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한국 자유주의의 시련

반공 이데올로기와 독재체제

by 이민영

대한민국 반공 이데올로기는 초기에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명분으로 작동했다

남북한 대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규정한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국가권력이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를 짓밟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정치인사들에게도 정치적 탄압과 보복의 구실이 되었다

사상의 자유는 억제되었고, 언론의 자유도 심각히 위협받았다

심지어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사법살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국가가 앞서고 이념이 우선인 사회였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희생될 수 있으며,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역시 유보되던 세월이었다

권력자들은 자유체제 수호자로 자임했지만, 반공이념과 국가주의는 늘 인권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독립운동과정에서도 공산주의와 협력을 거부했고, 해방 이후에도 좌파와 손을 잡지 않았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이 정치적 힘을 발휘한 계기는 1947년 3월12일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대소협력노선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의 반공주장이 미국의 노선과 보조를 맞출 수 있게된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적 선택이 대통령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 원칙들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통치 이데올로기 역할에 충실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직후 국가안법을 제정하고 악용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명시하고 있었지만, 우리 국민들에게는 자유주의 경험과 전통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반공을 자유와 동의어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체제는 곧 반공이고 애국이며, 자신을 자유주의 전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유주의의 적이며 전체주의자들이고, 외세에 의존하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반공이 곧 자유'라고 강요받았다


1948년 정부수립 직후, 국회에서 형법과 민법 등 주요법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부터 통과시킨다

상해임시정부 출신들이 주축이었던 한국독립당은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독당은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며, 법안의 수정 또는 폐지를 요구했다

특히 ‘사상 자체를 처벌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부정하는 입법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국가보안법 제정은 북한과의 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통일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도 지적했다

“반공을 이유로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면, 남북 통일을 위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조소앙 국회연설에서 “반공이 아니라 반민주적 법률이 될 것”이며, “결국 이 법이 남용되어 대한민국이 경찰국가가 될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광복군 대장이었던 지청천도 국회연설을 통해 국가보안법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국가보안법은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보호해야 할 것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이다. 그러나 이 법은 정권 유지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 독립운동가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그런데 이제 같은 민족이 자유를 억압하는 법을 만들려 한다니 통탄할 일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민주주의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이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사상 자체를 처벌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조선일보>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입장을 보였다

조선일보 국가보안법 반대 사설

1948년 11월14일자 사설에서 '국가보안법을 강력히 배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가보안법이 광범하게 정치범 내지 사상범을 만들어 낼 성질의 법'이라는 점을 반대이유라고 했다

가장 보수적인 신문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가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던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국가보안법 운용에 신중을 기하라' 는 사설에서, 국보법 제정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유지한 바 있다


이승만대통령과 한민당은 1948년 12월 1일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강행 처리하였다

국가보안법 법률이 시행된 이후에도 한독당의원들은 국가보안법 개정을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국가보안법은 다음해 1949년 한해동안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국가보안법이 최초로 위력을 발휘한 것은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1949년 5월 19일 경찰이 여러명의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였다

민족자주연맹 소속 김약수, 윤길중과 이문원 무소속의원 등이 북한과 내통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강압적 신문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재판과정에서는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된 것이다

해방이후에는 암살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사건이 많았는데,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정권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률적 수단을 통해 반대세력을 축출한 것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은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를 위협하는 법적 장치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악용한 사법살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이다

조봉암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는데, 그는 고향 강화에서 3·1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조봉암은 후일 3·1 운동은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하였다’고 회상했다

조봉암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돼 7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해방 전까지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독립활동에 가담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 그는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중도 통합노선’을 주장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전향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추진하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216만표가 넘는 득표로 이승만대통령으로 위협하는 정치적 경쟁자가 되었다

조봉암은 선거 직후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말해, 선거부정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당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정면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평화적 방식에 의한 남북통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제3의 길 등을 강령으로 제시했다.

이승만 정부는 무력 북진통일만을 유일무이한 통일의 방법론으로 규정하고, 전쟁 이후 북한과의 타협 또는 정치적 협상 등은 금기시 했다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이 창당한 소위 '진보당사건'을 발표하여 그를 제거하였다

진보당 사건의 서막은 간첩단 사건과 평화통일 엄단을 목적으로 한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이었다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이 시작되었다

재판받는 조봉암 진보당 당

서울시 경찰국은 진보당 간부들이 북한과 내통하여 사회주의 제도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10인은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2월 육군 특무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 조봉암이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조봉암은 기소되었는데, 1심에서는 징역 5년에 그치는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승만은 사법결과에 불만을 표시하며 사법부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말도 안 되고, 자신이 해당 판사를 ‘처단’하려는 생각까지 했다며 재판부 위협을 서슴치 않았다

독재정권은 늘 사법부를 압박해 그들이 바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


1959년 2월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사형집행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1959년 7월 최종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치적 경쟁자를 사상과 간첩혐의로 제거한 일은 이승만대통령의 전체주의적 모습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2011년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국가변란 및 간첩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같은 사법살인은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부터 예고된 재앙이었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내세워 김일성 1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듯이, 남한에서도 자유주의 이름으로 이승만 1인독재가 구축되었다

남북 양쪽은 서로 다른이념으로 갈라섰지만, 정작 1인독재체제로 나아가는 길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승만의 언론정책도 전체주의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만정부는 집권 초기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1948년 9월 22일 언론정책 7개항을 발표한다

① 대한민국의 국시국책(國是國策)을 위반하는 기사,

②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③ 공산당과 이북 괴뢰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④ 허위의 사실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⑤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⑥ 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서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기사,

⑦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등에 대해 보도를 금지해 최초의 보도지침을 실행하였다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보도지침이라고 할 수 있고, 내용도 모호해서 원칙과 잣대도 없는 지침이었다


이승만정부는 우선 <제일신문>, <조선중앙일보>, <세계일보> 등을 정간 또는 폐간조치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13일 <제일신문>에 정간 처분을 내리는 동시에 부사장 김정형, 주간 신영철 외 10명의 기자들을 구속했다.

15일에는 <조선중앙일보>를, 18일에는 <세계일보>를 각각 정간 처분하고, 김창엽 외 8명을 구속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시위반'과 '광무신문지법' 저촉 혐의이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마련한 '광무신문지법'을, 이승만정부가 다시 살려내 언론탄압에 활용한 것이었다

광무신문지법은 언론에 대한 가혹한 규제를 담고 있다

신문 발행 시 허가를 받도록 하고, 발행 전 검열을 의무화하며, 발행 정지, 금지, 압수 등의 조치를 가능하게 하는 법이었다


대표적인 필화사건으로는 <경향신문> 정간사태를 불러온 '여적'이라는 칼럼과 관련한 사건이다

경향신문 1959년 2월4일자에 실린 칼럼이 문제가 되었다

<여적>이라는 칼럼에서는 페르디난드 A 허맨스 교수(미국 노트르담대학)의 글을 논평하는 내용을 실었다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허맨스 교수에 의하면 ‘다수결의 폭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설을 보는 한국의 다수당은 아전인수로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 같으나, 그의 주장 속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즉 ‘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요, 바꾸어 말하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라고 말했다

‘여적’에서는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되느냐의 원시적인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인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라고 맺는다.

선거부정에 대한 경종을 울린 내용이라고 할 수 있고, 다수의 폭정을 지적하는 글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경향신문 칼럼을 내란선동으로 형사처벌하고자 하였다

경찰은 2월17일 ‘여적’ 필자인 주요한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구속영장은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이후 검찰은 주요한과 한창우 사장을 내란선동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경향신문 탄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당시 법조 출입기자였던 정달선 기자와 서울시경 출입 어임영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하였다

그들이 작성한 ‘남파 간첩 체포’ 기사가 간첩의 도피를 방조하였다는 혐의로 처벌한 것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1년전,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은 ‘발행허가 취소처분’(폐간처분)을 받게 되었다

처분의 근거 법령으로는 1946년 미군정청이 공포한 법령 제88호를 내세웠다

미군정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법령을 1959년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그후 법률적 대응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정간처분을 철회시키지 못했고, 결국 4.19에 의해 정권이 붕괴되고 나서야 복간될 수 있었다


이승만집권 당시 사회에서도 조직화된 소수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였다

1950년대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반공단체였다

이승만은 정치적 수세에 몰릴 때마다 이들이 중심이되어 동원한 국민대회를 자주 개최했다

이 대회를 ‘민의’로 규정하며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관제 데모에는 대한노총 소속원들, 공무원 등이 주로 동원되었지만, 학생들이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대통령이 1952년 부산에서 벌인 정치파동은 참혹한 사례로 꼽힌다

6.25전쟁 중에 이승만은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다

1951년 11월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거쳐 발의한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로 넘겼다

국회는 1952년 1월 18일 이 개헌안을 압도적 표차로 부결시켰다.

전체 의원 163명 가운데 찬성은 19명에 불과했고 반대는 143명에 달했다

국회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뽑힐 자신이 없자 직선제 개헌을 추진했는데, 국회에서 저지당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단체를 동원해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한다

원외자유당과 대한청년단 등 친이승만 단체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연판장을 돌리고, 각종 집회와 군민대회를 통해 국회의원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이승만은 이에 대응하여 게엄령을 발동하였다

1952년 5월 25일 0시 경남과 전남북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공산당 잔당들의 출몰이 빈번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이었다

25일 밤부터 서민호 등 내각제 추진 의원들에 대한 체포가 있었고, 26일 아침에는 국회에 등원하던 의원 47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가 통째로 연행하였다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은 이들을 수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연행하는 헌병

소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한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장면도 체포 위기를 겪었다.

‘정부혁신전국지도위원회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는데, 공산 계열의 국가 전복 기도와 야당 을 결합시킨 대규모 조작극이었다

친이승만 세력들은 국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요구하면서 부산에서 국회해산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6월 2일에는 의회를 향해 최후통첩을 하는데, 6월 3일까지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로 헌정은 위기에 빠졌다

전쟁 중 쿠데타 상황에 직면한 미국이 직접 나섰다

6월 3일 아침 트루만 미국 대통령의 경고 서한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서한에서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하였고,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란 바로 국회 해산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고로 이승만은 국회해산을 단념하게 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동원한다

경찰을 동원해 피신한 의원들을 등원시키고 구속 중인 의원들을 석방해 국회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의사당 출입을 금지한 상태에서 개헌안 심의를 압박하였다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이승만대통령은 경찰과 군으로 국회를 포위한 상황에서 직선제 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재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명이었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산정치 파동은 성공한 게엄령이 된 셈이었다

< 우리역사넷, 부산정치파동 중에서 >


이승만정부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이데올로기 국가를 형성했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집중하는 순간 부터 이념의 폭정이 지배하는 사회로 흐르게 되어 있다

자유로운 사상과 행동은 국가와 사회의 독소로 인식하게 만든다

일종의 브레인와싱(세뇌) 효과이며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도록 유도한다

이데올로기가 한 사회를 지배하게되면 조직된 소수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공산당이 그랬듯이, 반공의 최대 수혜자는 집권세력이었다

이승만 재평가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이들도 있고, 이승만정부를 비판하는 소위 좌파그룹도 있다

이승만 체제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 편향에 따라 모두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경을 쓰고 평가하고 있다

백색과 적색안경으로 바라본 이승만대통령은 찬양의 대상이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념의 폭정과 집단주의, 조직화된 소수의 폭력으로 무장한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오늘의 현실에서 또다시 이데올로기 대결과 체제전쟁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주의 쟁취를 위해 좌파식 전선 대결이나 강성집단에 의지하는 모습은 기본원리에서 벗어난 것 같다




박정희 군사정부 출범은 우리사회를 국가주의 사회로 급속히 이행시킨다

군 엘리트들은 집단의 규율을 중시하고 집단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집단주의 문화에 익숙하다

특히 군대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60만에 가까운 거대한 집단이 되어 있었고, 군 장교 엘리트들은 국가라는 이름을 내세워 사회를 개조하려는 성향이 강한 집단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 아래 국가와 집단을 앞세우는 군사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군인출신 지도자들은 상명하복, 전체주의적 질서에 익숙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고 시작한다

1968년 12월5일에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이다

국민들에게 강조된 논리는 국가를 위한 헌신이다

애국심을 갖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국가의 발전은 곧 개인의 발전에 직결되는 문제이고, 개인생활과 국가생활은 떼놓을 수 없었다

반공은 분단된 조국통일을 이루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권오병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해 만들어 졌고, 그해 11월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야당마저 정부가 주도하는 국민 의식 개조에 반대하지 않았다

정부가 주도하는 소위 '국가적 브레인와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1973년에는 선포일을 정부주관의 기념일로 지정됐다


유신 치하에서도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교육계 반발이 있었다

1978년에는 송기숙 등 당시 전남대 교수 교수 11명이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공동으로 발표한 '교육지표 사건'이 발생했다

교수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이렇게 비판한다

전남대 교육지표 기념 조형물

“국민교육헌장은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그 제정경위 및 선포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메이지천황 무쓰히토가 국민에게 직접 충성과 효를 분부하는 형식의 유지)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애족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 날의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 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 교육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교수 11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해직됐고, 학생 30여 명이 구속되고 제적·정학 처분을 당했다.

교수진 전원은 379일 동안 불법구금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강조한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본 인권과 자유가 부정당한 사건이었다

<출처: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국민교육헌장은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4년 전체주의 강조 등 군사독재의 잔재라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김영삼대통령은 과거 국회에서 국민교육헌장에 찬성했지만, 대통령이 되고나서 이것을 교과서에서 삭제했다

박정희 국민교육헌장 제정은 국가주의적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했다

국민교육헌장에서 자유주의 체제수호를 강조했지 자유주의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정부주도의 의식개조는 청소년 교육에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학교에서는 국민윤리 과목을 만들고, 교육과정은 국가주의를 전파하는 창구가 되었다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소위 '긴급조치'가 연달아 발동되었다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 선출을 전국민의 선거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선거로 바꿨다

임기는 6년이고 영구 집권이 가능했다.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주었는데, 국회 해산권, 법률안 거부권, 긴급조치권 등이 주어졌다

1972년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 2,359명 가운데 무효 2표를 제외한 2,357표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려 99%의 찬성표를 얻은 것으로, 북한의 공산당 선거결과와 비슷하다

어떻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단 말인가?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는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을 탄압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국정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권을 선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박정희 정권에 사실상 입법과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부여한 것과 다름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장악하면 입법과 사법기능을 침해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를 금지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1973년 8월 중앙정보부가 일본에 있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내에서 반유신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1973년 12월 24일 장준하, 계훈제, 백기완 등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개시한다

유신반대운동에 대응하여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개헌서명운동을 전면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다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1975년 공포된 긴급조치 9호는 단연 최고의 악법이 되었다

1975년 4월 남베트남 정부가 공산군에 의해 붕괴되자 박정희는 안보 위기감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각종 관변단체들을 동원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안보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안보불안감을 배경으로 소위 사회 불순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단행한다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 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긴급조치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세월이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사실상 인권와 민주주의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로 변화했고, 안보위기를 내세운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70년대 대표적인 학생운동이었던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유신정권의 대응은 가혹했다

1974년 서울에 각 지역 대학 대표자들이 모여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때 유인물에 등장한 단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었다

민청학련은 4월 3일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서울대 등 몇몇 대학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생한한 것에 그치고 말았다

민청학련이 배포한 선언문에서 요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굶어죽을 자유말고 먹고 살 권리 찾자.

2. 배고파서 못 살겠다. 기아임금 인상하라!

3. 유신이란 간판걸고 국민자유 박탈마라.

4. 남북통일 사탕발림 영구집권 최후수단

5. 재벌 위한 경제성장 정권 위한 국민총화

6. 왜놈 위한 공업화에 민중들만 죽어난다.


모든내용이 생활적 요구이고 어쩌면 소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박정희정권의 대응은 '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로 정부전복을 꾀했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다

시위 주동자에게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고, 시위 주동자의 출신 대학은 폐교시킬 수 있다고 협박했다

얼마후 정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국내좌파와 재일 조총련를 망라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조사과정에서 학생들에게 고문을 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하였다

이 사건으로 총 1,204명이 검거되어 203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민청학련 군사재판 모습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 6명은 사형,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15~20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인혁당 관련 인사들에대한 재판과 사형집행은 또다른 사법살인으로 유명하다

중앙정보부가 인민혁명당이라는 가공의 조직을 만들어 이수병 등 민주인사 8명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이다.

인혁당은 고문을 통해 조작되었다

박정권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사형 확정선고가 있은 지 18시간 뒤인 9일 새벽 사형을 집행해 버렸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에 분노하고 가장 앞장서 고발한 외국인이 있었는데, 미국인 신부 제임스 시노트였다

그는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하고 있었다

시노트 신부는 ‘공산주의와 싸워 하느님께 봉사할 것’을 서약한 반공주의자였다.

피노트 신부 모습

1960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영종도·무의도 등 섬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활동했다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피노트신부는 인혁당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다고 한다

사형이 집행된 그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날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박정희 정권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형집행이 끝난지 20일 후에 한국에서 강제추방을 당했다.

그는 추방당하고 난 이후에도, 미국의 교회와 학교, 기타 여러 모임에서 유신의 폭정을 고발하고, 미국 정부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고 다녔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국가주의적 폭압체계에 맞서 싸우는 시민저항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박정희 정권이 반공이념과 안보위기로 대응하고 공산당의 혁명 사건으로 조작했지만, 민주화 요구는 매우 현실적 수준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좌파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지 않았고, 전투적 조직도 없었으며, 국민운동 성격이 강했다

이 당시 정부는 민주화운동이 북한과 연계된 반체제 운동이라고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나중에 실제 학생운동이 좌파성향을 보였을 때도, 국민들은 정부의 수사발표를 믿지 않게 되었다

이로인해 1980년대 학생들의 좌파 혁명운동세력과 순수 민주화운동의 구별이 어렵게 되었다

물론 학생들 대다수는 민주화요구에 공감했을 뿐 좌익혁명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학생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에는 짧지만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정치권에서는 3김이 정치적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고, 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계속해갔다

학원자유화, 비상계엄 해제 등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요구를 내세웠다

유신 체제에 협력했던 ‘어용 교수 퇴진’이 최우선 과제였고,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의 정치적 이슈도 등장했다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우리의 평화적 교내 시위는 이제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싸울 것”이라고 결의하고 거리투쟁에 나섰다

80년 민주화시위의 절정은 5월15일 서울역 집회였다

서울역에 대학생 10만여명이 집결하여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그런데 공수부대가 투입 등의 소문이 돌면서 유혈사태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날밤 각대학 총학생장들은 학생 연합 시위를 잠정 중단하는 ‘서울역 회군’이라는 ‘연합 시위 중단’ 결정을 내렸다.

전두환등을 중심으로한 신군부는 바로 이 시점에 대학가 대규모 시위를 문제삼아,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린다


1980년 5월17일 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을 제주도까지 포함시킨다는 포고령과 함께 전국 대학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은 학생과 공수부대의 정면충돌이었다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고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한밤중에 체포하여 연행했다

공수부대의 무모한 진압과 폭력이 학생들에게 가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광주에서는 광주시민과 군인의 대결로 확산되었다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이 도청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군인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20일에는 택시와 차량 200여대가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대형버스를 앞세운 시위대

21일에 광주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비무장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었다.

총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도청앞을 지나던 고등학생 이성귀가 총격에 사망했다

같은 날 전남대 앞 주택가에서 임신 8개월의 최미애씨가 조준 사격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격분한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22일 계엄군이 광주시에서 철수하여 외곽으로 물러났다

22일부터 5일동안 광주는 해방공간이 되었고,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며 저항했다

경찰과 군인이 없는 도심에서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며 먹을거리를 나눴다

부상자 치료를 위해 시민들이 헌혈에 동참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5월28일 계엄군이 새벽에 전남도청에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장악함으로써 광주민주화운동은 끝을 맺었다

최후까지 도청을 지키던 윤상원 시민군대장 등이 희생되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체포 연행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숫자는 정부조사 결과 사망 166명, 행방불명 179명, 부상 2천617명 등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고 확인하고 있다

사망자중에서 20대 38.6%(64명), 10대 34.9%(58명) 순으로 많았는데, 전체 사망자의 73.5%가 미성년자와 청년층이라는 점이다

특히 10대 사망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시위와 무관한 다수의 민간인이 계엄군의 총격이나 폭력에 희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80년 광주에서 당시 상황을 경험한 외국인들도 광주시민들에 대한 군인들의 폭력을 세계에 고발하는데 앞장섰다

광주에 파견된 허철선, 허마르다 선교사 부부는 광주 민주화투쟁을 외국에 알리는 일에 진심을 다했다

'허마르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선교사 마르다 헌트리(Martha Huntley)의 한국 이름이다

허철선 선교사 역시 미국인으로 본래 이름은 헌트리(Charles Betts Huntley)이다

허마르다와 그의 남편인 허철선은 선교사 부부였다

허철선 선교사 빈소(2017년)

5월 18일 두 부부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20여 명의 학생이 자신들을 숨겨줄 것을 간청했다

광주 양림동 선교부 사택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됐고 서너 가구만이 살던 때다.

허마르다 부부는 “정의를 위해 기꺼이 거짓말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을 자신의 사택에서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허마르다 선교사 사택은 시민을 구하는 ‘도피처’가 됐다고 한다

남편 허철선 선교사는 참상의 현장을 촬영했고, 허마르다가 글을 작성해서 지인들을 통해 광주의 진실을 해외에 알렸다.

사택의 차고를 개조해 암실을 만들어 직접 사진을 인화해서 미국과 독일 등 외국으로 보냈다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 시신이 안치된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피터를 비롯해, 외신기자와 해외 선교사들에게 광주의 실상을 전했다

허철선, 허마르다 부부는 이름도 명예도 없이 그저 진실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전두환 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력적 진압으로 인해, 80년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변질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노선을 받아들이고, 폭력투쟁을 기본으로한 혁명운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분명한 이념과 투쟁노선을 정립했다

전두환정권의 폭압체제와 극한 탄압에 맞서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광주 시민들의 투쟁으로 광주시내에서 해방공간을 창출했다는 점은, 마치 19세기 프랑스의 파리쿄뮨과 같은 경험처럼 인식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투쟁을 잘 조직화하기 위해 지도부를 중심으로 단결할 필요성이 있으며, 비합법적 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모든 조건이 과거에 유행했던 사회주의 노선을 수용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되었다

사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비합법 조직운동으로 변모되었다


1980년초 학생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두개의 계곡을 지나야 했다

하나는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대학생으로서의 '기득권 포기'로 표현되는 헌신적인 신념이었다

사회주의와 혁명운동에 헌신하는 결단을 요구하였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은 집안에서 기대를 받는 특별한 존재였고, 학생들은 엄청난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 조직은 비합법적으로 진행되었고, 점점 더 혁명적 전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조직원들은 반정부 투쟁을 주도한 뒤, 자신들은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학생운동 조직들은 일반 대중을 선도하는 전위집단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좌파이념이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집단이 되었고 자유주의와 결별하였다

자유주의는 부르조아 이념으로 매도되었고,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사상이였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민중이 중심이 되는 권력, 민중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반공이데올로기와 독재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순수 민주화운동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였다

1980년 중반에 이르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도 등장하게 된다

민중주의를 우선하는 소위 'PD계열'과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NL진영'사이에 파벌경쟁도 진행된다

197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우선하는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달리, 1980년대에는 혁명이념과 전투조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학생운동권의 여파는 오늘날에도 집단주의, 민족주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소위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세대들의 의식 속에서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있다

과거 1960, 70년대를 살았던 노년 세대들에게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가 강한 향수로 남아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80년대 민주회운동에 성스러운 특별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는 좀 심한 반발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한번 자신의 가치에 성스러움을 부여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더욱 더 원리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가치와 다른 것을 모두 적대시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화운동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맞서다가, 결국 좌파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된 사실은 안타까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이후 박정희시대와 민주화시대를 거친 세대들은 자유주의에 익숙하지 않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과거 자유주의 체제 수호를 외치며 반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람도, 학생운동과정에서 반미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도 비슷하다

오늘날 자유주의적 성향은 그들과 전혀 다른 문화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단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개인주의 또는 이기심으로 폄하할지 모른다

개인주의가 얼마나 진보적이고 위대한 발견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의무와 헌신, 열정만이 진정한 가치로 삼고자 한다

다양성과 개방적 태도를 갖춘 사람들만이 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체제는 국가주의나 집단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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