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이승만, 여운형과 김규식 등
우리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 국가가 등장한 것은 8.15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부터이다
식민지로 부터 해방은 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1943년 미·영·중 정상은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과 일본 점령지의 반환 등에 관한 내용에 합의하였다
여기에 '한국의 독립 보장' 조항이 담겼고, 일본의 여러 식민지 중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독립을 약속받았다
이같은 독립보장 약속은 중국 장제스의 역할이 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온 장제스는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직전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독립을 관철시켜달라고 요구했는데 그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 동남아에 많았는데 이들 지역이 제외된 이유는 원래 유럽의 식민지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럽 참전국들은 동남아 식민지에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영국은 미얀마와 말레이시아를 다시 지배하고 싶어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유럽 국가들은 전후 재건을 하기 위해서 과거 식민지를 되찾고자 했다
그래서 인도차이나 국가와 인도네시아 등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여, 일본을 무장해제시키고 미소의 군정이 들어선다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국가 건설에 합의했다
8.15 해방을 맞이하여 건국을 준비하는 최초의 조직은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이다
일본이 항복한 날 8월15일, 여운형은 안재홍을 만나 뜻을 함께 하기로 한데 이어 오후에는 건국동맹의 간부들과 회합하여 건준을 발족하였다
1944년에 조직된 건국동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건준의 목표는 완전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직의 성격을 완전한 새정권의 수립에 산파적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건준의 강령을 보면 민주주의를 근간으로하는 자유주의 국가를 원했다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등의 좌파 세력과 엄밀하게 구분될 수 있다
8.15 이후 건준은 무질서와 혼란을 막고 무정부상태에서 치안과 자치를 담당했다
일본의 무장해제와 철수가 이뤄지고 미군정이 들어서기까지 중심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의 해방직후 연설문에서는 그의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운형은 연설에서, "일본 총독부에게 다섯가지를 요구하고 승낙받았다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식량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니 3개월 간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해 간섭 말라
5. 전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 날에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에서 해방된 이후 건준은 과거를 잊고 새 출발하자고 역설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이후, 한반도에서 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중들이 해방 직후 일본인이나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대규모 처단 시도가 없었던 점이 특이하다
2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부역자를 ‘정화’의 이름으로 즉결 처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공격은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이 주도했고, 부역자 중에 희생된 사람은 약 1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이 전쟁에 항복했지만 총독부가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어서 아직 공격이 자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건준의 여운형도 과거를 잊어버리고 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자고 주장했다
식민지 통치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면 정국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폭력사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피해자는 대부분 경찰과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일본인들보다는 한국인 친일부역자들이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힌 형사들과 교사들이 공격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후 일본인과 부역자들에 대한 대규모 즉결처단 행동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해방 이후 건준이 치안과 자치를 잘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분주했다
은행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빼가고 자신들의 재산을 모두 갖고 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얼마나 짐이 많았는지 감당을 할 수가 없어 비틀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한다
한국인들이 "그 재산들은 모두 우리를 착취해 이룩한 거니까 함부로 못 가져간다! 가지고 가려거든 우리를 먼저 죽여라"라며 반발했다
미군정이 반출할 수 있는 개인 재산과 현금 반출액을 제한했다.
일본이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이 일본 재산을 이전하여 자산가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헐값에 일본인 명의의 대규모 토지를 명의이전 받아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일본인 소유 농장의 마름 출신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든지, 면사무소 다니던 면서기가 일본인 명의 토지를 자기 명의 토지로 인수한 것으로 조작해서 막대한 부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을 떠나며, 이연식저, 2012 역사비평사>
미군정의 경제정책을 자문하고 있었던 아서 번스는 ‘미군정에 대한 생각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이라는 문서를 제출했다
(1947년 9월25일자. 버치문서 박스 1).
그의 문서는 한국인 출판부장 강용흘의 제안과 도움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문서에서 해방이후 한국사회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일본통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이 미군정의 고위관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의 중요한 산업을 장악했다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은 미군정 교육부장인 유억겸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일본을 위해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이며, 김연수와 신영욱이 또 다른 사례이다
적산 은행과 기업들은 극우정치 그룹에 많은 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다 알려져 있는 비밀이다.
일제 시기 가장 큰 친일파들이 이러한 극우정치그룹들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김성수, 이승만을 지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1943년 11월5일 서울신문(당시에는 매일신보)을 통해서 학생들을 전쟁터로 동원했다.
백낙준은 일본을 위해 더 애국적인 연설을 했고, 장덕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기간 중 가장 애국적인 연설들을 했다.
이들은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있다.
‘백남운 같은 사람이 감옥에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김성수와 이광수 같은 사람은 모든 특혜를 누리고 있다
군정청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한국의 사정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다.
미국에서 접시닦이였던 사람이 군정의 민정 관리로 일하고 있으며, 미국 대학의 학장이나 지방 목사가 대학총장을 하고 있다. 건축가가 국가식량처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배치된 경우도 있다’.
‘훌륭한 한국의 소설가 미술가 무용가들이 북으로 가고 있다. 이들은 북에 집이 있거나 공산주의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북으로 못 간 사람들은 지하에 묻혀 있다. 미국으로 간 몇몇은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다. 예컨대 로디 현으로 알려져 있는 현재명은 훌륭한 연주자가 아니며 과거 일본 히로히토의 군인들을 위해 연주를 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찰이었다
1946년 10월1일 발생한 대구지역의 시민폭동은 경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드러났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했다
대구 10월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왕래할 수 없었다
대구에는 식량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져, 돈이 있다해도 쌀을 구할 수 없었다
국립경찰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은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시피 공출해갔다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다
10월1일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고, 경찰과 행사 참가자 간의 물리적인 폭력사태로 번졌다
다음날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하면서 순식간에 만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포위하게 되었다
대구 경찰서장은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내놓았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그런데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고,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한편 조선공산당 소속 시위대는 많은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했다미군정은 10월 대구지역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10월 폭동은 대구에서 경상북도로 계속 확대되었고, 민간인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이 1946년말까지 전국적으로 지속되었다
미군정은 경찰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수도경찰총장 장택상이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있으며, 경찰조직은 각종 암살사건과 연관돼 있다고 판단했다
장택상은 암살 이틀 전 여운형에게 지방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암살 관련 정보를 자신의 부하들로부터 얻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승만은 여운형이 암살되기 며칠 전 열린 한 회의에서 여운형을 제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운형은 결국 암살되었다
경찰에서 암살배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련자들도 함구해서 진실은 밝히기 어렵게 되었다
문제는 암살된 사람들이 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였다는 점이다
여운형, 송진우 등의 지도급 인사들이 사라지게 되자 이승만의 위상이 더욱 굳건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암살의 주요 대상이 된 것이었다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치인의 그늘 아래로 모여들었고, 친일 청산을 주장했던 정치인들로 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국상황으로 인해 일제잔재 청산문제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도 주요이슈가 되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역사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근거가 되었다
건국과정은 미국과 소련의 군당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과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만나 한국문제에 대해 합의했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조직하도록 하며,
조직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임시조선정부가 미·영·소·중 4개국 정부와 협의해 5년 이하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는 신탁통치를 결정한 것도 아니고, 조선인을 구성된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신탁통치 여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에 의하면 ‘임시조선민주정부’는 통일된 한국 정부의 성격이나 신탁통치안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정국 주도권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임시조선민주정부는 4개국과 협의해 선택할 공간이 될 수도 있었다
남한에서는 새로운 국가의 출범은 미군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이미 소련군과 김일성에 의해 공산주의로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한국민의 3자의 역학구도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김구 등은 해방후 정국을 주도할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다
광복군과 같은 무장력은 해체되었고, 대중영향력의 측면에서도 다른 독립지도자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미군정 여론조사에 의하면 당시 한국민은 70%이상이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압도적으로 좌파들에 대한 지지가 많았고, 당장 선거로 정부를 구성한다면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미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민중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맡기면 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독일에는 히틀러와 나치가 있었고, 2차대전 이후에는 스탈린과 소련이 전체주의를 이끌었다
양 극단의 전체주의자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자유를 짓밟았다
어느 시대를 살던지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신들의 사회체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국민들도 해방이후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최초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민들은 사회주의를 가장 열망했고, 소위 우익진영과 중도파들의 자유민주진영은 정국주도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소위 우파들은 단합되지 못했고 김구, 이승만 등 반공지도자들 역시 대중적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다
미군정의 한반도 정책이 사회주의 체제를 막는 방파제가 되었다
8.15 이후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고, 한국의 자유주의적 정치지도자들과 협력하기를 희망했다
미군은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한국내 모든 형태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이 직접 통치하는 군정을 선택했다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주목한 사람은 이승만과 김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이 제일 먼저 맥아더의 도움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1945년 10월 4일 뉴욕을 출발해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태평양지구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전까지 미 국무부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승만의 귀국하기 위해서는 국무부와 군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의 귀국에 제동을 건 사건은, 미 합참이 그에게 발급한 여권에 기재된 ‘재미한국고등판무관'이라는 직함에 대해 국무부가 문제를 삼은 것이다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과 같은 직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같은 조치는 미 국무부가 한국내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결국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허용하다는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의 귀국이 가능한 데에는 맥아더와 미군정의 요청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호의적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귀국후 본인 중심으로 독립세력을 재편하고자 했다
한민당의 당수 요청도 거절했고,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 추대도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새로운 조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는 성명을 발표한다
"내가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 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그것을 정식으로나 비공식으로나 수락치 않았다.
나는 중경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타협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데도 관계할 수가 없다
군정청에서는 인민공화정당은 허락하되 공화국정부는 허락하지 않는다
중앙협의회는 정부가 아니며 정부의 대표도 아니며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국권회복을 위하여 각정당이 대동단결하여 한 데 뭉친 단체다
이와 같이하여 나가면 국권회복도 곧 될 것이다"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시정부 요인이 총망라된 단체를 만들어 미군정의 정권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당도 참가했다
그런데 이승만과 조선공산당은 곧 결별을 선언하고 만다
결별의 명분은 친일세력의 청산이었는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先 친일청산’을 요구하며 이승만의 독촉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반면 이승만은 친일청산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대중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임정은 해방이후 상당기간 공식적으로 귀국허가를 받지 못한다
미군정이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은 개인적 자격으로 입국한다는 조건을 재확인 받고서야 가능했다
1945년 11월 19일, 김구는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해 공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사실상 임정이 정통성을 가진 건국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의해 부인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여러 독립단체들 중의 하나로 취급되었고, 임시정부 인사들이 중심이 돼 창당된 한국독립당도 다른 정당을 압도하지 못했다
소위 좌우 정파 모두에게서 유일한 독립운동의 적통이라는 위상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시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인민공화국’ 어느 쪽도 ‘망명정부’로서 임시정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임시정부 관계가 틀어진 계기는, 신탁통치반대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권력을 접수하려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가 알려진 1945년 12월 28일부터 정당과 사회 단체의 반탁 성명이 줄을 이었다.
전국적인 항의와 파업이 지속되었고, 미군정청 한국인 직원 3000여 명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 장군의 요리사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하지 장군이 관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12월 31일, 서울 시내 경찰서 10곳 중 8곳의 경찰서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해 “앞으로 모든 경찰관은 김구 주석의 지시를 따라 치안 확보의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國字 제1호’),
“일반 국민은 금후 임정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국자 제2호’)이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사실상 임정이 미군정의 행정권을 이양받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는 임정의 이같은 권력접수 요구에 강하게 대처했다
그는 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로 규정하며 격분했다고 한다
미 군정은 임정 요인 전원을 체포해 인천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튿날인 1월 1일 오후 2시, 하지와 김구가 반도호텔 미군사령부에서 만났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배반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김구는 “집무실 카펫 위에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맞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반탁 운동을 계속하되 질서 파괴 행위는 자제한다”는 데 합의하고 끝났다.
그날 밤 8시 김구의 대국민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나는 질서 정연한 시위 운동에 대하여 십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업을 중지하고 일제히 복업(復業)하기를 바란다.”
< 조선일보 2024. 김 주석과 임시정부, 실패한 國字 쿠데타 >
김구에 충성을 맹세한 경찰서장 8명은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1월 4일 전원 파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신익희가 CIC(미군방첩대)에 체포돼 이틀 동안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것 외에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임정 요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진압’된 임정의 무모한 정권 인수 시도는 김구와 임시정부측에 대한 미 군정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김구와 임정은 해방 정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결정적인 오보가 정국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지 않더라도 당장 한반도에서 선거를 치루면 한국민은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할 것으로 보았다
반면 미국은 일정기간 조선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 한반도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원했다
그런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원한다는 오보사건이 발생했다
신탁통치 관련 보도를 계기로 정국은 완전히 신탁통치 찬반세력으로 분열하고 집단대결 양상으로 치닫는다
친일세력 청산문제로 다투던 상황에서 신탁통치 찬반대결로 정국프레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우파 진영으로 분류되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즉각 반탁을 결의한다
좌파역시 처음에는 반탁입장에 동조하다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를 지지한다고 밝히며 사실상 신탁통치 찬성입장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물론 신탁통치 찬반운동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발생했는지 어떤 의도로 유포됐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이후 이승만 김구 등 우파진영은 신탁통치문제로 인해 미군정과 더욱 불편한 관계가 되어갔다
앞서 살펴본대로 모스크바3상회의는 신탁통치를 바로 실행하자는 결정은 아니었고, 과도기적으로 임시조선민주정부를 구성한 다음, 신탁통치실시 여부와 기간을 美·蘇와 함께 논의하여 정하도록 한다는 합의였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
찬탁론자들을 향해 친일분자와 같이 대우할 것이고, 언젠가 민족의 이름으로 재판할 것임을 시사했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쟁과정에서 희생된 정치지도자가 있었다
고하 송진우가 신탁통치 찬반논란 끝에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한민당을 이끈 인사이며 중도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신탁통치 발표 직후 신탁통치 결정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이틀후, 김구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 세력과 민족진영은 반탁투쟁을 결의했다
처음에는 좌익들도 신탁통치 반대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런 상황에서 송진우만이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원론적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도 읽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과 군정을 적으로 몰 수 있으므로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그 이후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로부터 이틀후 12월30송진우가 암살되었다
아마도 송진우는 민족주의 진영에서 배신자나 변절자로 비춰졌을 것이다
해방후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견해를 달리하는 같은 진영의 사람들' 조차 용인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후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은 좌우대결 보다는 소위 우익진영의 반대파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중도노선을 배신이나 변절 또는 기회주의자로 보려는 극단적 도그마, 그리고 성숙하지 않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정국에서 이념이나 노선 문제는 당사자들이나 후세 사가들에 의해 과장됐다고 한다
1947년 2월에 희생된 장덕수도 모스크바 3상회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익인사들은 장덕수가 찬탁했다고 몰아세웠다
1947년 장덕수의 암살에는 김구 지지자들이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구 휘하에 있었던 김석황이 관여되었고, 김구 역시 배후로 의심받아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찬탁은 매국이고 반탁은 애국이라는 공식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는 잣대에 불과한 것이었다
< 해방정국의 풍경 중에서, 신복룡 >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미군정은 소련과의 합의에 의해 남북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임시과도정부를 조직하고, 이 정부가 미국, 소련과 함께 한국을 통치하게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을 선발해야 했다
그런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자유주의진영의 대표들이 모두 반탁을 주장하며 미소공위 자체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미군정은 미소공위 대표로 나가서, 소련과 좌파들도 합의될 수 있는 정치지도자가 필요로 했다
반공을 전면에 내걸고 활동하는 이승만과 김구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들과 거리를 두게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군정은 마침내 장차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승만과 김구를 2선으로 물러나게하는 결정을 내린다
미군정의 이런 입장은 흔히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견과 큰 차이가 있다
흔히 미군정은 미소공위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한편으로, 내심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했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미군정과 이승만을 분단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가설에 불과하다
서울대 박태균교수가 발견한 버치보고서에서는 당시 미군정의 정책변화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946년 6월20일 미군정 하지중장은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과 면담을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하지는 이승만과 김구에게 전면에 나서지 말고 김규식을 뒤에서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6월26일에는 하지가 자신의 관저에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주요 정당의 자도자들을 불러서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취지를 밝혔다.
미군정은 더 이상 이승만에 대해 공식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 미군정 버치 문서 박스 1).
미군정의 다음 선택은 김규식이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김규식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김규식은 온화하며 합리적이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식민권력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을 정도로 영어 실력도 뛰어났다
조용한 듯 보였지만 강단이 있었고, 작은 체구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보수적이면서도 꽉 막히지 않은, 유연한 입장을 가졌다
김규식의 유일한 문제는 건강이 안 좋았다는 점이다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1947년 3월29일, 버치 문서 박스 3).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은 미군정이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주도했다.
“김규식은 한국의 입법의원에서 완벽한 리더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의 필요한 목적을 얻기 위해 가장 근접해 있는 리더이다.”
(‘입법의원에 대한 정책’, 1947년 1월2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미군정은 김규식이 임정 소속이었지만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 정치인들과도 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소련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미군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군정은 김규식을 지원할 수 있는 인물로 다시 여운형에 주목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여운형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한 바 있었다
당시 한국민들에게 대중적 인기가 높고 영향력이 큰 여운형을 참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협력을 요구하던 미군정에 잘 응하지 않았다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방침은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으로 변했다
1946년 여운형이 친일한 전력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군정이 그의 과거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과거 한국을 통치하던 일본인을 대상으로 심문이 진행되었다
미군정은 조사 끝에 여운형의 친일보도는 완전한 오보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군정이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는 처음에 여운형의 반역과 일본에 대한 협력을 찾는 데 집중”되었지만, “심문을 하면서 증언자들이 여운형의 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이러한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그에대한 명예훼손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사관들 조차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찬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한다
미군정 보고서에서 판단한 마지막 보고내용에서,
“우리는 그가 ‘밑으로부터’ 남과 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공백으로부터 더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잘 도망다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하여 미군정은 김규식-여운형라인을 구축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여운형은 해방이후 좌파정치인으로 분류되지만 실은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인다
그는 1907년부터 초기 민중교회였던 승동교회(종로구 인사동 위치)에서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다
1911년부터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고,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이미 1908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친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살라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켰다.
동생 여운홍은 형의 행동이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전했다
집안에 있는 터주, 성주, 군웅 등의 단어가 적힌 서적들을 꺼내 모두 불살랐다.
이 일로 동네 양반들과 선비들로부터 백안시 당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여운형이 일본제국호텔에서 행한 연설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일본은 여운형을 국빈으로 초대해 극진하게 대접했는데, 그 의도는 그를 회유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탈퇴시키고, 임정을 분열시켜 보려던 것이었다
실제 여운형 일본방문을 두고 임정의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1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도쿄행은 개인행동'임을 천명하면서 반대했다
반면 안창호는 '몽양의 국가를 위하는 열렬한 충성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신임합니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일본 정치인들의 회유와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일본 장관들을 설득했다
제국호텔에서 행한 연설문에서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1919년 11월 28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여운형의 연설>
이 연설로 인해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하라 내각이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며 이에대한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직면했고, 결국 하라내각이 붕괴하는 등 일본정국이 요동쳤다고 한다
일제때 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운형은 좌파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수용하는 중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부드러운 태도를 가진 인물로, 이념적 성향이 다른 공산당과 사회주의자와도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정치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미군정은 이런 여운형을 김규식의 파트너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통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추진되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좌우합작의 목표는 사상, 이념을 뛰어넘어 좌우익이 단결하고 남북연합을 통해 중도적인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김구 등의 반탁운동, 박헌영 등의 공산당의 이탈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당시 이승만은 지방을 돌며 대중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삼남지방 유세 도중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을 발표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결연히 반대했다.
여운형은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10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라고 비판한다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 안재홍 등의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진전시켜간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는 일이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 좌측 대표로 선출되었다
공산당과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에 거리를 두면서 여운형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불신했고, 공산당의 진로에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박헌영이 1946년 6월 23일에 합작 5원칙을 발표했는데,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부기능을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즉각 이양할 것 등을 주장했다.
사실상 좌우합작 원칙을 전면 거부한 내용들이었다
여운형은 명백한 반대의사를 밝히면서 박헌영을 설득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박헌영의 입장은 김일성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고 비판했다고 전해진다
1946년 10월 7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좌우대표들이 제시한 내용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합의 원칙을 발표하던 날이었던 10월 10일 아침, 김규식이 극좌세력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는 결국 회의에 참석을 못했다
이 날 양측대표가 합의하고 결정하여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된다.
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 유상몰수, 농민에게 무상 분배, 주요산업 국유화,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 등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 기구 제안
5. 남북에서 정치 운동자의 석방, 남북 좌우익 테러 중지
6. 입법기구 구성과 운영 등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작성 및 실행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 보장
좌우합작위원회는 통일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원칙을 마련한 것이었다
통일된 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친일청산을 제안했다
또 국민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고, 입법기구를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자유주의체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토지분배와 주요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수용하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좌우합작운동은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끝나게 된다
여운형은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5월에는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김규식·김창숙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운형은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에게서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해방이후 영향력이 컸던 여운형의 암살로 인해, 사실상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되는 변곡점이 되어버린다
미군정도 더이상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조선임시정부 수립에 기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미군정 자체 조사에서는 여운형의 암살 배후에 경찰세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버치보고서에서는 경찰수뇌부들이 존재하는한 여운형의 암살 배후를 밝히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버치가 기록한 여운형 암살관련 내용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시기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놓여 있는 시기였다.
반탁운동 세력들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반면 3상협정 결정안에 찬성하는 세력들은 1947년 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면서 결정안에 규정되어 있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조선정부’의 수립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한국민주당 역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통합위원회에 의한 선언’ 1947년 7월15일자, 버치문서 박스 2)
그래서 극우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테러 관련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고, 김규식은 자신과 식솔들을 지키기 위하여 무기 소지를 허용해 달라고 미군정에 요청했고,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하지 장군의 지시로 3정의 권총을 지급받았다.
(‘무장에 대한 김규식의 요청’, 1947년 7월8일자)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버치는 암살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김구를 왜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메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버치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배후는 김구가 아니었다.
경찰은 암살이 발생할 때마다 김구가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문제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모든 혐의를 김구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
암살범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여운형의 경호원과 운전사를 체포 구금하고, 암살범을 체포하려고 쫓아갔던 사람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하지는 여운형의 경호원과 운전사를 풀어주라고 했지만 그 명령은 무시되었다.
(‘여운형 케이스’, 1947년 7월22일자, 버치문서 박스 1)
당시 버치는 암살범의 실체와 배후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한 추정을 하고 있었다
버치가 남긴 한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 작성자는 친일 경찰을 비판하고 이승만에게 직접 대항했던 최능진이었다.
그는 경찰이었고, 대구 사건의 원인이 친일 경찰에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자가 23세의 신모씨라고 한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19세의 한지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지근은 임정 요인의 집에서 체포되었는데, 이미 준비된 것이었으며, 그 뒤에는 친일경찰 노덕술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희생자가 김규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버치는 여운형의 암살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경찰행정을 바꾸지 않는 한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운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이승만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지만, 현재로서는 답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후 여운형의 암살은 정확히 규명되지 못했고 미궁으로 묻히고 말았다
여운형의 암살로 미군정의 좌우합작 노력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당시 남한내에서 좌파를 이끌 정치지도자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로 보면 우익진영이 남북한 모두를 관장하는 자유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공주의자이고 북한의 소련군이나 공산당과는 결코 협력할 수 없는 정치지도자였다
여운형의 죽음은 좌우합작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미군정의 통일정부 수립 전망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운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김규식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끌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여운형의 조직은 그가 죽자마자 바로 분열되었다.
좌우합작의 실패는 곧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의미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한국인들은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인물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박태균의 버치보고서, 여운형의 죽음과 친일경찰, 2018.08.19>
1946년 이승만의 정치적 선택은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군정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하지중장으로부터 2선으로 물러나라는 말을 들었다
이승만은 김구와 경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지방에서부터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유주의체제를 경험했고, 선거에서 대중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방에 있었고, 지방에서 승리해야 의회 다수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영남과 호남, 충청에서 지방순회연설회를 기획하여 진행한다
지방순회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한 반공우익지도자로 정립하는 한편, 정읍발언으로 알려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략적 목표로 선언했다
이승만은 지지기반이 취약한 지방에서부터 대중을 직접 상대하는 대중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승만 연설의 핵심내용은 모두 반공과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의 자유를 빼앗고, 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통일정부 수립은 이상적이나 현실은 다르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민족의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
이승만은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
'남한 단독 정부' 주장은 당시에 민중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했고 좌우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민주정부를 추진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좌우합작이 실패하고 남북정치협상이 결렬되었다
남북한은 각자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 나아가게 되고, 이승만의 정치적 선택과 맞아떨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정부 수립의 마직막 노력은 김구, 김규식의 남북정치협상이었다
1948년에 들어서 김규식은 남북의 지도자회담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한다
미군정의 버치는 김규식, 이승만, 김구 3인과 남북지도자회담을 개최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승만도 남북 지도자회담에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승만이 참여해야만 모든 지도자가 참여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만약 이 회담이 실패하면 한 지역에서의 선거 정책을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노력들은 철저하게 외세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김규식-유엔’, 1948년 2월12일자, 버치문서 박스5)
당시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 진행된 것이다
분단이 아니라 통일을 원하고, 다양한 정치세력이 연합하여 서로를 인정하는 남북연합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은 당당하게 '이승만에게는 마지막 시도이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라고 힘주어 말했다
남한 단독선거를 앞둔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남북 지도자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남북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첫번째 기회가 마지막 통합노력이 되고 말았다
1948년 5월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졌고, 최초의 자유주의 체제는 반쪽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승만은 미군정 3년 동안 자신의 정치기반을 착실하게 다져왔다
일제 잔재청산에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해 대중적 인기가 약화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경찰 등 과거 친일경력과 같은 약점이 있는 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반공의 기치를 명확히 내걸어 우익진영의 청년단을 자신의 지지로 돌려세웠다
해방이후 권력을 장악한 미군정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정치기반을 다졌다
남한만의 단독선거 주장은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대로 진행되었다면 이승만은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고, 남북협상 노력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려던 시점에는 미소 냉전이 급속히 악화되던 시기였고, 이승만은 확고한 반공노선을 선점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다져갔다
미국의 트루만대통령은 1947년 3월 의회연설에서 소위 '트루만독트린'을 발표했다
자유를 위협받는 모든 국가를 지원하며, 특히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동유럽에서 소련 위성국가들이 세워지고, 아시아 아프리카 독립국가들이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미국 국내에서도 공무원에 대한 충성심 심사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수많은 공무원들이 사상검증을 받고 쫒겨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반도 북쪽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공산당 정권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자유주의 체제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변화를 잘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확실한 반공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을 것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주장은 인기가 없었지만 정치적 상황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승만의 정치적 선택이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승만의 선택이 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미군정의 선택이 중요했다고 본다
미군정에서는 임시조선정부 수립을 위한 세 가지 초안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입법기구에 대한 선거 이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이고,
두 번째는 남한의 입법의원과 북한의 입법기구를 통합하는 방안
세 번째는 입법기구를 선거하기 이전에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행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만드는 방안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새로 들어설 국가체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이 초안은 임시조선정부의 ‘헌장(charter)’으로 돼 있는데 헌법과 같은 내용이다
헌장에서 규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헌장의 1장은 임시조선민주정부가 통합된 한국의 유일한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3장의 제1항은 행정·입법·사법권을 실행하는 권력분점 내용, 임시조선민주정부가 법률을 제정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외교와 관련하여서는 해외에 외교와 영사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기관을 설할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라는 현존하는 권력의 허가하에서 이뤄지도록 했다
3장 4항에서는 사법권의 독립을 규정하고 있다
다만 외교권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 그리고 한국에서 복무하고 있는 미군 및 소련군, 그 군속에 대한 사법권에 대해서는 기존의 미군과 소련군의 허가를 받도록 제한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은 5장에서 규정하고 있다
모든 한국인들의 평등권, 종교·인종·성별 또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 집회·결사 및 출판·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독립된 법원에 의한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는 생명권을 보장받을 권리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한 것은 7장에서 반(半)무력집단의 해체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각종 청년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시조선민주정부의 제안된 헌장’, 날자 미상, 버치문서 박스4)
미군정은 처음부터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한반도 전체의 앞날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합 정부는 자유주의체제로 수립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미군정이 이승만과 협력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탄생시키려는 계획은 없었다
미군정의 한반도 구상은 비록 완성되지 못했고,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