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과 경제개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국민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주의 체제를 지키려면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데 있다
인권의 출발은 국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적 빈곤이 해결되어야 한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자유를 말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토지개혁이었다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민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남북한 그리고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자
미군정 치하에 있었던 남한과 일본, 북한의 사회주의식 토지개혁의 실체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례가 농민들에게 절실한 토지를 제공하고 농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방안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미군정이 남한과 일본에서 실행한 토지정책이 판이하게 달랐다
결론적으로 보면 미군정이 일본에서 혁신적인 토지개혁을 추진했지만, 남한의 미군정은 토지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토지개혁 대신 소작료를 수확량의 3분의 1만 낸다는 3.1제(33%)를 시행하는데 그치고 만다
1946년 3월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시행되면서, 남한 농민들도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해방정국에서 소위 우파 지도자들은 토지개혁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실행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즉 생존이 있고서야 자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기본 원칙도 무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요구를 조직화하고 정치세력으로 결집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맥아더 미군정은 일본에서 제국주의 사회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1945-1947년까지 전쟁범죄자에 대한 재판을 열어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일본군의 해체, 전직 일본군 장교의 새 정부 참여 금지 조치 등을 취했다.
극동 전범 재판에서 전쟁 발발과 수행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이들 중 7명이 교수형을 당했고 4370명이 유죄를 받았다.
군인과 공직자 중에서 전쟁 책임자에 대한 공직 추방이 이루어져, 총 22만 명이 공직에서 쫓겨났다.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지탱하던 치안유지법과 특별고등경찰제도가 폐지되었다
미군정은 경제분야에서 전시 거대기업을 해체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일에 착수했다
군수산업과 지주들은 천왕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기에 그 경제적 토대를 와해시키는 일에 집중한 것이다
맥아더의 특이한 정책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활성화시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략이었다
'노동조합법'을 통과시켜 노조 결성을 장려하자, 3만 5천여 개의 노동조합에 6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했다.
노조를 기반으로 한 합법적 좌파 정당이 성장하여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효과를 보았다
전후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면서 사회당·민주당 연립내각이 수립될 수 있었다
미군정은 토지개혁을 추진하는데, 매우 강도 높게 진행된다
지주의 토지소유 제한이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는데, 자작지가 아닌 경우 1인당 1 정보(약 3천 평)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규정을 만들었다
지주의 초과토지를 공시지가 수준에서 강제로 매입했다
농지에 대한 보상은 채권증서로 지급했는데, 이 농지채권은 이자율도 낮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실상 헐값에 매입한 셈이 되었다
정부가 매수한 토지는 농민들에게 30년 장기분할로 분배되었다
유상몰수 형태를 띠었지만 사실상 헐값 몰수였고, 지주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본 전체에서 1 정보가 넘는 소유지를 전부 유상몰수대상으로 설정하여 192만 정보의 농지가 자작지로 확보되었다
1949년에 자작농이 55.0%로 전체 중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남한과 일본에서의 미군정기 점령정책 비교연구, 최복천 논문, 1998>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서 소작농을 줄여 사회적 불만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운동의 기반을 차단하고자 했다
당시 전후 일본에서는 지주들이 농산물을 사재기하거나 시장에 내놓지 않아, 심각한 식량부족사태를 겪고 있었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공급되던 쌀이 중단돼 더욱더 품귀현상을 보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토지개혁이 필요했을 것이다
똑같이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던 한반도 남측에서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소작료를 1/3로 제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군정 통치하에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토지개혁에 대한 정책이 크게 달라졌을까
해방되고 얼마 후에 벌어진 신탁통치 싸움, 찬탁과 반탁대결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블랙홀이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살펴보면 얼마나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1946년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전격적 추진했다
북한 지역의 농경지 약 200만 정보 중 100여만 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몰수되었고, 이 중 90여만 정보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되고 나머지는 모두 국유화되었다
김일성은 토지개혁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끌어올리고 확고한 권력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북한에서 일제 잔재 세력과 대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하게 되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 농민조직을 건설함으로써 공산당의 조직적 기반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북한 토지개혁도 농민의 토지 소유를 사실상 허락하지 않았다
경작권은 인정하되 매매와 임대 등을 금하고 있어서, 사실상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북한은 '농업현물세'를 걷어들이고 결정하고 수확고의 25%를 국가에 바치도록 한다
경작권만을 가지면서 25% 현물세를 내는 것은, 과거 지주에게 바치던 소작료가 국가에 내는 세금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토지소유는 실질적으로 국가소유이므로,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부담시켰다는 논리이다
지금 한국에서 25% 현물세를 내라고 하면 농민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들이 북한의 토지개혁을 최고의 농촌정책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6.25 전쟁 이후에는 농촌 사회주의화를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집단농장화 하였다
북한은 토지개혁 이후 '애국미 헌납운동'을 전개하여 또 한 번 농민들의 쌀을 걷어들였다
애국미헌납운동을 추진한 계기는 1946년 황해도 재령의 농민 김제원이 자신이 수확한 쌀 수십 가 마니를 김일성에게 기증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토지개혁으로 하사 받은 땅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식량을 기증한다고 했다
공산당의 선전 선동 방식은 하나의 모범사례를 만들고, '00를 따라 배우자'라며 강제로 참여하게 하는 방식을 자주 쓴다
김제원은 북한에서 애국민헌납운동의 전설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북한에서 충성의 애국미헌납운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난 이후,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지만 현물조세와 애국미헌납운동으로 그들의 손에 쥘 수 있는 식량은 많지 않았다
공산국가가 지주를 대신하는 형국이 되었고 대다수 농민들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미군정이 끝나고 정부수립 이후에야 추진되었다
그간 남한 농민들의 불만은 거세게 증폭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세력이 급속히 확산하던 시기였고, 소위 좌파계열 정치세력은 농민들의 불만이었던 지주-소작 관계 해체를 주장하고 있던 때였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절대다수였던 농민들의 요구를 실행해야 했다
이승만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토지분배가 늦어지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실행된 지 3년이 지난 1949년에야 남한의 토지개혁이 진행했다
1949년 조봉암 당시 농림부장관이 진행하였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취했다
1945년 남한의 농지는 모두 약 230만 정보였다고 한다
정부가 유상몰수할 수 있는 토지는 소작농지와 3 정보이상의 토지에 국한된다
정부가 사들인 농지면적은 전체농지의 25.5%, 전체 소작지의 40%에 불과하다
토지개혁 이슈가 너무 장기화되어, 지주들이 사전에 농지를 매각하거나 토지개혁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민들은 매년 30%의 수확량을 5년간 현물로 상환하게 하였다
3 정보 이하 토지주들은 유상몰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농민들은 매년 수확량의 30%씩을 5년에 갚아야 하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면서, 농민들이 토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0년 전쟁으로 인해 인플레가 발생하면서 사실상 유상몰수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지주들 역시 급격히 농촌에서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조 : 남북한 해방전후 농지 및 토지개혁과 통일대응 법제연구, 한국법제연구원 손연우>
1956년 농촌에서 자작농이 약 70%까지 증가했다는 정부통계자료(농림통계연보 등)가 있다
소작농이 감소하고 농촌에서 지주-소작 관계가 구조적으로 붕괴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소위 우파진영에서는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한미동맹체결'과 함께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과연 이승만정부가 농민의 빈곤과 생존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농촌에서 자작농을 늘리는 외향상의 성과를 가져왔지만, 소작농 대신 작은 토지로 연명해야 하는 소농들이 늘어나는데 그쳤다
사실상 지주계급이 힘을 잃었지만, 농민들은 작은 토지에 의지해 빈곤을 해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토지개혁은 형식상 자작농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사로 살아가기에 충분한 땅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했다
토지개혁으로 몰수한 토지는 52만 정보인데 약 140만 농가에 분배하다 보니, 평균분배 면적은 0.3~0.5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사지어 30%를 정부에 내고 생활하자면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다
여전히 농촌에서는 손바닥만 한 땅에 의지해 생활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일부 소농들이 토지를 이탈하여 도시로 떠나는 이농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사람의 농토를 소작하거나,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길 뿐이었다
이승만정부의 농지개혁은 통계나 해석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실상은 절대다수의 농민이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와는 너무도 먼 정책이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벌어진 토지개혁은 너무나도 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농민들이 이념에 따라 달라지고,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달라졌다
토지개혁 이후 각 지역의 농민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개발 과정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을 뻬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아직도 경제성장과 자유주의 체제를 지켜낸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군사쿠데타와 인권 탄압이라는 측면에서 어두운 독재자의 그늘이 남아있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했다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한 주역이며, 쿠데타 성공 이후 모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다
군사정변은 1960년 5월 16일 서울에 육군등의 군사력을 동원해 정부기관과 국회, 방송국과 경찰서를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4.19 이후 정권을 유지하던 민주당 장면총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은신해 버리는데, 이로써 사실상 무력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5월 18일 장면총리는 내각총사퇴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고 사실상 군정 통치를 시작했다
미국은 갑작스러운 군사쿠데타에 무척 당황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장면정부의 붕괴를 보면서 쿠데타세력을 불법세력으로 간주하였다
군사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와 김종필과의 대화를 보면 미국과 군사쿠데타세력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의 군사력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가진 최고 권력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매그루더는 5월 16일 오전 AFKN을 통해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5월 19일 김종필을 만난 매그루더는 "한국군 지휘권은 내게 있다. 당신들이 내 허락 없이 전방부대를 이동시킨 것은 마이어 협정 등 위반이다. 원위치시켜라"라고 요구했다
이에 김종필은 "우리는 레볼루션(Revolution·혁명)을 한 사람들이다. 레볼루션을 하면서 어떤 녀석이 몇 날, 몇 시에 어떤 부대를 이끌고 혁명하겠다고 미리 신고하느냐. 그런 레볼루션도 있나"라고 반박했다
매그루더는 “내 지휘권 침해를 용인할 수 없다”라고 또 소리쳤고, 김종필도 맞고함으로 맞섰다고 한다
이런 소동은 매그루더가 일부러 김종필을 시험한 것이었다고 한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에게 “일부러 그랬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매그루더는 군사혁명정부의 계획과 정책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김종필은 “우선 배고픔부터 없앨 것이다. 외국 자본을 끌어다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산업을 일으켜 국민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할 것이다. 미국의 지원을 기대한다”라고 답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열려고 한다. 우리가 일본과 손을 잡으면 미국의 태평양 방위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
김종필과 매그루더의 대화는 매번 박정희 소장에게 보고됐고, 5·16 이후 새로운 한·미 질서에 관한 주요한 합의가 마련됐다.
그리고 미군은 5·16 쿠데타를 승인하고 협력과 지원을 약속했다.
군사정부는 서울에 진주한 전방부대(6군단 포병단, 해병1여단)를 원위치시키기로 했다.
주요 군 인사를 할 때 사전 협의하겠다고도 약속했다
박정희 소장과 매그루더가 만나 합의를 이뤄내고, 5월 26일 한·미 간 공동성명이 동시에 발표됐다.
쿠데타 10일 만에 미국과 군사정부가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1961년 미국 케네디 정부는 국가재건최고회를 사실상 승인하고, 경제원조와 군사적 협력도 유지하기로 한다
박정희는 이 당시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1963년에 대선을 치르기로 하였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는 미국의 승인으로 권력장악에 성공한 셈이 되었다
미국의 승인 배경에는 냉전시대에서 반공이 우선이었고, 한반도 안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박정희의 좌익활동 전력이 있어 불안했지만 확고한 반공 태세 강화를 내세웠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전한다
군사정부가 빠르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도 작용한 것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한미 군사동맹의 연장선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헌정질서가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군사정부는 반공과 냉전 전략에 따라 상호 승인과 협력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키워드는 경제발전이었고, 가난 퇴치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헌정중단과 민주주의 후퇴를 만회할 국가적 어젠다로 '경제발전'을 내세웠다
미국원조와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고 있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면 '성공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11월 박정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외국 민항기에 미군 수송기까지 빌려 타고 사흘 만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미국은 헌법상 국가원수는 아니지만 국빈자격을 부여하고,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영접도 받았으며 양자 회담도 가졌다
박정희는 특히 경제발전을 위해 해외원조가 절실했던 만큼 경제원조에 초점을 맞춰다.
정상회담에서는 베트남파병까지 제안하면서 경제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 방문은 큰 소득 없이 끝났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재원문제였다
박정희는 초기 자본축적을 위해 크게 세 가지 방안을 동원했다
하나는 한일국교정상화로 자금을 보상받는 방안이고, 또 하나는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자금이었고, 그리고 간호사와 광부 등을 해외로 파견하여 얻는 외화벌이 등이었다
모두가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자본 축적 방식이었다
한일청구권은 과거 식민지 시절에 대한 청구권적 성격이고, 베트남 파병은 젊은이들의 참전 대가이며, 해외로 간 국민들의 희생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었다
군부가 제일 먼저 시동을 건 사업은 베트남파병이었다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면담에서 베트남 파병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케네디는 박정희 파병의사에 대한 직접적 발언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미 국무부는 "동맹국으로 한국이 자유진영방어에 기여하려는 자세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케네디대통령은 베트남전의 전면적 파견에 유보적 입장이었다
이 당시 케네디는 "나는 아시아 청년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미국 청년들이 9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가서 대신하게 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해 직접 지상군 투입을 거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회담에서는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는 미국무부 자료도 있다
박정희는 방미과정에서 차관 등 큰 성과를 기대했지만 귀국 시 손에 쥔 것은 별로 없었다
미국은 차관공여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된 사건 이후 미 대통령이 바뀌면서 베트남파병이 진행되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 재직하던 1964년부터 한국의 의료단과 공병부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 한국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약 5만여 명의 군인이 파병되었고,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
베트남 파병을 통해 얻은 수당과 임금, 기업들의 수입을 합하면 약 10억 3천만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이 당시 수출목표가 한해 7억 불이었고, 한일국교정상화로 얻은 청구권 자금과 차관이 8억 불이었으니, 얼마나 큰 자금이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사망한 군인들이 5천여 명에 달하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한 참전군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이 당시 한국 청년들의 희생은 자유우방에 대한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묻히고 말았고, 경제개발은 그들의 희생 위에 진행되었다
군사정부는 처음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1962년 당시 화폐단위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조치를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 확보된 자금은 충분치 않았다
미국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차관을 빌려주는데 소극적이었는데,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이 너무 의욕이 앞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주요 재원으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자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수교협상을 전담한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협상 진행과정에서는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된 것이 중대한 기로였다
김종필과 일본외상 오히라는 비밀회담을 진행했고 이 회담에서 한일수교 조건이 합의내용이 정리되었다
김종필 회고록에서는 당시 진행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시 최대 문제는 일본이 경제협력자금으로 내놓을 금액이었다고 한다
김종필은 최종 담판에서 일본이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오히라는 처음에 5천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고, 김종필은 그 정도로는 협상이 진행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종필은 접점을 찾지 못하자 일본 전국시대(1491~1565년)의 고사를 꺼내 오히라를 설득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일본 전국시대 3인의 장수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당신네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의 성격을 잘 안다
이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300년 동안의 도쿠가와 막부가 이어지지 않았느냐.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오다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거든 죽여버려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울려 보자’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했다.
당신과 지금 내가 마주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여야 하겠느냐, 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겠느냐. 우리는 어떻게든 새를 울게 만드는 도요토미 방식을 택해야 하는 입장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5000만 달러라고만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
오히라는 놀란 표정으로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들었느냐?”라고 물었다.
김종필은 “내가 나서부터 일본말을 배웠다.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 당신네 나라 역사를 안다”라고 대답했다.
오히라는 속내를 드러내고 복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처음에 오히라는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전부 5억 달러를 제안했다
김종필은 다시 제안하여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하고, 민간 베이스에서 1억 달러 플러스알파를 꺼냈다
결국 김종필이 제안한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알파’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으니 얼마나 큰돈인지 짐작할만하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이때에 작성되었고 각자 박정희와 이케다총리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지불금의 명목을 청구권으로 하느냐 경제협력 자금으로 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했다.
이 합의를 토대로 한일국교정상화 협정이 진행되었고, 갑론을박 끝에 타결했다
1965년 양국 외무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1억 3000만 달러)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등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와 관련기업들이 대일 청구권과 관련한 배상금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동책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물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피해에 대한 사과와 보상문제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한편 김종필의 '독도폭파설'도 오히라 회담에서 오간 내용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은 사실과 다르게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일본 오히라 외무상은 회담 말미에 독도와 관련하여, “독도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자꾸 문제가 된다면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용의가 있다”라고 했다.
이에 김종필은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결코 국제사법재판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관련 당사국이 응소(應訴·소송에 응함)하지 않으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게 돼 있다.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떠들고 난리를 쳐도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한테는 줄 수 없다”라고 쐐기를 박았다고 했다
이 내용이 독도와 관련한 대화의 전부라고 한다
네 시간의 회담 중 독도에 대해 우리가 나눈 얘기는 맨 마지막 10분도 채 안 됐다고 전한다
이런 대화내용이 와전돼 ‘김종필이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 방해가 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JP가 한·일 회담 때 독도를 폭파하려 했다”라고 증언한 내용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김종필 회고록>
다음으로 경제개발에서 큰 재원이 되었던 일은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외화벌이였다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서방의 소위 ‘기술원조’라는 명목 때문이었다
냉전시대에 개발도상국들을 자유진영에 편입시키고자, 선진국의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취지였다
1963년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은 한국 광부들을 서독에서 교육시켜 한국의 광산업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협정은 여러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서독광산협회는 한국 광부를 막장에만 투입하는 조건으로 협정을 받아들였고 값싼 노동자들을 공급받는 기회로 활용했다
한국의 광부들은 일자리를 변경하거나 옮길 수 없었고, 노동계약을 해지하거나 연장할 수도 없었다
노동계약이 해지되면 체류허가도 취소되는 최악의 조건을 달았다
독일 파견 광부들은 광부 출신도 아니고, 체류기간 이후에 광부로 살아간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1963년에 시작된 광부 파견은 1977년까지 약 14년 동안 7,936명의 광부가 파견되었다
독일로 간 광부들은 경험이 없는 일반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막장노동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독일 광부가 사용하는 도구는 키 작고 힘 약한 동양인에게는 맞지 않았다
독일노동자들은 대놓고 한국 출신 광부들을 무시하고 차별하였다
파독 광부들은 몇 차례 파업을 감행했다
독일인과 동등한 임금, 체구에 맞는 노동분야, 외국인 혐오 금지 등을 요구했다.
1965년 독일의 카스트롭 라욱셀 지역에서 한국 광부 150명 전원이 파업이 발생하였다
한국인 광부가 독일 광부와 몸싸움을 벌이다,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폭행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3일간 진행된 파업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였다
독일노동자와 동일한 대우를 바랬고, 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와 멸시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으며, 신체조건에 맞는 일을 배당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파독 광부의 삶은 변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똑같은 요구를 내건 파업들이 계속되었다
당시 파견된 교포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일자리를 전투장으로 표현했고, 동료를 전우로, 노동행위를 전투행위로 보았다
3년간 군대에 다녀온 군사문화 영향도 있었지만, 그만큼 육체적 압박감에 내몰리고 있었다고 한다
< 독일교포신문, '파독광부 60년' 2023-7-31 >
소위 기술원조로 진행된 광부파견 사업은 우리의 광산기술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경제개발 사업에 큰 원천이 되었다
3년간 파견된 광부들은 대부분 많은 돈을 벌어서 한국에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파견된 광부 들은 절반정도가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에 머무르기를 원했지만 독일정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광부들은 독일에서 체류연장이 가능했던 파견 간호사들과 결혼하여 독일에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일부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파독 광부들은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의 해체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마지막까지 광부로서 일하던 800여 명은 자유로운 직장 선택과 체류 허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 외국파견 노동자들이 초기 경제개발시기에 매우 중요한 재원을 만들었다
일본 청구권자금으로 받은 8억 달러와 베트남 파병 기간의 약 10억 달러는 매우 큰 자금이었다
경제개발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이었지만, 개발방식은 철저히 국가주의, 관료주도적 모습을 띠었다
정부는 경제발전과 빈곤탈출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더 많은 희생과 분발을 요구했다
국가 발전과 개인의 삶을 직결시키는 집단주의가 사회전반에 확산되었다
개인의 삶과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문화는 당시를 살았던 앞선 세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정부는 하나의 국가기업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다
당시 기업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대기업의 계열사처럼 육성되었다
정부는 기업집단을 움직이는 기획자이고 실행집단으로 변모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기 자본조달도 정부가 나서서 해결했다
정부에는 경제 전반을 기획하는 경제기획원이 있었고, 국가 전체자금 관리는 재무부가 맡았다
문교부는 전체국민의 교육을 관리 감독하여, 경제발전에 필요한 이공계 인력양성을 추진하였다
전체 산업에 대한 진흥, 수출과 원자재 조달 등은 상공부가 맡았다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의 처우는 매우 열악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집단시위는 철저히 봉쇄되었고, 정상적인 노조활동도 경찰력으로 억제되었다
모두가 경제발전을 위해 달려가는 동지이고 전사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 시기를 산업화과정이라고 말하고, 박정희 리더십으로 산업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국가주의의 함정이 있었고 아직도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집단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개인주의와 다양성은 국가 전체의 목표를 위해 무시되거나 배척되었다
정부가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소위 관치경제가 주도하고 있다
아직도 정부가 모든 시장질서를 통제하고 각종규제로 민간 경제활동에 개입하고 있다
항상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IT시대에는 정부가 IT산업을 이끌고 주도해야 하며, AI시대에도 정부가 앞장서 AI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문제는 관료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끌고 갈 능력이 없는데 자꾸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
관료들이 금융과 투자기관을 움켜쥐고 있고 시장도 규제로 얽어 놓았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시장과 자율은 사라지고 경제적 다양성은 정부 규제틀 안에서만 허용되고 있다
경제분야 자유주의는 정부 관료들의 손 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주의 함정이 만들어낸 대한민국 경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은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자산과 소득의 격차 확대 등 경제적 불평등은 극심해졌다
아직까지도 대기업 집단의 경제적 독점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아직도 1년 국내총생산(GDP)에서 5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48%로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데, 나머지 절반이 대기업과 관련 없는 국민경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1965년 3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5%를 차지했으나, 1979년에는 약 45%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2024년 기준으로 30대 기업의 총매출은 약 1845조 원으로 GDP 대비 76.9%까지 상승했다
이러한 집중현상은 박정희시대에 시작되었고, 80년대 이후 민주화시대에도 해결되지 못했다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자본이 축적되었고 모두의 땀과 노력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했는데, 성장의 결과는 대기업에 집중되었다
재벌과 대기업들이 과연 자본을 축적한 적이 있는지, 정부의 도움 없이 기술과 시장을 개척한 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의 몫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80년대 민주화시대를 경과하면서도 자산불평등뿐만 아니라 소득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대기업과 공공분야를 중심으로 한 노조 조직원들과 중소기업 비노조 노동자들의 소득 불평등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의 약 10%에 해당하는 노조 근로자들과 여타 90%에 달하는 중소기업 비노조 근로자들의 소득격차는 극심해졌다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보장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두가 대기업 수준으로 임금을 보장해 주면 좋으련만 실현가능성은 불가 능히 다
인위적으로 임금 수준을 맞추기가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서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의 경제적 기초를 보장하는데 우선순위를 둬야 할 것이다
불평등은 경제발전과정에서 성장을 중시하는 국가주의적 경제모델에서 비롯된 것이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노조들의 고소득 독점이 낳은 결과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와 비노조원 사이의 소득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현재 상위 소득 10%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양대 노총 조합원의 상당수는 대기업, 공기업, 금융기관 등 임금 수준이 높은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노조 조직력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욕망을 관철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임금 지불능력은 한정될 수밖에 없으므로, 중소기업과 하청기업들 임금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임금 근로자 약 2,000만 명에서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는 인구 규모는 약 2백만 명으로, 양대노총 노동자들이 여기에 해당될 확률이 매우 높다
최고 소득을 올리는 전문직과 기업경영진들의 숫자는 소위 상위 1%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근로소득 상위 10%에는 당연히 양대 노총 근로자들이 다수를 점할 것이다
노동자 대다수가 중소기업의 노조 없는 노동자들이고, 대기업 노조원들에 비해 소득이 절반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근로소득의 독점과 양극화는 조직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주는 방법은 노동계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다
산업별 노조가 완성되어서,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임금이 지불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업별로 경영자와 노동자 대표가 합의하여 임금 수준을 결정하게 되면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 노조들이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 없으니, 노동계 변화는 특단의 구조개혁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자산과 소득의 불균형 때문에 대다수가 상대적 빈곤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도 민주화 과정에서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이 경제적 평등에 기여했다는 공과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소득상위권으로 편입되는 결과로 되었다
사람의 자유는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는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현 체제는 결코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했고, 상대적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경제적 처지와 관계없이 민족 우월성과 선진국 시민이라는 환상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근본적으로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본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할 기초를 보장해줘야 할 것 같다
요즈음에는 주택이 불평등의 근원이 되고 있다
주택문제에도 해방 이후에 토지문제 해결을 위해 추진했던 혁신적 접근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값싼 토지를 공급해 주택원가를 낮추는데 집중하고, 투기대상이 되는 주택 가격은 주택 시장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의 핵심은 사회 구성원의 의식주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원리를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