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노선, 자금 문제 등
독립운동이 어떻게 추진되었는가에 따라 해방 이후의 모습이 달라진다
건국 과정에서 어떤 국가체제를 선택할지, 국민의 의사대로 자주적 결정이 가능한지도 마찬가지이다
독립운동은 희생과 통합이 전제되어야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독립진영의 정파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고 주도권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협력이 힘들어진다
우리 독립운동은 명백한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음에도 갈등과 분열은 계속되어 왔다
1945년 해방 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은 분단된 채 단독으로 자유주의 정부를 구성했다
물론 제도가 들어섰다고 자유주의가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분열의 상처로 인해 목표를 상실한 경우가 많았다
항일 독립운동시기에는 내부갈등과 분열 과정에 독립자금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전쟁에서 보급부대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독립운동 초기에 신민회를 이끌던 이회영, 이상룡과 같은 부자들은 전재산을 털어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소수의 재력으로 오래 버틸 수 없는 형국이고 국내와 해외동포들의 지원을 조직화해야 했다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참으로 힘들게 사는 사회였고 자금을 보태는데 한계가 있었다
독립운동은 무장력도 갖추고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전쟁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고, 사람들이 굶어가며 싸울 수 없는 것이다
자금 조달 해결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자금문제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제대로 된 정규군도 꾸리지 못했다
임시정부 설립은 정파적 차이를 넘어선 통합을 통해 가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투쟁의 구심점이었고, 적통이 되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자유주의의 원류이고, 인권과 민주주의, 공화제 원리가 발표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했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채택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하기까지 많은 단체들의 통합노력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됐다.
상하이와 한성 2곳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세 개의 임시정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상하이로 옮겨온 안창호의 중재로 9월 11일 상하이에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출범하는데 합의했다
이승만이 대통령,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독립운동 각 정파의 분열과 갈등이 노출되고 단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의견차이로 여러 그룹으로 분할되어 갔다
임시정부 부통령 이동휘는 사회주의계열로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운동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다른 일부는 중국과 제휴하여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자체 군대를 키워서 일본과 전쟁을 시도하는 행동파들도 등장했다
각 정파의 갈등과정에서 독립자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으로 자금 유용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파 간 갈등으로 암살사건도 발생하기도 하면서 분열의 골은 깊어졌다
임시정부가 수립하기 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많았고, 각지에서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안창호는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대한인국민회는 해외동포들에게 '국민의무금'이라는 독립자금을 거뒀다
동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납부하는 일종의 세금 형식을 띠었다
대한국민회가 해외동포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임시정부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국민의무금을 부과하는 목적 중에는 무장독립군 양성과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안창호는 국민의무금 부과와 관련하여 "나중에는 피를 흘리는 사람들에게 절을 하겠지만, 지금은 돈을 내는 사람에게 절을 하겠다"라고 말하며 자금문제를 중요한 사안으로 여겼다
국민의무금은 일 년에 5달러 정도를 납부했는데, 현재 통화가치로는 약 1백만 원 정도 된다고 추정된다
대한인국민회는 막대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 이주한 동포들도 참여하고, 미국 본토와 하와이 노동자, 사업가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특히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고된 노동을 하던 한인노동자들이 많은 자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하루 10시간 넘는 노동을 하면서도 한 달에 번 3~4달러 중에서 1달러 이상을 독립자금에 보탰다
외국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일수록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
미국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용만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부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이하 국민군단)을 창설했다
동포들은 일제히 휴업하고 국민군단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하와이 군사령부로부터 군단설립 인가를 받기도 하였다
최초 입대한 젊은이는 모두 103명이었고,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은 낮에는 파인애플 농사를 지었고 오후에는 군사학 강의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와이 아후이마누강을 낀 계곡에 병영이 있어서 이곳 학생들을 ‘산 너머 아희들’로 불렀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훈련 속에서도 낙오자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우방국인 일본이 미국무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국민군단은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국민군단과 사관학교는 1917년에 해체된다
재정이 악화되었고, 하와이 한인사회 내 독립운동세력의 분열도 작용했다
박용만은 줄기차게 군사운동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현실적으로 일본이 강대국인데 대결 국면으로 가서는 안된다며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다
양 진영의 대립으로 결국 하와이 한인사회는 둘로 나뉘었고 갈등관계로 바뀌었다고 한다
1913년 하와이에 온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게 되면서, 하와이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자 박용만의 국민회의 재정문제를 꺼내 들고 비판하여 대립과 분열은 더욱 커졌다
(하와이대 최영호 교수 인터뷰, 경향신문 2005년)
결국 이승만 지지자들이 박용만 지지세력을 밀어내는 형국이 되었다
1918년 박용만과 지지자들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남용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하와이국민회임시연합중앙회’라는 임시단체를 조직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장 불신임과 지방총회에 국민의무금을 납부하지 말 것 등을 결의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하와이국민회와 갈리히연합회(임시연합회)로 양분되었고, 조직적 위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박용만은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분야 업무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박용만의 최후는 애국진영의 불행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그는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중국 베이징에서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해명은 박용만에게 자금을 구하러 갔다가 언쟁을 벌이다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해명은 법정에서 박용만이 일본과 내통한 변절자라고 주장하여 징역 4년형이라는 가벼운 형벌에 처해졌다
박용만이 일제의 밀정이라는 오해가 불러온 참사이고, 더군다나 돈을 빌리러 갔다가 다툼이 번져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박용만이 암살되기 얼마 전까지도 '불령선인' 즉 일본에 불온한 인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저축은행을 세운 돈도 일제로부터 받은 돈이 아니라 하와이 주민들이 모아준 돈이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가 일본정부 측과 접촉했고 일제가 지원해 준 자금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박용만을 적대시하는 독립단체들은 그를 일제의 밀정이라고 믿었다
박용만은 결국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갈등을 겪고 있던 시점에 자금문제와 연관돼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1965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용만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고,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독립운동진영에서도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레닌은 제국주의 침탈을 받은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의 민족해방운동 지원에 기대를 갖고 있던 시기였다
일찍부터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한인사회주의운동이 시작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은 김애림(러시아명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레닌의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며, 하바로프스크시의 인민위원이 되었다
우수리스크 근교에서 한인 이주민(고려인) 2세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우랄 벌목장에서 한인・중국인 노동자를 위해 통역원으로 일했다
그곳 벌목장에서 그녀는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고 혁명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애림의 주도로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최초로 한인사회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발기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김립(金立),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동생), 오 바실리(김애림의 남편) 등 후일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들과 이동녕・양기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발기대회에서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각기 분열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러시아혁명을 적극 지지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투쟁을 강조했다.
반면 민족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러시아와의 연대에 회의적이었다
이 행사는 좌우 이념문제로 분열이 야기된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김애림은 불행히도 1918년 러시아 반혁명군인 백군에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한인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사람이 이동휘이다
191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를 비롯한 13명의 한인이 모여 비밀리에 한인사회주의자동맹(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한인사회주의자동맹은 당시 러시아 혁명정부의 지원하에 러시아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사회주의 단체였다
이동휘는 사회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민족주의 계열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인사회주의자동맹은 1919년 한인사회당으로 변모하고 이동휘는 임정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임정내부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분열하게 된 계기는 코민테른 지원자금 횡령사건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직 코민테른은 레닌 주도하에 1919년 3월 2일 창설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탄생한 국제기구이다
특히 코민테른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로 보고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이었다
코민테른은 한국 독립운동에게도 두 차례에 걸쳐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임시정부 총리 이동휘가 코민테른 지원자금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두 차례 걸쳐 지원받은 코민테른 자금이 임정에 전달되지 않고, 이동휘가 사회주의 운동에 유용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3.1 운동 직후 1919년의 일이다
한인사회당은 한인학교 교사 출신 박진순을 단장으로 하여 박애・이한영 등 세 명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레닌이 주재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3・1 운동 등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박진순은 레닌의 소개로 러시아 외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극동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활동에 필요하다며 미화 10만 달러에 해당하는 400만 루블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시베리아 주재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인 슈마츠키가 이 중 200만 루블을 극동 사회주의 활동비로 사용하겠다며 가져가는 바람에, 결국 200만 루블만 한인사회당에 전달되었다
이때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상하이로 본부를 이전한 상태였다
이동휘는 지원자금 200만 루블을 임정에서 전달하지 않았고, 주로 사회주의 조직 활동에 사용해 버린다
임시정주를 위해 내놓은 자금은 겨우 10만 루블에 불과했다
두 번째 자금지원은 1920년 임정의 사회주의자 이동휘가 다시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뤄졌다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은 물론 의정원의 동의도 받지 않고, 레닌과 비밀접촉을 시도했다.
이동휘는 러시아에 한형권을 보내서 레닌에게 임정 명의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임시정부는 소련의 ‘항일투쟁계획’에 대해 동의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편지를 전달한 한형권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자격으로 신임장을 발부했다
임시정부 이름으로 레닌 앞으로 친서를 보내고, 대통령 재가도 없이 한형권을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임명했다의정원 동의 없이 행한 처사이고 외교관 파견과 재정 지원 요청을 독단적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또한 극동에서 한인 빨치산 부대와 러시아 적위군의 연합작전 계획안에 동의한다는 내용도 개인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도착해 레닌과 면담했고 레닌의 소개로 다시 러시아 외무장관과 만났다.
한형권은 4개 항의 내용을 전달하고 이와 관련한 협정체결을 요청하였다
1) 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2) 대한민국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의 차관 제공
3) 극동항일작전의 공동 수립
4) 이르쿠츠크에서 대한민국 독립군사관학교 개설 지원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소비에트정부는 극동 시베리아지역에서 제정러시아 부활을 꾀하는 백군과 내전 중이었고,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동에서 한인들의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한형권이 요청한 대로 200만 루블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1920년 10월 한형권에게 약속한 200만 루블 중에서 금화 40만 루블을 박진순에게 내주었다
코민테른의 자금은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한 대사에게 전달한 것이어서 지원금은 임정에 전달되어야 했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이승만이 상해로 돌아와 임정의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데 되면서 국무총리 이동휘와 갈등이 커져갔다
이 대립과정에서 이동휘는 임시정부 명의로 모스크바에서 받은 자금의 행방을 추궁당하게 되었고, 1921년 1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임정을 떠나버린다
이후 이동휘는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자금을 가지고 사회주의운동을 계속해 갔다
코민테른 상해본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박헌영(朴憲永), 그리고 이르쿠츠크공산당파인 김만겸 등을 참여시켜 고려공산당을 출범시켰다
임정의 이승만대통령은 신규식을 국무총리로 임명해 체제를 정비했고, 러시아 자금 횡령사건과 관련된 한형권을 대사에서 해임한다
경무국장 김구는 부하인 오면직과 노종균을 동원해, 임시정부 국무원 사무국장인 김립을 처형하도록 했다
김립은 한인사회당 핵심인사이면서 모스크바에서 지원금을 받아 배임을 결탁하고 자금을 유용한 죄로 암살된 것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임시정부 내 이동휘 계열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했다
코민테른 지원자금 유용 사건으로 인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운동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은 이희경, 안공근을 모스크바에 파견해 임정을 승인받으려 했지만, 소련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출처, 월간조선 현대사연구, 박종효 모스크바대 명예교수>
사회주의계열 세력들도 내부 분열과 갈등양상으로 지지부진한 모습을 면치 못했다
이 무렵 한인 사회주의운동은 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상해파)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창당한 전로고려공산당(이르쿠츠파)이 서로 주도권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가 한민족을 대표하는 ‘공산당’이라고 주장하면서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이들 양 진영의 대립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이동휘 상해파는 소비에트혁명정부와의 정치적 동맹을 주장했다.
러시아군과 연대하여 일본군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항일전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극동에는 아직 소비에트 권력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기적으로 극동공화국이 설립돼 있었다
극동지역에서 극동공화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시기였고,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 극동지역대표부와 협력하여 항일 무장세력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이동휘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정부와 연계돼 있었고,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본부가 극동지역대표부에 대한 직접적 지휘를 하지 않았으므로, 모스크바와 극동지역이 각기 다른 정파를 지원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이동휘의 상해파 무장독립군은 러시아 극동 현지 농민들과 공공연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이들은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는데 현지 극동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었다
현지 극동 농민들에겐 한국의 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동휘 산하 사할린 부대는 현지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했고, 마자노프에서 폭동과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 부대는 식량과 물자 조달을 위해 극동 농민들을 압박했고, 이로 인해 극동 지역 농민들의 원성과 비난이 고조되었다
독립군과 현지 극동 공화국 농민 사이에 전면적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의 독립군들이 대거 극동지역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독립군을 정치적 망명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1921년 코민테른은 극동지역대표부를 설치하고 보리스 슈먀츠키를 대표로 임명하였다.
슈먀츠키는 한인부대를 극동공화국에서 한반도 쪽으로 이동시켜 국내 진공작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소련은 일본과의 충돌을 줄이기 위해 한인 무장세력이 일제에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한다
6월 10일, 볼셰비키의 지도자인 레닌은 당분간 공공연한 행위를 하지 말고 비밀행동에 초점을 맞추라고 지시하였다.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인부대들은 러시아 영토에 머물면서 적극행동에 나서기 위해 적절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해, 슈마츠키의 모험적인 행동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슈마츠키는 한인부대들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려고,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사할린부대를 무장해제시킬 것을 요청한다
자유시사건은 1921년 6월 28일 한인부대들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무장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극동 인민혁명군은 이동휘 사할린부대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는데, 사할린부대 책임자들은 이 명령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할린부대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했다
얼마 안 가서 사할린 부대의 저항은 평정되었고 곧바로 항복하였다
자유시 참변의 사망자는 최소 36명에서 최대 400명으로 일정하지 않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 계열의 부대 통합은 완전히 물건너가 버렸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의 김좌진 부대는 자유시에 합류하지 않아서 피해가 없었고, 홍범도 부대도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양측의 대립은 최종적으로 코민테른에 의해 정리된다
1국 1공산당 원칙에 따라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모두를 해체시켜 버린다
1925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책임비서 김재봉)이 창당됐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운동과 계급투쟁, 민족해방을 내걸고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에 해체되고 만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지하활동을 계속했고, 조선공산당은 해방 후인 1945년 9월에 이르러서야 재건됐다
조선공산당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지도 못했고, 임시정부와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동휘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활동을 하다가 1935년 병사했다
그의 추종세력들은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추방됐다
임시정부에도 다양한 정파들이 존재했는데, 시작단계에서부터 정파들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민족주의계열 운동도 통합된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외교적 활동을 중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사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제국주의 식민지 해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음에도, 한국과 같은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지지하는 주장으로 잘못 판단했다
윌슨은 인종차별주의자이었고, 그가 말한 민족자결은 인종별 분리를 말한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백인들과 흑인들이 분리해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실행한 인물이다
그가 강조한 민족(nation)은 식민지 독립이 아니라, 미국 남부의 정서를 대변하는 인종적 개념이었다
인종이 다른 사람들은 각기 다른 국가(state)를 세워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완전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여 각기 다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20년 윌슨의 모교였던 프린스턴대는 그의 인종차별을 문제 삼아 대학에서 윌슨의 모든 자취를 지우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인종차별을 실행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대통령 집권 당시 그는 백인과 흑인의 분리를 감행했고, 백인우월단체인 KKK를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프린스턴대 총장 재직 당시에는 대학 내 흑인의 입학을 금지시킨 바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식민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패전국 점령지를 처리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했다
파리평화회의나 국제연맹 또는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측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는 결국 허망한 결과로 귀결되었다
1920년대 임정활동은 좌우갈등과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승만과 신채호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임정내부의 노선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다
1923년 신채호 주도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는데, 각지의 2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임시정부의 앞날을 두고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하나는 임시정부의 기존 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창조론'이고, 또 하나는 기존 정부를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을 한 ‘개조론’이다
사회주의계열은 주로 창조파 입장이고, 개조론은 상해파 민족주의 세력들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통합된 노선과 갈길을 정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1925년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의 자금을 멋대로 썼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게 된다.
대통령 탄핵은 신채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썼다는 점도 성토대상이 되었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비판했다
사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안은 외교활동 차원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하고, 이승만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도 동의했던 사안이라고 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면서 매듭지었지만 갈등과 분열은 치유되지 않았다
1930년에 이르면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김구 혼자서 상해임시정부를 지키는 형국이 되었다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혁명당이 독립활동의 중심이 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해외 항일운동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이 앞장섰다
1932년 10월부터 상해에서 여러 차례의 준비회의를 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라는 연락조직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여러 정당과 해외 한인단체들이 참여하였고, 중국과도 제휴하여 동맹관계를 맺었다
1935년에는 조선의열단 · 한국독립당 · 신한독립당 · 조선혁명당 · 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다
민족혁명당도 오래가지 못하고, 임시정부 내부 노선갈등을 그대로 답습했다
해체하기로 했던 각 단체들도 그대로 조직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혁명노선의 차이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독립운동방향을 놓고 양대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의 두 파벌이 대립했다
한국독립당의 박창세 · 조소앙, 신한독립당의 민병길 등이 1935년 9월 탈당했다
민족혁명당도 통합된 조직으로 활로를 뚫지 못하고 위력이 약화되었다
김원봉의 의열단만이 남아 한 파벌의 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조선민족혁명당’ 내용 中>
해방정국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진영의 통합노력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수많은 분파와 정당이 난립했고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흩어져 있던 무장 독립군과 의용대를 통합하여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임시정부 산하의 단일화된 정규군으로 편성했다
그렇지만 광복군은 자력으로 전투를 치를만한 병력규모가 아니었고 무장력도 갖추지 못했다
해방 이전 독립진영은 이념적 스펙트럼과 활동 방식의 차이로 인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