을 만들었다

육군과 해군, 공군으로 확대해, 프랑스는 해외에서 레지스탕스 군대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군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레지스탕스 사관학교를 운영하였다

군사학교를 나온 군인들은 장교로 임명돼 프랑스의 해방을 위한 군사 활동에 투입되었다

해외에서 연합군과 함께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고, 프랑스 내부에 들어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자유프랑스군은 15만의 군대를 모았고, 1942년 연합군이 독일의 명장 롬멜을 물리친 사막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드골은 아프리카의 브라자빌 성명에서 식민지 해방에 대한 약속을 비침으로써 서아프리카의 지원도 받아냈다


드골이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프랑스 내부에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드골은 프랑스의 다양한 계파로 각자 활동하고 있는 레지스탕스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한 명의 밀사를 파견하는데, 그가 바로 레지스탕스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장 뮬랭’이다

당시 프랑스 내부에서는 다양한 이념과 출신들의 레지스탕스 그룹들이 존재했다

좌파를 불신한 우파적 저항 지도자 앙리 프레네, 귀족 출신의 에마뉘엘 다스티에, 신문기자 출신의 브로솔레트 등 다양한 인사들이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장 물랭은 1942년 야간에 낙하산으로 알프스 산의 생 앙디올 지점에 내렸다

물랭은 작은 성냥갑에 그에게 통합의 책임을 맡긴다는 드골의 메시지를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왔다

과업수행에 필요한 자금과 라디오도 지참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갈등과 견제를 극복하고, 통합을 이뤄서 단일한 비밀군사조직으로 재편해야 하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1943년 모든 저항조직을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이 결실을 맺었고, 그 이름은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로 정해졌다.

1943년 5월 27일 첫 번째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파리시내 한복판인 생 제르맹 가에서 회의장소로 결정되었다

8개 레지스탕스 주요 조직의 대표 각 2명씩 16명과 6개 정당 대표가 합석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파 및 3개 우익 정당의 대표가 한 자리에 모였으며, 양대 노조에서도 대표를 보냈다.

초대 의장은 장 물랭이 맡았고, 레지스탕스의 우선 목표에 합의했다

나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프랑스정부를 세우는데 동의했다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 복구, 사회정의, 위대한 국가, 공화주의의 자유 회복이 목표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수반은 드골 장군이며, 페탱의 비시정부는 완전히 거부한다고 결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물랭 >

통합은 최소한의 공동목표를 설정하여 완성되었고,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공동의 비밀군사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국내에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의 단일한 조직을 마련하게 되었고, 해외 드골장군을 중심으로 단결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해방은 1944년 독일 항복 이후 영국에서 귀국한 드골의 파리해방선언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드골은 가장 먼저 파리에 입성하여 다음과 같이 해방을 선언한다

“파리는 상처를 입었다. 파리는 파괴되었다. 파리는 고문받았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해방되었고, 진정한 프랑스의 힘으로 해방되었다고 선포한다

프랑스 군대가 전투를 통해 자력으로 해방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드골은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독일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척결작업이었다

그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통해 얻은 무장력과 대중지도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프랑스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누구도 그의 명성과 지도력을 능가하는 인물은 없었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국민을 배신한 인사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이 이뤄졌다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를 콜라보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콜라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부역자들(Collaborators)에 대한 처벌은 전후 프랑스에서 ‘정화’(Épuration)라는 이름으로 단행되었다

즉결 처형은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해 공식적인 재판 없이 이뤄졌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즉결처형은 주로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희생자 규모가 약 10,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공식 재판을 통해 약 300,000건 이상의 부역 혐의가 조사되었다

약 791명이 사형 판결을 받고 실제로 처형되었고, 장기 징역형, 국외 추방, 시민권 박탈, 재산 몰수 등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비시 정권의 수장으로, 나치 협력의 상징적 인물 '필리프 페탱'은 1945년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드골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총리 '피에르 라발'은 나치에 적극 협력한 혐의로 1945년 처형되었다

그는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프랑스는 그를 다시 살려내 다시 처형하는 사례를 남겼다

전후 부역자 처벌은 프랑스 자존심의 회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부 처벌은 과도하거나 불공정하다는 논란이 계속 제기도 하였다

나치협력에 대한 역사적 단절이 가능했던 것은 전후 프랑스를 이끌어갈 확고한 주체세력이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헸다

드골은 독립투쟁과정에서 무장력을 갖춘 군대를 창설하고, 다양한 독립운동세력을 한데 통합하였으며, 가장 먼저 파리에 입성하여 자력에 의한 해방되었다고 선언한다

해방 이후에는 나치협력자들을 청산하면서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주도할 수 있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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