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마음에 관한 사상은 불교에서 가장 심오하게 다뤄진 영역이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생각도 사실 불교에서 근원한 것이다
불교는 마음의 실체에 대해 접근하고자 했던 종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마음 이야기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일화는 신라시대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원효의 에피소드이다
중국 ‘송고승전’에 나오는 일화는 원효대사가 주인공이 아니고, 신라 고승 의상대사에 대한 글에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일체유심조를 말하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組)는 불교 화엄경의 핵심 사상이다
세상만사나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원효는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는데, 두사람은 당나라 당항성에 이르러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을 잤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날이 새어서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았다
원효는 심한 구역질을 하다가 불현 듯 이런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밤에는 그렇게 맛있고 시원한 물이, 오늘 아침에는 구역질을 하는 역한 물이 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효의 에피소드를 이야기를 이렇게 알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실제 원효 이야기는 다르다고 전한다
2020년 한국일보에 실린 “원효 해골 물 사건의 진실과 허상” 제목의 칼럼에서,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송고승전’ 권4 ‘의상전’에 따르면, 원효와 의상은 해가 져 갑자기 노숙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굴에 묵게 된다
그날은 편안히 잠을 잤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그곳은 동굴이 아니라 인골이 흐트러져 있는 무덤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서도 하루 더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귀신이 나오는 꿈에 극도로 시달리게 된다
똑같은 곳에서 잠을 잤는데, 어제와 오늘이 그토록 다른 것은 다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원효는 ‘마음이 인식 대상을 결정할 뿐’이라는 일체유심조를 깨닫는다
원효는 이때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이라고 했다
즉 “마음이 생기면 일체의 현상이 나타나고, 마음이 고요하면 동굴과 무덤은 다르지 않네”라는 각성의 시를 읊었다
그리고 원효는 바랑을 메고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원효스토리는 한참 지나고 나서, 해골 물 이야기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자현스님은 효율적인 전달을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었지만, 해골 물 이야기는 좀 더 극적인 반전이 존재하고 강력한 생명력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자료가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해골물 이야기가 일반화되어 있다
마음을 좀 더 자극하는 이야기가 널리 확산된 것이다.
실제 사실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결과야말로 일체유심조와 비슷해 보인다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는데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려있다
원효 입장에서는 행복과 불행은 마음이 지어낸 것에 불과하며, 객관적인 상황과 조건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 의미를 강조한다
불교에는 일체유심조와 비슷한 말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도 있다
하나의 물이(一水) 네 가지로 보인다(四見)는 뜻이다.
천상계에 사는 천인들에게는 맑은 유리보석으로 보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마시고 씻는 물질로,
물고기들에게는 사는 집으로,
아귀들에게는 먹지 못하는 뜨거운 불로 인식된다는 내용이다.
똑같은 사물도 처한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세상의 근본문제로 다루고 있다
불교는 왜 마음에 집중했고, 고대인들은 불교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까
불교를 창시한 붓다의 삶에서 그 연원을 찾아보아야 한다
불교 사상은 붓다가 살았던 당시 인도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부인하고자 했다
마음에 관한 사상이 곧 삶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시절 석가모니는 힘들게 살다가 병들고 늙어 죽는 소위 생노병사의 고통을 직면하였다
인간의 삶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사실 이런 사고는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인도의 아주 오래된 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는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찬 삶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현재 겪는 고통의 근원은 전생(前生)의 업(業)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규정한다
붓다는 브라만교와 달리 말했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전생의 업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서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생의 업은 어찌할 수 없는 과거이지만, 마음에서 오는 고통은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찌할 수 없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그는 혹독한 고행의 길을 걸었다
출가한 후 6년 동안 계속된 고행을 통해서도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었다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 등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고행을 계속해온 것이다
질병에 시달리고, 집도 없이 인간의 모든 고통을 이겨내며 굳세게 노력했다
마침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고행을 멈추고 단식도 그만두기로 했다
붓다는 고행으로 몸이 쇠약해져 거의 죽음 상태에 이르렀을 때, 어는 소녀의 우유 한그릇을 공양받고 소생하였다
그는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강에서 몸을 씻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라고 했다
우유를 마신 붓다의 몸에서는 기운이 솟아났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함께 해온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말했다
"그토록 고행을 쌓고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세상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붓다가 타락했다고 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붓다는 다시 홀로 숲속에 들어가 커다란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았다
평온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깊은 명상에 잠겼고, 7일째 되는 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유를 제공한 수자타의 공양은 불교에서 가장 신성한 보시로 여긴다
우유와 쌀을 함께 끓인 유미죽은 '깨달음의 음식'으로 수행자들의 기력 보충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불교계에서는 붓다가 여기에서 중도의 길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중도의 길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길이다
두 가지 치우친 길은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도의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열반에 도달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을 찾아낸 것으로 말한다
불교의 사상을 좀 더 들어가 보자
마음에 대한 사상은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비롯된다
제법(諸法)은 인도에서 다르마(dharma)이며 사물의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어떤 사물의 존재에는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브라만교는 세상에 본질이 따로 있고 현실은 허상이라는 입장이었다
고대 플라톤이 주장한 이원론적 세계관과 비슷했다
모든 것에는 본질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 현실 배경이 있다
붓다가 인도에서 살았던 인간이기에 인도라는 사회와 2천5백년전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제법무아 사상도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상황을 반영한 주장이었다
부처는 사물의 근본 존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인도의 브라만교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브라만교는 당시 고통스러운 인도사람들을 통치하는 브라만 계급이 만들어낸 종교였다.
브라만계급은 그들이 지배한 계층의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브라만교 교리에서는 모든 사물에는 본체가 있으며, 존재에는 영원히 불멸한 것이 스며들어 있다
인간의 삶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존재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단정한다
세상의 법칙과 원리는 이러하니, 무릇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업을 짓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이번 생을 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실세계에서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스런 현실일지라도 자기계급에게 주어진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이것이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무(카르마)라고 강조했다
이번 생애에 주어진 계급은 전생의 결과이니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이번 인생에서 자신의 계급적 의무를 충실히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결과가 기다릴 것이라는 희망고문을 주는 것이다
이런 브라만교 교리는 지배받는 사람들을 길들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불교는 브라만교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시했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실체는 없고, 모든 실체는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인 것이다
‘제법무아’는 이것을 강조한 말이다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교는 당연히 혁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제도와 전통에 대해 ‘우연히 만나 이뤄졌고 또 바뀔 수 있는 대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중요하고, 마음 사상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원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마음을 연구하는 것이 불자들의 과제가 되어버렸고, 수많은 마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있는 본성을 바로 보는 것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길(見性成佛)이라고 한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마음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하늘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고,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세상에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부처의 가르침과 달리, 후대에 이르러 불교에서 마음의 본질을 쫒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불교의 사상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역시 중요한 주제이다
우주 만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의미라고 한다.
제법무아가 세상의 본질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임을 강조하는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항상 불변하는 존재가 있다고 믿고 본질을 쫒아가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고 이런 믿음을 바꿔야한다
무상(無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므로, 시간적으로 영원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아니며, 허무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영원하고 불멸한 것을 쫒지말라는 경고이다
부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원리 연구는 여전히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보일 때가 많다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 역시 사람에게 잠시 머물다가는 의식세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세상 모든 것들이 지나치는 마음의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깨끗하고 정갈한 정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마음은 알기도 어렵고 이해하기 조차 힘들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현재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 마음도 잡을 수 없다.”(般若經 반야경),
“마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뇌에 더럽혀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탐(貪)·진(瞋)·치(痴)에 의해서 더럽혀지며, 삼세에 속하는 온갖 것에 무엇을 마음이라 하랴.”
(心地觀經 심지관경)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연기와 먼지나 구름 그리고 안개 따위가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심성의 청정함은 물속의 달과 같다”
(大寶積經 대보적경)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대해 말할 때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중시한다
부처의 첫 깨달음은 사성제이다
4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며, 고·집·멸·도로 압축된다
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실천적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고(苦)는 인생은 본질적으로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으며, 사람의 생로병사와 현실적 고통 그 자체는 인간이 반드시 겪을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결과로 인식하는 것이다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은 사람의 집착과 욕망에 있으며, 사람의 가장 근원적 욕망을 삼독심(三毒心)에 있다고 보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삼독심 즉 마음속의 장애가 되는 세가지 번뇌를 없애야 한다
세가지 번뇌는 탐(貪)·진(瞋)·치(痴)로 규정한다
세가지 독이라는 뜻으로 삼독(三毒)이라고 부른다.
탐은 그 대상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에 대해 사랑하고 집착하므로 갈애(渴愛)라고도 한다
진은 분노하는 것,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말하며, 시기와 질투, 증오까지 포함한다
치는 어리석음, 즉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말하며 이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판단할 수 없게 되고, 이런 것들이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했다
삼독으로 부터의 해방이 깨달음으로 가는 방향이다
멸(滅)은 괴로움이 마음에서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과 욕망이 남김없이 사라져 번뇌가 없는 상태인 열반을 의미한다
인생의 괴로움이 사라진 청정한 상태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수행 목표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고요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도(道)는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라고 말한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양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는 8가지 덕목으로 수양해야 한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정견(正見)은 바르게 보기, 즉 바른 견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생각이라는 뜻으로,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어(正語)는 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 거짓말, 속이는 말, 이간질 등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참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이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동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부정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사유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 습관을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다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노력으로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정념(正念)은 바른 의식으로 항상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정정(正定)은 바른 명상으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다.
팔정도 [八正道] (두산백과)
부처의 사성제와 팔정도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엄청난 요구를 할 수 있나 생각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사람의 본능적 욕구도 억제해야하고, 사회적 욕구도 초월해야 한다
감정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고, 각자의 신체와 연계되어 나타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로병사와 관련된 신체적 고통이든,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진 사회제도적 고통이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진 욕망의 결과라는 결론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으라고 당부한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 전통에 반대하는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사문이라고 하였다
사문에는 무려 62종에 달했고, 이중에서 6개 사문이 대표적이었다고 한다
불교 역시 대표적인 사문중의 하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브라만종교를 부정하고, 새로운 종교 사조를 만들어서 독립적인 종교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사문들이 새롭게 제기한 문제들은 대체로 3가지의 문제였다
‘카르마(業)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가’
‘카르마를 어떻게 정화할 것인가’
‘윤회한다는 절대적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가’의 문제였다
고통을 겪는 원인이 전생에서 쌓은 카르마 때문이라는 운명론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했다
알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전생의 업으로 부터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계급적 의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다음 생의 삶도 고통이 계속될 것이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윤회를 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에 대한 믿음도 부정되었다
인도인들이 전통종교에서 부닥친 운명론적 세계관, 영원불멸한 영혼과 윤회, 카스트 신분제도의 굴레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는 카스트의 굴레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업과 윤회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지향한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의 마음이야기에서 고대 인도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